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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인문학산책 ⑦ 스타벅스의 모티프가 된 소설 <모비딕>
입력 : 2019.07.31 15: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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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도 즐겨 마시는 커피 체인 스타벅스(Starbucks)의 상호가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 <모비딕>에 나오는 1등 항해사 ‘스타벅’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모비딕>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차분한 인물이다. 스타벅스 창업자인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로 상호를 지은 것은 아마 커피 한 잔이 주는 차분함을 상징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좋아하는 책이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Moby Dick)>이다. 국내에서는 한 동안 <백경>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이 작품은 미국 상징주의 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일단 줄거리부터 살펴보자.
승선하기 전 “바다에 도전하는 자는 영혼을 잃게 될 것”이라는 메플 신부의 경고를 비롯해 불길한 징조가 여럿 있었지만 둘은 무시한 채 배에 오른다.
한쪽 다리에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한 선장 에이허브는 오로지 자신의 한쪽 다리를 가져간 거대한 흰 고래 모비딕을 찾아 복수하기 위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배에는 스타벅이라는 일등 항해사가 있는데 그는 에이허브와 대립되는 이성적인 인물이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 앞에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괴물 모비딕이 나타난다. 등에는 무수한 작살이 꽂힌 채 욕망과 분노에 사로잡힌 인간들을 조롱하듯 모비딕은 바다의 제왕답게 쉽게 정복되지 않는다. 소설은 모비딕을 이렇게 묘사한다. “오, 세상에서 보기 드문 늙은 고래여. 그대의 집은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힘이 곧 정의인 곳에서 사는 힘센 거인이여. 그대는 끝없는 바다의 왕이로다.”
스타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이허브와 모비딕의 대결은 사흘 낮밤 동안 처절하게 지속된다. 첫째 날과 둘째 날 보트 여러 대가 파괴되고 선원들이 죽어갔지만 에이허브의 분노와 집착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되지 않는 흰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나는 끝까지 너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 한복판에서 너를 찔러 죽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뱉어주마.”
결국 사흘째 되던 날 에이허브는 마지막 남은 보트를 타고 나가 모비딕에게 작살을 명중시키지만 작살 줄이 목에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진다. 피쿼드호는 침몰하고 소설의 화자인 이스마엘 혼자만 바다를 표류하다가 살아남는다.
소설 <모비딕>
선장 ‘에이허브(Ahab)’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폭군의 이름이다. 구약에는 ‘아합’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에이허브’는 아합의 영어식 발음이다. 구약에서 아합왕은 악녀와 결혼해 악행을 일삼았고 우상숭배에 빠져 이스라엘을 혼란에 빠뜨렸던 왕이다. 멜빌은 거대한 고래에 집착하는 선장의 모습을 통해 우상숭배의 한 측면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 소설에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죽을 것이라는 예언한 남자의 이름은 일라이저(Elijah)다. 히브리식 발음으로는 엘리야다. 엘리야는 아합(에이허브)에게 박해받았던 구약성서 최대의 예언자다. 구약시대 최고의 예언자를 등장시킴으로써 소설의 비극적인 결말을 미리 암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 <모비딕>은 인간의 어리석은 본성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소설이다. 자연에 무모하게 도전했다 자멸하는 인간을 통해 오만의 최후를 말해준다. 간혹 고래 모비딕을 악(惡)의 상징으로 분석하는 문학 이론서도 있다. 이들 이론서들은 <모비딕>의 주제가 ‘악에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필자 생각에는 오독에서 온 잘못된 분석이다. 고래 모비딕은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대로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동을 하고 먹이를 구하고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때로는 그들과 맞서 싸우는 섭리대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모디딕>은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한 소설이 맞다.허먼 멜빌
살아생전 빛을 보지 못한 작가들은 많다. 하지만 허먼 멜빌만큼 철저하게 어둠 속에 있었던 작가는 드물다. 멜빌의 대표작 <모비딕>은 출간 이후 오랫동안 서점의 소설 코너가 아닌 수산업 코너에 꽂혀 있어야 했다. 서점 직원들이 멜빌이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1891년 멜빌이 사망했을 때 부고기사의 표현이 ‘문단 활동을 했던 한 시민’이었을 정도로 멜빌은 철저하게 무명이었다. 멜빌이 빛을 본 건 그가 사망한 지 30년쯤 지나 레이먼드 위버라는 저명한 평론가가 <멜빌 연구>라는 평론집을 출간하면서부터였다. 멜빌이 영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독보적이다. 소설 한 편 안에 상징주의와 자연주의, 신과 인간의 관계, 진지한 철학과 모험소설의 흥미를 모두 쓸어 담은 그의 작품은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13세 때 가난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잡역부로 일하다 22세 때 포경선 선원이 된 멜빌은 이 소설 한 편으로 문학사에 길이 남았다.
역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7호 (2019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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