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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현대기아차·박재완 삼성전자·권영수 LG화학 주요그룹 이사회 의장 얼굴이 달라졌다
입력 : 2020.03.31 10:5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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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현대차, LG 등 국내를 대표하는 그룹의 주요 계열사들 이사회 의장 얼굴이 바뀌었다. 과거 한국 기업의 이사회가 사실상 거수기 역할 수준에 미치며 영향이 미미했던 적도 있지만 이사회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며 그 위상은 과거와는 달라졌다. 이와 함께 이사회 의장도 기업을 대표하는 얼굴로서 그 중요성과 상징성이 커졌다. 이사회 의장의 변경으로 앞으로의 사업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어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19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된 지 51년 만에 처음으로 외부 인사인 사외이사에게 이사회 의장직을 맡겼다. 21년 만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난 현대자동차는 3월에 열린 이사회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물려받았다. LG화학은 권영수 LG그룹 부회장이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됐다.
현대차는 3월 19일 이사회를 열고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을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고 정의선 수석부회장, 이원희 현대자동차 사장, 하언태 현대자동차 사장 등 3인 각자 대표이사 체제를 구성했다. 정몽구 회장이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공석이 됐던 이사회 의장 자리를 아들인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잇게 된 것이다. 당초 업계에서는 이원희 사장이나 사외이사 중 한 명이 의장직을 맡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로 경영환경이 악화되면서 정 수석부회장이 의장직을 물려받을 결심을 굳힌 것으로 전해졌다. 현대차그룹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사회에서 정 수석부회장은 상황이 코로나19 때문에 상당히 진중하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본인이 책임을 지고 (이사회) 의장을 맡아서 주도적으로 회사를 경영하는 게 낫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정 수석부회장의 의사회 의장직 승계는 오너 일가의 세대교체라기보다는 대내외 경영환경 악화를 돌파하기 위한 책임경영의 일환으로 분석된다. 현대차의 지난해 글로벌 판매량은 442만 대로 지난 2015년(496만 대) 대비 50만 대 이상 급감했다. 올해 2월에 현대차와 기아차는 중국 현지 부품 공장 셧다운 여파로 자동차용 전선 뭉치인 와이어링 하니스 수급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2만 대에 이르는 생산 차질이 생겼다. 중국 내 내수 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현지 합작법인인 베이징현대와 둥펑위에다기아의 판매 실적이 90% 가까이 급감했다. 여기에 북미 생산거점인 미국 앨라배마 공장까지 코로나19 확진자로 멈춰서면서 안팎으로 위기감이 커졌다.
이사회 의장에 취임한 정 수석부회장은 전동화와 자율주행, 커넥티비티, 도심항공 모빌리티(UAM) 등을 중심으로 미래 모빌리티 혁신을 가속화하며 위기를 돌파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해 말 현대차는 오는 2025년까지 61조원을 투자해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중장기 혁신계획 ‘2025’ 전략을 발표한 바 있다. 이 같은 전략에 발맞춰 현대차는 정관 내 사업목적 일부를 변경하는 안건을 3월 19일 주주총회에 제출했고, 원안대로 가결됐다. 또한 수익성 강화와 미래 모빌리티 투자 전문성 확대를 위해 김상현 재경본부장(전무)을 신규 사내이사로 내세웠다. 최근에는 정 수석부회장이 스스로 현대제철 사내이사직을 내려놓으면서 모빌리티 사업에 집중할 의사를 보이기도 했다.
정 수석부회장이 현대차 이사회 의장직을 이어받으면서 정몽구 회장은 현대차 미등기 임원과 현대모비스 등기이사직만 유지하게 됐다. 정 회장은 지난 1999년 3월부터 현대차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겸직하면서 현대차그룹을 세계 5위 완성차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그는 현장경영과 품질경영을 철학으로 전 세계 자동차 업계에서 유례없는 고속 성장을 이뤄냈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에는 기아차를 인수해 성공적으로 회생시켰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에는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헌액되며 헨리 포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만 82세인 정 회장은 지난 2018년부터 이사회에 참석하지 않고 공식석상에서도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대차 측은 정 회장이 실질적인 지배력을 지닌 회장이자 미등기 임원으로서 경영을 계속해서 총괄한다며 일각에서 불거진 ‘세대교체론’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수석부회장
LG화학은 초기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일궈낸 권영수 LG그룹 부회장이 LG화학 이사회에 5년 만에 복귀했다. 이에 따라 전지부문 분사를 비롯한 여러 경영 현안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국내 배터리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LG화학은 3월 20일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제19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고 권 부회장을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곧이어 열린 이사회에서 권 부회장은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됐다. LG화학은 “과거 4년간 당사 전지사업본부장으로 역임한 바 있어 뛰어난 식견과 사업 전문성을 바탕으로 이사회 일원으로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 부회장은 현재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어 LG화학 의장까지 4개 계열사 의장을 책임지게 됐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권 부회장은 1979년 LG전자에 입사해 LG전자 재경부문장(CFO), LG디스플레이 대표이사,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 LG유플러스 대표, ㈜LG 대표 등을 역임했다. 업계에서는 구광모 회장의 최측근 권 부회장이 4개 핵심 계열사들을 직접 챙겨 ‘구광모 체제’가 강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재계에서는 권 부회장의 LG화학 이사회 복귀가 LG그룹이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배터리 부문을 직접 챙기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2011년 12월 2일 LG그룹은 조직개편을 통해 소형전지사업부와 중대형전지사업부를 통합해 전지사업본부로 승격시키면서 권 부회장을 본부장으로 선임했다. LG디스플레이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던 만큼 당시 권 부회장의 본부장 선임은 “배터리 부문 성장을 위해 화학에서 분사할 것”이라는 관측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현재 LG화학은 분사와 관련된 여러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분사 계획이 다소 늦춰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LG화학은 지난해 대규모 수주를 통해 배터리 분사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지만 올해 코로나19로 인한 실적 악화, 석유화학 업황 불황 등으로 배터리 부문 분사 여부가 불명확해졌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다년간 LG화학의 배터리 부문을 책임져왔던 권 부회장의 이사회 의장 선임이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관심이 커지고 있다.
