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팬택의 무한도전

    입력 : 2013.06.07 14:3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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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싸우는 회사.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회사. 모두 IT업계 ‘벤처 신화’ 박병엽 부회장의 분신 같은 회사 팬택에 해당하는 수식어다. 박 부회장은 “창업자로서” “내가 시작한 회사”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것은 그가 팬택에 대해 갖는 주인의식이자 책임감의 표현이다. 팬택이 위기를 맞았을 때 이 책임감이 강하게 드러났다. 2006년 회사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박 부회장은 “창업자로서 회사를 살릴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내놓고 빈손으로 나가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다진 바 있다.

    협상력이 빛을 발한 수차례의 승부수 팬택은 그동안 역사의 변곡점에서 수많은 선택과 승부가 필요한 순간이 있었다. 박 부회장은 특유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승부수를 띄웠고, 탁월한 협상력으로 이 승부수들을 성사시킴으로써 팬택을 지키고 성장시켜 왔다.

    지난 1991년 단 6명의 직원으로 시작한 팬택은 이듬해 무선호출기를 생산·판매해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1997년 휴대폰이 미래 이동통신의 신성장 산업으로 도약할 것이라 예측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체질변화를 시도했다.

    지난 1998년에는 글로벌 기업 모토로라는 인수를 목적으로 팬택에 접근해왔다. 박 부회장은 “차라리 내게 투자하라”며 이야기의 방향을 바꿨다. 결과적으로 모토로라는 팬택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짧은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기술력을 인정받으며 해외시장 진출을 통한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초석을 다진 팬택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해 2001년 당시 매출 규모 1조원에 이르는 현대큐리텔을 가족으로 맞이했다. 박 부회장은 당시 적자였던 현대큐리텔 인수에 회사 돈 대신 개인 돈을 사용함으로써 팬택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회피시켰을 뿐 아니라 홀로 인수작업을 마무리함으로써 경영자로서의 자질을 확실히 인정받았다.

    현대큐리텔 인수를 통해 팬택은 R&D 인력만 650명을 확보했으며, 연간 40개 이상의 독자 모델 개발, 생산대수 1200만대 이상, 달러 매출액 기준 50대 기업의 거대 단말기 업체로 변신했다. 이때부터 팬택은 국내 대기업들과의 경쟁은 물론 세계시장에서도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그 시너지 효과로 2002년 미국 오디오박스와 당시 휴대폰 수출사상 세계 최대 규모인 약 1조원에 달하는 휴대폰 500만대 수출 계약을 성사시켰다.

    2002년 팬택은 내수시장 브랜드(큐리텔) 마케팅에 돌입했다. 그동안의 축적된 기술과 제품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전국 규모의 A/S망 구축과 최고 품질의 휴대폰을 적정한 가격에 공급하겠다는 전략이었다. 국내 최초 33만 화소 카메라폰, 위치추적 기능을 갖춘 GPS폰 등을 잇달아 내놓으며 국내 진출 3개월 만에 Big3 자리를 확고히 구축했다.

    2005년 팬택은 세계 휴대폰 시장 Big5를 향한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프리미엄 브랜드 ‘스카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팬택은 당시 ‘큐리텔’이 확보하고 있던 친근한 이미지와 ‘스카이’의 고급 이미지를 조화시켜 휴대폰 시장에 풀 라인업을 갖추게 됐다. 이로써 팬택은 내수 2위의 메이저 플레이어, 프리미엄 휴대폰 시장의 강자로 완벽한 입지를 마련했다. 아울러 매출 3조원, 종업원 수 4500여명(연구인력 2500여명)의 초대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같은 해 팬택은 국내 휴대폰 제조사 최초로 일본시장 진입에 성공했다. 당시 일본 휴대폰 시장에 여타 외국기업이 진출한 예는 없었다.

    팬택 상암사옥
    팬택 상암사옥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2006년부터 팬택은 창업 이후 가장 큰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이때 불기 시작한 휴대폰 시장에서의 레이저 쓰나미로 인해 전 세계 휴대폰 강자들이 모두 휘청거리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해 11월, 팬택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때 박 부회장은 ‘이 회사가 어떤 회사인데. 30대 초반에 만들어 젊음을 바친 회사가 아닌가. 내 분신 같은 회사인데….’라고 생각하며 4000억원 상당의 지분 전체를 내놓고 회사를 살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다만 자신이 만든 회사이니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며 경영만은 맡겨달라고 했다. 당시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의 효력이 끝난 이후라 채권단의 100% 동의를 받아야만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박 부회장은 “이번 유동성 위기만 넘기면 회생이 가능하다”며 적극적으로 채권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박 부회장을 비롯한 팬택 경영진은 지방의 소액채권자까지 찾아다니며 30여 차례 채권단 설명회를 가졌다. 결국 필요한 동의를 받아냈고, 팬택은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팬택은 이 시기에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인력을 절반 이하로 줄였고 남은 인원은 동결된 임금에 더 많은 일을 감당했다. 그는 팬택의 실질적 최고경영자이면서도 회사를 워크아웃에 빠지게 했다는 미안함과 조기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회장’이 아닌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결과적으로 위기는 곧 기회가 됐다. 살아남겠다는 치열함이 스마트폰 혁명에서는 약이 됐다는 얘기다. 당시 외부에서는 팬택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시선도 있었지만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났다.

