• 코로나19로 시간·장소 자유로워진 유연근무제 정착… 대기업 4곳 중 3곳 탄력적 근무 현재 실시 중, 근무시간보다 성과 중심의 평가제도 정착 필요

    입력 : 2020.08.28 10:50:27

  • 코로나19의 급속한 확산 여파는 기업에서 재택근무 등 유연근무제가 본격적인 근로방식의 하나로 자리 잡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근로자 300인 이상의 대기업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2018년 7월 1일부터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이 본격화되면서, 근로시간을 줄이면서도 생산성 향상을 위한 수단으로 기업의 유연근무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정부와 학계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하지만 실제로 기업들의 유연근로제 활용은 정부에 ‘보여주기’식에 그친 경우가 많았다. 사실상 제도만 존재할 뿐 직장인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기업 내 문화로까지 정착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이런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고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유연근무제를 실시하게 됐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재택근무를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확산이 진정된 상황에서도 코로나19 확산 예방을 위해 직원들의 출퇴근 시간과 근무 장소를 근로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2월 급격한 확산 이후 6개월이 흐른 지금 우선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착 단계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 7월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국내 매출액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코로나19 이후 근로형태 및 노동환경 전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들의 75.0%는 코로나19에 대응해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 4곳 중 3곳이 탄력적인 근무를 현재 적용하고 있는 셈이다. 대기업들이 활용하고 있는 유연근무제 형태는 재택·원격근무제(26.7%), 시차출퇴근제(19.0%), 탄력적 근로시간제(18.3%), 선택적 근로시간제(15.4%) 등 순이었다. 코로나19 이후 유연근무제를 도입·확대한 대기업의 10개사 중 약 6개사(56.7%)는 유연근무제 시행이 업무효율 및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구체적으로는 매우 긍정적(15.6%), 긍정적(41.1%), 이전과 비슷함(38.9%), 부정적(3.3%), 매우 부정적(1.1%) 순이었다. 유연근무제를 운영하는 기업의 과반(51.1%)은 코로나19가 진정된 이후에도 유연근무제를 지속·확대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이는 유연근무제를 축소하겠다고 응답한 기업 비중 7.8%의 6.6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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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연근무제 확산 선봉에는 SK 유연근로제 활용과 확산의 선봉에는 SK그룹이 있다. SK그룹은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가장 활발하게 재택근무와 원격근무를 실시해왔다.

    SK㈜는 8월부터 회사나 자택이 아닌 어디서든 근무하는 이른바 ‘오피스 프리(office-free)’를 시행 중이다. 오피스 프리 대상자인 SK㈜ 지주사 임직원들은 사내 시스템을 통해 원격근무를 신청하면 되고 임원 등에게는 안내 메일이 발송된다. 이 회사 관계자는 “코로나19 장기화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보다 생산성이 높고 효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장소를 자율적으로 선택해 일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라며 “재택근무와 유연근무 등 ‘스마트워크’ 체제를 활성화하는 차원에서 사무실 이외 근무공간을 좀 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옵션을 넓혔다”고 설명했다. 올 상반기 SK이노베이션에 이어 지주사까지 어디서든 원격근무가 확산하는 양상이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5월 한 달 동안 매월 첫 주는 사무실로 출근하고 나머지 3주는 재택근무를 포함해 어디서든 자유롭게 근무하는 ‘1+3 테스트’를 시범적으로 운영했다. 3주간의 ‘오피스 프리’ 기간엔 재택근무는 물론 야외에서도 온라인만 연결되면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SK이노베이션은 ‘1+3 테스트’에 대한 업무 효율성 평가를 거쳐 현재는 부서장 재량으로 자율적으로 재택이나 원격근무를 셀프 디자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SK텔레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전 임직원 재택근무를 시행했다. 지난 2월 25일부터 40일간 전원 재택근무를 한 후, 조직·지역별 상황에 따라 출근과 재택근무 비율을 유동적으로 운영하는 ‘상시 유연근무제’ 체제로 전환한 상태다.

    지난 4월부터 서대문, 종로, 판교, 분당 등 4곳에 거점 오피스를 운영 중이며 올해 안으로 총 10여 곳의 거점 오피스를 운영할 계획이다. 재택근무 시 업무 인프라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집중도와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자 대안을 마련한 것이다.

