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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비블리오필리] 예술과 정치… 그 영원한 딜레마
입력 : 2011.04.22 15: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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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적인 지휘자 푸르트벵글러와 토스카니니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37년 어느 뒷골목을 걸으며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문제였다. 토스카니니는 나치독일을 떠나지 않고 지휘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푸르트벵글러를 비난했다.
“지금 같은 세상에 예술가는 압제적인 국가를 위해 연주해서는 안 됩니다.”
푸르트벵글러는 이렇게 응수했다.
“바그너와 베토벤이 연주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인간은 자유롭습니다. 그 작품들을 들으면 자유로워집니다. 음악은 비밀경찰이 손대지 못하는 곳으로 인간을 데리고 가니까요.”
푸르트벵글러는 논란이 많은 지휘자다. 푸르트벵글러의 제2차 세계대전 중 행적 때문이다. 푸르트벵글러는 나치독일하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보는 앞에서 베를린 필의 지휘대에 올랐다. 그는 제국 음악국의 부의장을 지냈고, 나치전당대회에서 히틀러의 중심가치인 게르만 민족주의를 다룬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연주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나치당원인 적은 없었다. 그보다 활동이 많지 않았던 카라얀이 나치당원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특이한 일이다. 그렇다고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베를린 필을 유대인들의 피신처로 만들어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앞장썼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그가 나치독일의 대외선전 정책에 봉사했고, 자의든 타의든 나치의 자랑스러운 국가 문화자산 역할을 했다고 비난한다.
독일의 음악 관련 저술가인 헤르베르트 하프너가 쓴 책 '푸르트벵글러'(마티 펴냄)는 제대로 된 평전이다. 저자 하프너는 푸르트벵글러가 예술지상주의자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데올로기나 정치체계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문화가 정치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외골수 예술가였다는 것이다.
예술은 늘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에는 한 예술가가 살았던 시대의 고통과 환희가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푸르트벵글러의 행적을 일도양단해서 말하기는 힘들다. 과연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베토벤의 음악은 나치즘을 초월할 수 있었을까. 쉽게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다. 단지 나치는 소멸했고,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은 살아남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 2 “내 교향곡은 대부분이 묘비다. 너무 많은 국민들이 죽었고 그들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려지지도 않았다. 친척들조차 알지 못한다. 내 친구도 여러 명 그런 일을 당했다. 친구들의 묘비를 어디에 세우겠는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음악밖에 없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인 <증언>(이론과실천 펴냄)을 읽다가 찾아낸 구절이다. 순간순간 잔인한 현실 속에서 예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쟁이나 테러를 막지도 못하고 배고픈 예술가의 가난조차 해결해주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런 순간 예술은 나약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예술은 현실에 대한 순간적 대응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영속적인 일을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공포정치 시절을 살았다. 그는 고민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 죽어가는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에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음악이 있었다. 그는 사라진 친구들의 묘비명을 세워주기로 한다. 그가 세운 음악 묘비명은 암울하고 비장했다. 후세를 사는 우리들은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15번'이나 '교향곡 7번'을 들으며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우울한 한 시대를 기억한다. 이것이 예술의 힘이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기자는 언젠가 스페인 소피아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를 본 다음 감동스러운 나머지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
“세상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게르니카'를 직접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그만큼 '게르니카'는 압권이다. 시대의 대작 '게르니카'에도 역사의 아픔은 숨겨져 있다.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랑코가 히틀러를 부추겨 자신에게 반대하는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에 폭격을 퍼부은 이 사건은 피카소에게는 충격이었다.
피카소 역시 쇼스타코비치와 같은 고민을 했으리라. 무고한 사람들이 자국 위정자의 계략에 의해 죽어가는 것을 보며 피카소는 쓴 술잔을 들이켰다. 피카소는 술잔을 팽개치고 작업실에 틀어 박혔다.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됐고 우리는 무채색의 느낌이 물씬 나는 '게르니카'를 보며 그 역사적 오류를 다시 떠올리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탄압과 전쟁을 증오했던 그는 “어느 한순간도 나는 회화가 단순히 즐거움만 주는 기분 전환을 위한 예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유명 화가가 되고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후에도 피카소의 소신은 변하지 않았다.
# 3 사실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아니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에는 창작자가 살았던 시대와 상황, 인간적 고뇌와 경험 등이 고스란히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술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주장이 오히려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물론 예술이 정치에 종속돼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이나 환희가 예술에 담겨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법학자이자 저술가인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쓴 '예술, 정치를 만나다'(이다미디어 펴냄)는 위대한 예술가 8명의 정치적 코드를 흥미롭게 정리한 책이다. 사르트르는 아나키스트였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에 저항했던 사르트르는 예술가로서만 표표히 살기를 원했다. 그는 흔히 무정부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하는 아나키스트의 전형이었다. 그는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권위주의와 불의에 맞서 평생을 싸웠다. 노벨상마저 거부한 그는 가장 순수하게 살았던 아나키스트로 손꼽힌다.
채플린과 존 레넌은 굳이 표현하자면 평화주의자였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이었지만 궁극의 목표는 평화였기 때문이다. 채플린은 이념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를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입장에서 빈부격차와 전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모던 타임즈'와 '살인광 시대'를 만들었다. 이 작품들 때문에 채플린은 매카시 광풍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혔고 FBI의 감시 대상이 됐다. 결국 채플린은 미국에서 추방당해 스위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예술과 정치를 분리하는 우리의 습관은 ‘정치’라는 낡은 단어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정치라는 단어 대신 ‘참여’라는 다소 모호한 말을 사용한다. 예술은 창작자와 관전자가 너무도 분명한 작업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반드시 한 시대를 살았던 창작자의 주장과 철학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차장·시인·문학박사 praha@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호(2010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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