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탄생 250주년 회고하며 다시 ‘합창 교향곡’에 귀를 기울이다… 아직 베토벤을 놓아줄 수 없는 이유

    입력 : 2021.01.07 16:44:56

  • 계류의 시절이다. 주지하다시피 ‘계류(繫留)’란 어떤 일이 해결되거나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도중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선박이 항구에 계류 중이다’ 같은 용례를 떠올릴 수 있다. 음악에도 계류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음악에서 화음이 진행될 때 예비-걸림-해결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한 화음 중의 특정 음이 다음 화음에까지 남아 불협화 상태를 유발하는 경우 그 음을 ‘걸림음’ 또는 ‘계류음’이라 하고, 그런 상태를 ‘계류’라고 부른다.

    이 시절의 계류음은 코로나19다. 이 기묘한 바이러스가 야기한 팬데믹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 만 1년 가까이 멈춤, 보류, 취소가 반복되는 상황을 힘겹게 감내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계의 어려움 또한 이만저만이 아닌데, 특히 ‘관객 대면’을 전제로 하는 공연계의 피해가 막심하다. 많은 공연이 제때 제 모습으로 치러지지 못하고 취소되거나 변경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새해 유사한 형태로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물론 성사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그야말로 계류의 상황이라 하겠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코로나19가 야기한 또 하나의 계류로 ‘이슈의 계류’가 있다. 이 분야의 관계자 및 애호가들에게 2020년은 다른 무엇보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었다. 당초 이 뜻깊은 해를 기념하기 위해 수많은 행사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건만, 역시나 그중 상당수가 취소되거나 보류되었다. 위대한 ‘음악의 성인’을 기리는 중요한 해가 이토록 허망하게 지나갈 줄이야….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베토벤 기념해’ 이슈를 연장하거나 이월시켜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기도 한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서울시향(사진 매경DB)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서울시향(사진 매경DB)
    ▶‘합창 교향곡’에 투영된 베토벤의 인생과 시대 지난 연말 3차 유행 국면의 와중에 ‘베토벤 기념해’를 하릴없이 떠나보내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합창 교향곡’의 부재였다. 이전까지 다수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에게 한 해가 끝나갈 즈음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 연주되는 공연에 참석하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합창 교향곡’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한 해를 마무리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2020년에는 그 의식을 치를 기회가 거의 모두 박탈되었다. 비말 감염을 특징으로 하는 바이러스가 활개 치는 상황에서 대규모 합창단이 동원되는 공연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필자는 이 애석한 상황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기도 했다. 다시 말해 많은 이들이 ‘합창 교향곡’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이 상황을 도리어 작품을 보다 진지하게 음미하고 되새기는 기회로 반전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합창 교향곡’은 우리가 두고두고 곱씹어볼 만한 내용과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대개의 경우 그것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떠돌기 십상이다. 하물며 송년 이벤트 격으로 울려 퍼지면 그것은 연주가 종료되자마자 열광적으로 터져 나오는 청중의 박수와 환호 속에서 휘발되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애석한 일이다.

    베토벤의 아홉 번째이자 마지막 교향곡인 ‘합창 교향곡’은 그의 인생과 시대가 투영된 축도이다. 연주시간 60여 분에 달하는 이 교향곡은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첫 악장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베토벤과 그의 청중이 살았던 시대는 유럽 역사상 일대 전환점이자 격변기였다. 이른바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한 시기로 봉건주의와 공화주의가 대립했고 각지에서 혁명과 전쟁이 빈발했으며, 그에 따라 정치·사회·경제·문화적 상황도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다. 이 1악장은 그러한 혼돈의 한복판에서 ‘청각장애’로 대변되는 가혹한 운명에 맞서 의지와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베토벤이 펼쳐 보인 마지막 ‘투쟁의 드라마’이다.

    이어지는 2악장은 장대한 스케르초(베토벤이 고전적인 ‘미뉴에트’ 대신 교향곡에 도입한 활기차고 역동적인 곡)인데, 집요한 반복과 열광적인 전진으로 이루어진 이 악장을 통해서 베토벤은 시대의 다른 단면을 부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부조리한 세태를 풍자하는 메피스토적 익살극인지도, 과학의 발전에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던 시절에 대한 향수인지도 모른다. 3악장은 아름다운 선율이 꿈결처럼 흐르는 완서악장이다. 여기서 베토벤은 감미로웠던 사랑의 추억, 그로 인해 꿈꾸었던 행복, 그리고 그 상실과 좌절의 회한을 토로한 것일까?

    마침내 4악장. 이 감동적인 ‘합창 피날레’에서 베토벤은 개인의 불행과 비극을 넘어서 세상을 향한 메시지를 던진다. 존경했던 실러의 송시 ‘환희에 부침’에 기대어 모든 인류의 화합과 믿음을 통해서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이상향을 노래한 것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혼돈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한 질타였고, 그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의 이성과 감성에 대한 호소였으며, 우리 모두의 각성과 화해를 향한 촉구였다.

    ▶베토벤 기념해에 코로나 팬데믹 의미심장 독자 여러분께서 이 글을 대할 시점이면 어느덧 새해가 밝았으리라. 예년 같으면 클래식음악 애호가들은 흥겨운 왈츠와 폴카가 연주되는 ‘빈 필 신년음악회’ 중계방송을 챙겨 보거나 그와 비슷한 식의 즐겁고 활기찬 음악을 가까이하면서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부풀어 있을 시점이다. 하지만 도무지 그럴 기분이 나질 않는다. 심지어 ‘빈 필 신년음악회’조차 무관중 공연으로 진행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지금 다시, 베토벤에 귀를 기울여 보는 건 어떨까?

    언젠가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농반진반으로 “하필 ‘베토벤 기념해’에 코로나 시국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 의미심장하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이 베토벤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그래서 베토벤의 음악이 더욱 실감이 나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우리도 베토벤처럼 굳센 의지로 기필코 이 난관을 극복해내자는 다짐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다. 우리가 매년 챙겨 듣는 ‘합창 교향곡’의 메시지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더라면, 나아가 그 실천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했더라면 작금의 사태에도 한결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공교롭게도 이 원고의 마감일에 베토벤의 생일이 걸려 있었다. 참고로, 1770년 독일 본(Bonn)에서 태어난 베토벤의 정확한 탄생일은 미상이다. 전해지는 것은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뿐인데, 통상 하루나 이틀 뒤에 세례식이 이루어졌던 당시의 관례로 미루어 12월 16일이나 15일에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정할 따름이다. 이보다 재미난 사실은 베토벤이 자신의 나이를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그를 모차르트처럼 ‘신동’으로 포장하려 했던 그의 아버지가 나이를 줄여 홍보한 탓이다. 혹자는 이 핑계를 대며 ‘베토벤 기념해는 2022년까지’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런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의 사망일인 3월 26일까지는 ‘베토벤 기념해’를 계류시켜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사진설명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에서 보다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끼기 위해 머리와 가슴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체험과 상상력, 몰입과 감동을 중시하는 클래식 음악 칼럼니스트다. 서울시향 매거진, 네이버캐스트 등 각종 관련매체에 기고해왔고 서울 예술의전당, 성남아트센터, 대구 수성아트피아 등지에서 클래식 음악감상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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