    예를 들어 판교에 거주하는 직원이 분당에서 비즈니스 약속이 있다면, 본사로 출근하지 않고 판교나 분당 거점 오피스 자리를 예약해 업무를 보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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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점 오피스 지역은 서울 을지로 T 타워에 출근하는 본사 직원들의 거주지를 분석해 선정됐다. 현재 본사 직원 가운데 서울 내 거주하는 직원은 전체의 약 50%, 수도권으로 확대하면 약 80%로 추산됐다. 거점 오피스에는 인공지능(AI) 안면 인식, 워킹 스루, 좌석·회의 예약 시스템, 화상 회의 시스템, VDI(모바일 PC) 등이 구축돼 있다.

    특히 SK텔레콤이 미리 구축해 둔 클라우드 PC, 협업 툴 ‘팀즈’, T전화 그룹 통화 등을 통해 각 구성원들이 다른 사무실에 흩어져 있어도 효과적으로 협업할 수 있는 시스템이 이미 구축돼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현재는 디지털 워크 문화가 잘 정착돼 팀원들이 원격 근무를 하더라도 업무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출퇴근으로 소요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재택근무 시 업무 몰입 환경 마련이 어려울 경우 이를 보완하는 등 현행 근무 방식들의 절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거점 오피스 구축을 통해 근무 환경 혁신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유통가에서는 롯데가 SK텔레콤처럼 거점 오피스를 운영하고 있다. 롯데쇼핑HQ(헤드쿼터)는 주 1회 재택근무 시행에 이어 7월 1일부터 거점 오피스 제도를 시행 중이다.

    롯데쇼핑HQ는 전략기획본부·지원본부·재무총괄본부 등 롯데쇼핑 각 사업부에 포진돼 있던 스태프 인력을 한 데 모은 조직이다. 1월 신설됐고 각 사업부는 영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했다.

    롯데쇼핑HQ가 마련한 ‘스마트 오피스’는 수도권 일대 5곳이다. 롯데백화점 노원점·일산점·인천터미널점·평촌점과 빅마켓 영등포점까지 백화점 공간을 활용해 총 5개 거점에 225석을 마련했다. 이 거점 오피스를 사용할 수 있는 직원들은 롯데쇼핑HQ와 롯데백화점·마트·슈퍼·롭스·e커머스 등 각 사업부 본사 직원 3000여 명이다.

    롯데쇼핑의 거점 오피스에는 좌석 예약 시스템이 구비돼 언제 어디서나 5개 거점 오피스의 좌석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각 지점별로 일부 좌석에서는 노트북을 비치해 이용 직원의 편의를 도모했다.

    대치동 포스코센터에 위치한 ‘포스코 어린이집’
    대치동 포스코센터에 위치한 ‘포스코 어린이집’
    ▶포스코, 재택근무 활용해 경력단절 방지 포스코는 재택근무를 활용해 직원들의 출산을 장려하고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방지하고 있다. 지난 7월부터 만 8세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 자녀를 둔 직원이 하루 4시간만 근무해도 정상 근무와 똑같이 경력을 인정받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직무 여건에 따라 전일(8시간) 또는 반일(4시간) 재택근무를 할 수 있다. 전일 재택근무는 일반 직원과 같은 시간대(오전 8시~오후 5시)에 근무하며 급여도 동일하게 지급한다. 반일 재택근무(전환형 시간선택제)는 하루 4시간 일하며 근무시간을 오전 8시~낮 12시, 오전 10시~오후 3시, 오후 1~5시 중 육아 환경에 맞게 선택할 수 있다. 급여는 일반 직원의 절반이 좀 넘는 수준이지만 승진하기 위한 경력을 일반 직원과 동일하게 인정받는다.

    특히 반일 재택근무는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육아지원 제도인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와 포스코가 이미 시행 중인 ‘전환형 시간선택제’에 ‘재택근무’를 연계했다. 직원들은 전일 재택근무 혹은 반일 재택근무를 재직 중 최대 2년까지 사용할 수 있다. 아울러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제를 연계한 반일 재택근무를 육아휴직에 합산해 최대 2년 더 쓸 수 있다.

    포스코 측은 “이 제도를 적극 활용할 경우 육아기 자녀가 1명이면 최대 4년까지, 자녀가 2명이면 최대 6년까지 반일 재택근무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시행에 대한 내부 반응도 우호적이다. 올해 부인이 둘째 아이를 출산한 한 직원은 “기존 육아휴직제도도 잘돼 있지만 가계소득 영향을 고려해 선뜻 활용하지 못했다”며 “재택근무 신청을 진지하게 고민해 볼 것”이라고 말했다. 포스코는 앞으로 경력단절 없는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그룹 차원에서 점차 확대 시행할 예정이다.