    이후 2009년 유동성 위기에 빠졌을 때 팬택은 미국 퀄컴에 지급해야 할 로열티가 약 7000만달러에 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퀄컴 본사를 찾아 퀄컴의 폴 제이콥스 회장을 만난 팬택 박 부회장은 “우리 회사에 투자해달라”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후 2년간 협상이 이어지고, 집요한 방문과 설득이 거듭된 결과 퀄컴이 미지급 로열티를 출자전환하는 형식의 투자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퀄컴은 이 투자로 팬택의 2대주주가 되었지만 박 부회장의 경영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에서 경영이나 이사회 참여는 하지 않고 있다.

    2010년 일치단결된 조직원 정신력은 빠른 시장 대응으로 이어졌다. 팬택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시리우스를 출시한 시기는 지난해 4월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비슷한 시기에 갤럭시A, 안드로-1 등을 출시했으나 주력 스마트폰인 갤럭시S와 옵티머스 시리즈를 출시한 시기는 지난해 6월이었다. 팬택이 2개월 앞서 시장에 대응한 것이다.

    이후 팬택은 박 부회장의 직접지시로 보급형 미라크가 아닌 전략모델 베가시리즈에 집중했다. 2010년 7월 베가를 출시했고, 뒤이어 베가X(2010년 12월 말), 베가S(2011년 2월), 베가레이서(2011년 6월) 등을 선보였다.

    베가레이서는 단일 모델로 125만대가 판매된 팬택의 첫 밀리언셀러 모델이다. 박 부회장은 당시 ‘신규 모델은 LTE폰만 출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 브랜드를 ‘베가’로 일원화했고 타사보다 반 박자 빠르게 인기모델들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듀얼코어와 DDR2 메모리를 탑재한 베가엑스를 비롯해 세계 최초로 1.5㎓ 듀얼코어 프로세서를 탑재한 베가레이서를 출시했다.

    그러다 지난 2011년 박 부회장이 갑작스럽게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채권단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부회장직을 반납하고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겠다고 했다. 채권단과의 힘겨루기에서 ‘사퇴’라는 초강수를 두며 압박한 것이다. 결국 채권단은 부회장직을 유지해 줄 것을 요청하며 워크아웃 졸업에 합의했다.

    워크아웃 당시 상장 폐지된 팬택은 이후 계속 투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지난해에는 영업적자 776억원을 기록했다. 기술력보다는 브랜드력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고 판단한 박 부 회장은 외부에서 자금을 수혈하지 않을 경우 22년간 쌓아온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이준우 사업총괄 부사장(50)을 대표이사에 앉히고 현업을 총괄하도록 했다. 이로써 팬택의 원톱 체제가 막을 내리고 박 부회장과 이준우 부사장의 투톱 체제가 가동을 시작했다. 회사 운영은 이 부사장에게 맡기고, 최근 맞닥뜨린 자금난 극복을 위해 외부 투자자금 유치에 전념한다는 계산이다.

    이런 가운데 팬택이 올 초 국내 최초로 풀HD 스마트폰 ‘베가 넘버6’을 내놓은 데 이어 지난달 선보인 ‘베가 아이언(IRON)’의 또 다른 승부수가 먹힐 지 주목된다. 팬택이 최근 선보인 5인치 롱텀에볼루션(LTE) 스마트폰 ‘베가 아이언’의 ‘엔드리스 메탈(Endless Metal·하나로 이어진 금속테두리)’은 팬택 측이 “애플도 극복하지 못한 일을 세계 최초로 해냈다”고 자평하는 부분이다.

    박병엽 부회장
    박병엽 부회장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팬택의 문화 지난해 6월, 팬택 인트라넷에 한 신입사원이 글을 올렸다. 회사의 인사 정책에 대한 의문을 표현한 글이었다. 사원이 쓴 글에 팬택 중앙연구소장을 비롯해 본부장급 임원들의 댓글과 답글이 이어졌다. 깊은 이해와 구체적인 설명이 담긴 글들이었다.

    이런 기업 문화를 이끌고 있는 이도 박 부회장이다. 그는 항상 “격을 갖추되 할 말은 해야 한다”며 적극적이고 개방된 소통을 강조한다. 박 부회장도 해당 글에 댓글을 달았다. 1000자가 넘는 긴 댓글이었다.

    박 부회장에 댓글에 대해 글을 썼던 사원은 이메일로 답변을 보냈다. 박 부회장을 포함한 경영진과 일반 사원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것은 팬택에서는 흔한 일이다. 임원부터 사원까지 이메일을 통해 격의 없이 의견을 공유하고 때로는 이메일을 통해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박 부회장 역시 하루 100통 이상의 이메일을 받고 늦더라도 일일이 답장을 한다. 박 부회장은 구성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거의 빠짐없이 “항상 구성원들에게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회사의 이익은 구성원들이 내는 것이고, 이 이익은 주주와 구성원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다는 것이 박 부회장의 생각이다. 팬택 구성원들의 높은 소속감과 사기, 회사에 대한 자부심은 박 부회장의 이런 마음 씀씀이에 기반 한다. 식사시간에 팬택빌딩 구내식당을 찾으면 다른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줄을 서서 배식을 받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하는 박병엽 부회장 및 경영진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경영진과 구성원들 간의 공감대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팬택의 기업문화다.

    팬택에는 ‘부회장님 선물 이벤트’라는 것이 있다. 박병엽 부회장에게 들어온 선물들을 이벤트를 통해 팬택 구성원들에게 나눠주는 행사다. 물품은 고급 양주, 명품 가방부터 멸치나 초콜릿 같은 소박한 것들까지 다양하게 구성된다.

    [손유리 매일경제 모바일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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