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장님은 부재중!­…그룹들 비상경영 매뉴얼을 엿보다

    입력 : 2013.12.12 14: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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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장님이 사라졌다?” 재계는 올 한해 시련의 계절이었다. SK그룹을 비롯해 한화그룹, CJ그룹, 태광그룹, LIG그룹 등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총수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수감됐다.

    이에 따라 해당 대기업들의 투자계획과 미래비전 사업들 역시 올 스톱된 상태다. 그룹의 큰 일을 결정할 총수가 없다보니 막대한 재원과 시간이 소요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대한 실행 여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 때문에 총수가 부재중인 대기업들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총수 부재 시 비상경영과 관련한 위기관리 대응책이 그룹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다. 한 재계 관계자는 “대선이 끝난 뒤엔 으레 재계 총수들의 부재 현상이 발생하곤 했는데 이번에도 되풀이됐다”면서 “각 그룹들의 비상경영 매뉴얼을 꼼꼼히 살펴 상황에 맞는 비상경영 매뉴얼을 만들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각기 다른 이유로 경영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총수부재 대기업들의 비상경영 매뉴얼을 사례별로 살펴봤다.

    시스템으로 무장한 SK의 집단 지도체제 계열사 자금 수백억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받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최재원 부회장은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구속된 후 1, 2심에서 모두 실형이 선고되면서 경영공백이 현실화된 상태다. 실제 최 부회장이 대표를 맡고 있는 SK E&S는 선고가 내려진 지난 9월 27일 STX에너지 인수를 포기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룹의 대소사를 결정하던 최태원 회장의 부재로 인한 후폭풍은 이보다 더 크다. 일단 3조3000억원 규모인 중국 ‘우한 프로젝트’의 속도가 급격히 느려지고 있다. 여기에 중동과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에서 진행하던 해외 프로젝트 사업들 역시 진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총수가 없는 SK그룹은 의외로 좋은 실적을 올리며 승승장구 하고 있다. 계열사 오너들로 구성된 ‘수펙스추구협의회’를 가동하면서 최 회장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김창근 협의회장을 중심으로 한 6명의 집단지도체를 갖추고 있다.

    김창근 의장 외에 구자영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재열 SK 부회장(SK동반성장 위원장), 하성민 SK텔레콤 사장, 김영태 커뮤니케이션 부문 사장, 정철길 SK C&C 사장이 6명의 집단지도체제 주인공이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사실 SK그룹만의 독특한 경영전략 회의로, 그룹 총수와 함께 그룹의 비전을 공유하고 미래먹거리와 투자여부를 고민하는 최고경영자 회의다. 계열사 CEO들이 참가하는 6개의 위원회로 구성된다.

    하지만 올해 초 최 회장의 구속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총수 부재 시 그룹의 경영전략을 결정하는 집단지도체제시스템으로 변신했다. 최 회장의 구속이 확실시되던 때, 이 협의회를 통해 관계사별 자율책임 경영을 골자로 한 ‘따로 또 같이 3.0’이라는 경영방침을 도입한 것을 포함해 지난 10월 22일에는 종로구 서린동 SK사옥에서 열린 정례 CEO 세미나에서 내년 그룹의 경영방침인 ‘안정 속 성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재계에서는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총수 부재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그룹들과 달리, SK그룹은 최 회장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괜찮은 실적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대기업 기획팀의 한 관계자는 “총수가 있어도 경영환경이 좋지 않았는데, 총수가 부재중인 상황에서 나름대로 실적을 기록한 것은 분명 의미 있다”면서 “총수의 제왕경영이 아닌 계열사 CEO들 간의 시스템 경영이 SK그룹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CJ의 가족경영 CJ그룹은 이재현 회장이 해외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조세포탈 및 비자금 조성,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현재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 회장이 구속됨에 따라 CJ그룹은 지난 7월 ‘그룹경영위원회’를 발족시키고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이 회장 부재에 따른 경영위험을 최소화하고, 그룹과 임직원들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로,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CJ그룹의 그룹경영위원회는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전문경영인들로만 구성된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와 달리, CJ그룹의 그룹경영위원회에는 오너 일가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총수 부재 시 비상경영의 일환으로 ‘가족경영’을 택한 것이다.

    CJ그룹에 따르면 그룹경영위원회는 손경식 회장을 위원장으로, 이미경 부회장, 이채욱 CJ대한통운 부회장, 이관훈 CJ(주) 회장, 김철하 CJ제일제당 사장 등 5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는 바로 손경식 회장이다.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인 손 회장은 8년 전까지만 해도 CJ그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경영자의 위치에 있었다. 조카의 부재로 그룹이 위기에 빠질 것을 염려, 다시 현장에 복귀한 셈이다.

