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인문학산책 ⑱ 코로나가 앗아간 남미의 이야기꾼 세풀베다를 추모하며

    입력 : 2020.07.07 10:30:17

  • ▶그들은 억장이 무너질 만큼 괴로워하나요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4월 중순.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칠레 출신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가 스페인 북부 오비도에서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70살이었던 세풀베다는 칠레를 떠나 스페인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가, 한 시대를 뒤흔드는 역병에 목숨을 잃은 역설적인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몇 권의 책이 생각났다.

    세풀베다를 있게 한 소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은 압권이다. 그가 소설에서 창조해낸 슬프고도 아름다운 노인 안토니오는 한 명의 수행자이자, 물질문명을 앞세워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들을 대속해 십자가에 걸린 순교자다. 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산티아고 노인 이후 필자가 책에서 만난 노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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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존 외딴 마을에 살고 있는 그는 1년에 두 번 소설책을 가져다주는 치과의사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슬픈가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옵니까? 그 사람들은 억장이 무너질 만큼 괴로워하나요?”

    안토니오는 문명을 등지고 아마존에 들어온 이후 아내마저 죽고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다.

    절대 고독에 던져진 채 정글 속에서 지내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연애소설을 읽는 것이다.

    “노인은 반복과 반복을 통해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노인에게 연애소설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무아지경을 향해가는 성스러운 수행의 방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글의 평화를 깨는 사건이 일어난다. 백인 사냥꾼 한 명이 암살쾡이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새끼 살쾡이를 죽여 가죽까지 벗긴 침입자에 대한 어미 살쾡이의 처절한 복수였다. 살쾡이에게 외부인들이 계속 공격을 받자 마을 읍장은 사람들을 모아 소탕에 나선다. 밀림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안토니오 노인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 행렬에 포함된다.

    수색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간교한 읍장은 평소 눈엣가시였던 노인을 곤경에 처하게 하고, 자신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략을 짠다. 읍장의 계략에 말려든 안토니오는 밀림 한복판에서 살쾡이와 단 둘이 마주서는 상황에 내던져진다.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순간 노인은 살쾡이에게 방아쇠를 당긴다. 살쾡이라 쓰러지자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미안하네 친구. 그 망할 놈의 백인 녀석들이 우리 모두의 삶을 다 망쳐놓았군.”

    ▶살쾡이도 총도 아마존 강물 깊숙이 가라앉기를 이 비극적인 결말을 통해 세풀베다는 정글이 처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려고 하는 건 수만 년을 면면히 이어온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백인 정복자들에 의해 깨져버린 열대우림의 비극이다. 소설에서 노인은 ‘두 짐승’을 아마존 강물에 던진다. 하나는 살쾡이고 하나는 총이다.

    살쾡이의 시신은 백인들의 더러운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면서, 총은 세상의 피조물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두 짐승’을 아마존에 던져버린다.

    “명예롭지 못한 그 싸움에서 어느 쪽도 승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노인은 눈물과 빗물에 뒤범벅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짐승의 시체를 끌고서 강가로 나갔다. 그는 그 짐승의 시체가 우기에 불어난 하천을 따라다니는 백인들의 더러운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거대한 아마존 강이 합류하는 저 깊은 곳으로 흘러가길 바라면서 시체를 강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노인은 느닷없이 화가 난 사람처럼 손에 들고 있던 엽총을 강물에 던져 버렸고, 세상의 모든 창조물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그 금속성의 짐승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총과 살쾡이의 시체를 아마존 강물에 떠내려 보낸 노인은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한 자들을 저주하며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줄 정도의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얘기하는 연애소설들이 있는” 집을 향해 지팡이에 의지해 발걸음을 옮긴다.

    세풀베다는 여운을 남기며 소설을 끝맺는다. 아마도 잔인한 물질문명은 오래지 않아 총을 내던지고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오두막을 덮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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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이름 없는 것들에게 이름을 부여하는 일 세풀베다는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났다. 독재자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는 당시 많은 칠레 지식인들이 그랬듯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떠돌며 작품활동과 환경운동을 펼치던 그는 파리를 거쳐 1980년 독일로 이주했으며, 1997년 스페인에 정착했다.

    그가 서점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40살이 되던 해 <연애소설 읽는 노인>을 발표하면서 부터였다.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이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지구 끝의 사람들>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우리였던 그림자>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등을 발표하면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세풀베다 문학의 매력은 한없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알기 쉬운 우화적 구성과 문장에 녹여낸다는 데 있다.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그는 소설을 쓰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유명한 인물들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람들의 업적과 공로를 들여다보는 것이 바로 내가 글을 쓰는 목적입니다. 소설을 통해 이름 없는 사람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목소리 없는 사람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어요.”