권 부회장은 2011년 배터리 분리막과 관련한 SK이노베이션과의 특허 소송 및 합의를 담당했던 만큼 최근 미국에서 진행 중인 양사의 특허 소송에 미칠 영향도 제기되고 있다. 다만 소송 내용은 이사회 안건으로 오르지 않는 만큼 소송과 합의를 둘러싼 과정에서 권 부회장의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업계 관계자는 “권 부회장이 공격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스타일인 만큼 이사회 의장이 된다면 LG화학의 전지 부문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권영수 LG 부회장
삼성전자는 2월 21일 이사회를 열고 자진 사임한 이상훈 이사회 의장의 후임으로 박재완 사외이사를 선임했다. 이상훈 전 의장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의혹으로 지난해 12월 구속됨에 따라 선임일이 가장 빠른 박재완 사외이사가 정식으로 선임되기 전까지 의장직을 대행해왔다. 삼성전자 측은 2018년 3월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를 분리한 데 이어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하면서 이사회의 독립성과 경영 투명성을 높이고 이사회 중심의 책임경영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박 의장은 선임 직후 “주주가치 제고와 이사회 중심 책임경영에 힘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관료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 때 기획재정부 장관과 고용노동부 장관 등을 역임한 박 의장은 2016년 3월부터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활동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박 의장은 최선임 이사로서 회사와 이사회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행정가로서의 경험 또한 풍부해 이사회의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주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박재완 의장은 이사회 의장 선임 후 상정할 안건을 결정하고 이사회를 소집해 회의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사들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삼성이 투명경영을 강화하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사회 이외에도 삼성전자 등 7개 삼성 주요 계열사는 지난 1월 준법경영을 감시하는 외부 독립 기구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를 설립한 바 있다. 위원장은 김지형 전 대법관이 맡아 외부 감시 기능을 강화했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는 3월 18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이사회의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 최초로 사외이사를 의장으로 선임해 기업지배구조를 한층 더 개선시켰다”며 “준법·윤리경영의 중요성을 인식해 외부 독립조직으로 준법감시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글로벌 수준의 엄격한 준법 관리 체계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3월 18일 경기도 수원시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한종희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사장)과 최윤호 경영지원실장(사장)을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이로써 삼성전자 이사회는 새로 선임된 2명과 김기남 부회장, 김현석 대표이사 사장, 고동진 대표이사 사장 등 총 5명의 사내이사와 6명의 사외이사로 구성됐다. 이재용 부회장은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재판 등에 따라 지난해 10월 사내이사 임기를 연장하지 않고 물러나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삼성전자 외에도 최근 재계에서 경영 투명성 제고와 주주권익 보호 등을 이유로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고, 사외이사 가운데 의장을 선출하는 추세다. 경영을 담당하는 대표이사가 경영진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이사회 의장을 겸직할 경우 이사회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주 신뢰를 중시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대표이사와 이사회를 분리 운영하는 이유다.
박재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과거 한국 기업들의 이사회는 기업 오너나 경영진의 거수기라는 비판이 많았다.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SK(주)는 이사회 고유의 감시·견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대표이사로 제한돼 있던 이사회 의장 자격 요건을 지난해 폐지했다. SK(주)는 이사회 독립성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했다. SK(주) 이사회 산하에는 감사위원회, 사외이사추천위원회, 거버넌스위원회 등 3개 위원회가 있는데 회사의 회계와 업무 전반을 감사하는 감사위와 회사의 주요 의사 결정 사안에 대한 검토를 담당하는 거버넌스위가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돼 있다. 거버넌스위는 2016년 이사회 역할 강화 차원에서 설립돼 투자 및 회사의 합병·분할, 재무 관련 사항 등 주요 경영 사안을 심의하고 있다. 사실상 사외이사의 사전 점검을 받아야 안건으로 상정되는 셈이다.
2018년 SK(주) 사외이사로 선임된 이찬근 SK(주) 이사회 주주소통위원은 “과거 한국 기업의 이사회 위상이 미미했던 게 사실”이라면서 “하지만 현재 우리 이사회 역할이 상당히 강화됐으며, 특히 SK(주)는 해외 투자자들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독립성이 확보됐다”고 설명했다. SK(주)는 2018년 3월 주주의 권익 보호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주주소통위원’ 제도를 신설하고 이 위원을 선임했다.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한 뒤 SK(주)는 이사들의 전문성 제고를 위해 주요 경영 사항에 대해서는 사외이사를 대상으로 한 워크숍도 개최하고 있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박2일 동안 회사 주요 전략과 안건들을 사외이사에게 설명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서 SK(주) 담당자들은 경영진 브리핑과 동일하게 회사의 로드맵과 미래 전략, 투자 전략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이 위원은 “워크숍을 통해 이사들은 경영진의 전략과 사업 포트폴리오를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엄청난 정보를 숙지하고 이해해야 하는 만큼 워크숍 참여 전후에도 이사들은 상당히 많은 업무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동철 매일경제 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5호 (2020년 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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