    이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 역시 그룹경영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미경 부회장은 그동안 CJ E&M을 중심으로 한 문화·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진두지휘해 왔지만 앞으로는 CJ그룹 경영에 대해 목소리를 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그룹경영위원회는 한 달에 2번 정도 정기회의를 통해 그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CJ그룹에선 2007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후 계열사들은 대부분 전문경영인 중심의 독립경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 회장은 매주 수요일 개최되는 주요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며, 그룹의 해외진출이나, 대형 인수합병 같은 굵직한 사안만을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룹경영위원회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운영 중이다.

    2인자들의 재등장, 한화의 원로경영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은 2004~2006년 위장계열사 빚을 갚아주기 위해 3200억원대 회사자산을 부당지출하고, 계열사 주식을 가족에게 헐값에 팔아 1041억원의 손실을 회사에 끼친 혐의로 2011년 1월 불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8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법정 구속됐으며, 항소심 재판에서 1186억원을 공탁한 후 징역 3년으로 감형 받았다. 대법원은 지난 9월 일부 지급보증을 별도의 배임 행위로 본 원심 판단이 위법하다고 돌려보내 현재 서울고법에서 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김승연 회장 구속 이후 한화그룹은 지난 4월 한화그룹의 원로경영인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위원회를 발족했다. 김연배 한화투자증권 부회장이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부문별로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과 홍원기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사장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재계에서는 한화그룹이 원로경영인으로 비상경영위원회를 꾸린 이유로 김 회장 부재에 따른 그룹의 안정화와 태양광사업 및 중동 프로젝트 등 그룹의 미래먹거리 투자계획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태양광사업과 중동 프로젝트의 경우 투자시기를 놓칠 경우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원로들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비상경영위원회는 출범한 지 반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실제 김 회장이 직접 나섰던 80억달러(약 9조원)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 사업 수주 이후, 이라크 재건사업 수주전에도 나섰지만, 아직까지 단 한 건의 수주도 올리지 못하고 있다. 김 부회장이 이라크를 방문하기까지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또한 2010년부터 그룹의 사활을 걸고 추진해온 태양광 사업 역시 활짝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김승연 회장이 최근 내년 2월 말까지 구속집행정지 기간이 연장되면서 ‘병상경영’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주거지가 서울대병원으로 제한된 김 회장에게 그룹 임원진이 직접 가 보고한 뒤, 결제를 받는 방식으로 경영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한편 김승연 회장의 장남인 김동관 한화큐셀 마케팅실장은 그룹의 미래먹거리인 태양광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말레이시아 사이버지야에 자리한 한화큐셀 공장을 방문했다. 한화그룹은 태양광산업을 미래먹거리로 선정한 후 현재 태양광산업 수직계열화를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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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너의 방패막이 ‘2인자 경영’ 이밖에도 총수 부재 시 대기업들의 위기대응책으로는 ‘2인자 경영’ 방법이 있다. 한 재계 관계자는 “2인자 경영은 그룹 경영에 대한 전권을 이른바 가신으로 불리는 믿을 만한 이에게 넘기는 방법”이라며 “오랫동안 그룹 일을 맡아온 만큼 전문성과 혜안을 갖고 있어 안정감과 성장성이 높지만, 2인자와 오너 일가 간의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최태원 회장이 그룹 총수로 올라서기 직전까지 SK그룹의 경영을 맡아왔던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이다. 손 명예회장은 고 최종헌 SK그룹 2대 회장의 대표적인 가신으로 1978년부터 1998년까지 회장보좌역을 맡았다.

    특히 1974년 선경합섬 경영관리반장을 맡은 후 유공(현 SK에너지),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 인수 등을 통해 지금의 SK그룹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최종현 회장은 계열사 경영에 거의 간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손 명예회장을 믿고 맡긴 것이다.

    이후 손 명예회장은 최종현 회장 사후인 1998년 SK그룹 총수로 추대돼 그룹의 궂은일을 도맡았다. 이 과정에서 SK글로벌·SK해운 분식회계, 계열사 부당지원,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등을 해결하며 최태원 회장과 SK그룹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다. 이후 그룹을 떠났다가 2008년 SK텔레콤 명예회장으로 복귀했다.

    한 전경련 관계자는 “대부분의 2인자들은 후계구도가 완성되고 나면 그룹경영에서 물러나 원로로 지내지만, 손 명예회장은 아직까지 그룹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오너 일가의 무한 신뢰를 받고 있다”면서 “토사구팽의 수순을 밟는 다른 그룹의 가신들과는 달리 2인자 경영의 모범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9호(2013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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