    이번 제도 실시에는 최정우 포스코 회장이 우리 사회 저출산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는 진정성 있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최 회장은 2018년 7월 취임사를 통해 “저출산 등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가치 있는 공헌활동으로 사회구성원의 성장과 삶의 질 개선에 기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LG유플러스는 서울 마곡 사옥의 R&D 부서에서 근무하는 300여 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주 3일 재택근무를 시행한다.
    LG유플러스는 서울 마곡 사옥의 R&D 부서에서 근무하는 300여 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주 3일 재택근무를 시행한다.
    LG유플러스는 7월 23일부터 포스트 코로나 시대 근무 방식 효율화를 위해 서울 마곡 사옥 R&D 부서 300명 임직원을 대상으로 주 3일 재택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혔다. R&D 부문 임직원은 회의가 진행되는 월요일, 금요일을 제외하고 매주 화, 수, 목요일에 재택근무를 하는 방식이다. LG유플러스는 클라우드 PC, LG그룹 내 커뮤니케이션 솔루션 ‘엠메신저’, LG전자 스마트폰 기본 기능 ‘그룹 전화’, 마이크로소프트(MS) 팀즈 등으로 화상회의를 진행, 업무에 지장 없이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한 전면 재택근무를 시행하지는 않았다. 제조업 특성상 코로나19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코로나19 증상을 보인 직원과 해당 부서나 같은 건물을 출입한 직원, 해외 출장자, 임산부·기저질환자 등 일부 직원을 대상으로만 재택근무를 진행해왔다. 대신 기존에 운영하던 유연근무제를 4월부터 확대 적용해 4일만 출근해도 되도록 운영했다. 이전에는 하루 최소 근무시간이 있어 주 4일 출근은 힘들었다. 하지만 월 근무시간을 채우는 조건 하에 출근일을 조정할 수 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2시간씩 추가 근무한 후, 금요일은 출근하지 않는 식이었다.

    현대자동차그룹 주요 계열사들은 코로나19에 대응해 초기에는 재택근무 체제를 한 달가량 운영하다 현재는 유연근무제를 확대 적용하고 있다. 다만 임신부와 지병이 있는 직원 등 일부 인원은 재택근무를 지속 중이다. 일반 직원의 경우 출근시간 범위를 오전 8~10시에서 오전 10시~오후 1시까지로 넓히고 하루 5시간 이상, 주 40시간 이상만 근무하면 되도록 했다.

    기존 오전 10시~오후 4시를 필수 근무시간으로 운영했던 것을 잠정 중단해 직원들의 출근시간을 분산시킴으로써 접촉을 최소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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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들 “정부지원 필요하다” 한목소리 대기업들은 유연근무제 정착을 위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정부에 정책적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의 7월 조사에서 ▲유연근무제 관련 근로기준법 개선(33.7%)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았다. 이어서 ▲유연근무제 인프라 구축비 지원(26.8%) ▲신산업 일자리 육성을 위한 규제완화 및 세제지원(14.1%) ▲쟁의행위 시 대체근로 허용 등 노사균형을 위한 노조법 개선(13.2%) ▲정부·공공기관의 직무급 도입 등 임금체계 개편 선도적 참여(9.8%) 등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추광호 한경연 경제정책실장은 “코로나19로 인해 국내 노동시장에서는 근로형태, 평가·보상체계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변화가 예상된다”면서 “변화된 노동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관련 법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코로나19 확산 여파에 따른 재택근무 실시를 계기로 재계에서는 회사에 출근해서 오래 앉아 있었나를 따져가며 평가하던 방법에서 성과 중심 평가 체계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TS)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재택근무 등 유연한 근로 형태를 택하는 곳들이 많아졌지만 결국에는 업무 효율 문제 해결이 큰 과제가 될 것”이라며 “결국 언젠가는 가야할 길인 만큼 근로시간이 아닌 성과 중심의 보상 문화가 정착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현 제도 하에서는 선택적 근로시간제 등 유연한 근로제 도입의 복잡한 과정을 간소화하고, 중소기업들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라면서 “고소득 사무직에 한해 근로시간을 제한하지 않는 미국과 유럽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나 일본의 ‘고도프로페셔널제도’ 등 다양한 보완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서동철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0호 (2020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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