    ▶그의 마지막 소설 <역사의 끝까지> 세풀베다가 남긴 마지막 소설은 <역사의 끝까지>다. 세풀베다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후안 벨몬테’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20세기의 굵직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생생하게 그려 낸다. 트로츠키 시절의 러시아에서 피노체트의 칠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나치 독일에서 오늘날의 파타고니아에 이르기까지 주인공 벨몬테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인물이다. 그리고 이제는 무기를 내려놓고 칠레 남단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동지이자 연인인 베로니카와 함께 조용히 살아간다.

    사실 그가 총을 내려놓은 것은 자신이 꿈꾸었던 세상이 완성됐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갈망했던 세상은 오지 않고, 세상은 뭔가 난데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저격수로 살았던 그의 눈앞에서 세상은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리라 믿었지만 “도덕이나 윤리 따윈 베를린 장벽과 함께 무너져 버렸”고, 지식인과 예술가가 모이던 주점 테이블에는 더 이상 "사르트르나 프란츠 파농의 책"은 없다. “삶의 이유가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돈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혁명가 벨몬테에게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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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러시아 정보기관원들이 그의 거처를 찾아와서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요구를 한다. 칠레 군사정권 시절 고문기술자로 일하다 수감 중인 인물을 해외 탈옥시키는 계획을 막아야 하는 일이었다. 벨몬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일을 맡고, 러시아 혁명과 나치 독일과, 남미의 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그림자들이 하나씩 소환되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과거에 우리가 했던 것, 그리고 과거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저주처럼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다닌다.”

    벨몬테는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의 분신과도 같다. 세풀베다의 노년은 결코 영화롭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로 가득했을 것이고, 과거의 잔상들은 그의 기억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책 제목을 소설 제목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역사의 끝까지>로 지은 것 아닐까.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우화와 상징에 능했던 세풀베다는 깊이 있는 여러 편의 동화도 남겼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다. 세풀베다는 갈매기와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낯선 존재들이 약속을 지켜나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의 존재로 화합해가는 여정을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다.

    환경오염으로 죽음을 맞게 된 갈매기가 우연히 만난 고양이에게 새끼들이 알에서 태어나면 나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갈매기가 죽자 갈매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고양이의 사연이 펼쳐지고, 세풀베다는 그 여정을 통해 지구상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 회복이라는 우리시대의 화두를 던진다.

    “우리는 여태껏 우리와 같은 존재들만 받아들이며 사랑했단다.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고 인정하진 못했어. 쉽지 않은 일이었거든. 하지만 이젠 다른 존재를 존중하며 아낄 수 있게 되었단다. 네가 그걸 깨닫게 했어. 너는 갈매기야. 고양이가 아니야. 그러니 너는 갈매기의 운명을 따라야 해. 네가 하늘을 날게 될 때, 비로소 너는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네가 우리에게 가지는 감정과 너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더욱 깊고 아름다워질 거란다. 그것이 서로 다른 존재들끼리의 진정한 애정이지.”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면서 공존하는 법을 가르쳐준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는 90년대 중반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세풀베다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는 세풀베다의 여행기다. 루이스 세풀베다가 라틴 아메리카 각국 및 유럽 각지를 누비며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에 대한 소회를 담은 책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우리였던 그림자> 등 대표작의 모티프를 제공한 인물들을 만난 이야기들이 함께 실려 있어 눈길을 끈다. 여행기에서 세풀베다의 저널리스트적 감각이 많이 드러난다.

    가난으로 꿈을 잃은 아이들, 독재의 억압에 삶을 누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 그리고 허세로 가득 찬 지식인들에 대한 조소와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의 손길에 대한 분노가 현장의 목소리로 담겨있다.

    묵직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특유의 유머를 잃지 않는 그의 글에서는 가슴 깊이 간직한 뜨거운 열정, 세상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이 돋보인다.

    “8년 만에 아이들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8년 전, 그때의 순수한 모습이 아이들의 표정에서 되살아났다. 행복해야 할 유년 시절을 송두리째 빼앗기면서 얼굴에선 웃음꽃이 사라지고, 가슴 두근거리던 꿈마저도 절망과 악몽으로 뒤바뀌어 버린 지난 8년의 세월. 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아이들은 잃어버린, 그 아련한 세계를 되찾은 듯 즐거워했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8호 (2020년 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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