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레이와 오지상’… 차기 거론되는 스가 관방장관

    입력 : 2019.06.05 13:24:46

  • ‘레이와 오지상(레이와 아저씨)’.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70)이 나루히토 새 일왕의 시대에 사용할 연호를 처음으로 공식 발표하면서 얻은 새 별명이다. 관방장관은 일본 정부의 대변인 역할을 하는 자리다. 매일 2번씩 모든 언론을 상대로 현안을 설명하는 자리다보니 연호 발표 역시 관방장관의 역할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정부 대변인 역할은 관방장관의 역할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관방장관의 핵심 역할은 우리의 청와대 비서실장에 가깝다. 정권의 실세, 위기관리 총괄, 드러나지 않는 조력자로 불리다보니 사실 관방장관엔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경우도 많지만 연호 발표와 함께 미래를 상징하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재난재해가 많았고 잃어버린 20년이란 불황이 지속됐던 헤이세이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레이와 시대를 열고 싶어하는 국민들의 기대감이 스가 관방장관에 대한 호감으로 연결됐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보여주듯 스가 관방장관은 연호 발표 후 포스트아베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5월 10~1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차기 총리로 어울리는 인물을 묻는 질문에 스가 관방장관이 아베 총리, 고이즈미 신지로 중의원 의원, 이시바 시게루 전 방위상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같은 조사에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두 달 전 조사에 비해 7% 높아져 55%까지 올랐다. 스가 관방장관은 본인 입으로는 차기 총리직 등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가 관방장관의 부상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정치적 고려 등이 주효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달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직접 공개하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지난달 1일 새 연호 ‘레이와’를 직접 공개하고 있다.
    자민당 규정을 바꾸지 않는 한 아베 총리의 임기는 오는 2021년 9월까지다. 임기가 정해진 상황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 레임덕이 발생할 공산이 크다. 직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아베 총리의 대항마로 나선 이시바 전 방위상이나 아베 총리로부터 총재직을 넘겨받기를 기대하는 기시다 후미오 자민당 정조회장 등은 벌써부터 차기 총리직을 위해 뛰고 있다. 아베 총리 입장에선 본인과 운명 공동체로까지 불리는 스가 관방을 띄움으로써 향후 권력 누수를 막아보겠다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 일본 언론들의 분석이다.

    스가 관방장관이 포스트 아베로 급부상한 데는 이 같은 정치 역학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현 기존 정치인들과 결이 다른 삶의 궤적도 한몫했다.

    세습정치인들이 넘쳐나는 일본 정계에 대한 불만이 ‘흙수저 출신’인 스가 관방장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잘 알려진 대로 아베 총리는 할아버지(중의원 의원), 부친(외상)은 물론 외조부는 총리를 지낸 기시 노부스케다. 기시다 정조회장도 조부는 중의원 의장을 지냈으며 부친은 중의원 의원이었다. 이시바 전 방위상 역시 부친은 돗토리현 지사와 자치대신(장관)을 지냈다. 차세대 정치인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고이즈미 의원의 부친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다. 1948년 일본 북부의 아키타현 딸기농가에서 태어난 스가 관방장관의 인생은 굴곡이 많았다.

    농가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공부는 그다지 잘하지 못했지만 시골을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매일 2시간 걸려 통학했던 고교를 졸업한 뒤엔 집단취업에 무작정 참여해 도쿄로 올라왔다. 집단취업이란 전후 고도성장기에 대량생산을 위한 단순노동자를 확보하기 위해 지방에서 고졸자를 대량 모집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벗어나자’란 생각뿐이었다. 어디에 취업할지도 모른 채 도쿄까지 온 그에게 배당된 회사는 골판지 공장이었다. 그렇게 2년을 살았지만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자 그는 대학 입학을 계획했다.

    당장 돈이 없다보니 가장 등록금이 싸다는 이유로 호세이대학 정치학과를 택했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어시장에서 짐꾼, 경비원, 식당보조 등을 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2년간 건설회사에서 일하다 대학 선후배 등 인맥을 통해 요코하마에 지역구를 둔 오코노기 히코사부로 당시 중의원 의원 비서로 10년 넘게 일했다. 이후 요코하마 시의회를 거쳐 착실하게 지역기반을 닦았다. 이때부터 비서 경력을 통해 얻은 감각으로 ‘그림자 요코하마 시장’으로 불리는 등 역량을 발휘했다.

    미국을 방문한 스가 요시히데(왼쪽) 일본 관방장관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미국을 방문한 스가 요시히데(왼쪽) 일본 관방장관이 9일(현지시간)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흙수저 출신…

    아베 정부의 관료 장악에 결정적 역할

    스가 관방장관은 1996년 요코하마가 포함된 가나가와현 지역구에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8선을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도 독자행보를 이어갔다. 파벌의 결정을 따르는 관례를 깨고 1998년 총재 후보로 자신의 정치적 스승을 지지했고 또 아베 총리 1차 내각 직후 치러진 총재선거에서도 파벌 결정과 달리 아소 다로 현 부총리를 지지했다. 현재는 어느 파벌에도 속해있지 않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젊은 시절의 고생과 10년이 넘는 실무진 생활을 통해 익힌 정무적 감각으로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어떻게든 실현시키는 돌파력도 보여 왔다. 일례로 1차 아베 내각(2006~2007년) 당시 총무대신으로 관철시키지 못한 휴대요금 인하 등은 2차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일하면서 추진해 성사시켰다. 또 총리실이 관을 지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내각 인사처 설립 등도 주도했다. 내각 인사처에선 기존엔 각 부처에서 담당해오던 고위 공무원 인사를 직접 진행하고 있다.

    스가 관방장관이 아베 총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북한에 대한 대응전략에서다. 2002년 북한 만경봉호 입항 금지를 추진하는 등 북한을 압박해야 납치문제가 해결된다는 점에 의기투합하면서 운명 공동체가 됐다. 1차 아베 내각(2006~2007년)에서는 총무대신을 맡았다. 이후 2012년엔 출마를 주저하는 아베 총리를 설득해 2차 아베 내각을 출범시키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납북 피해 일본인 문제 해결이 아베 2차 내각의 핵심 공약 중 하나가 된 것도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의 인연이 한몫했다. 아베 총리와 스가 관방장관의 정장 상의 왼편에 항상 붙어있는 파란색 브로치 역시 납북피해자 지원을 위한 것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최근 개각을 통해 납북피해자문제 담당상이라는 직함을 하나 더 달았다. 이 덕분에 관방장관으로는 이례적으로 해외 순방에 나섰다. 위기관리가 주 업무인 관방장관이 해외 순방에 나선 것은 지난 30여 년간 3차례에 불과하며 이 역시도 아시아 지역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비해 스가 관방장관은 미국까지 고위 공무원 40여 명을 대동하고 날아갔다. 미국에서도 스가 관방장관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비롯해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까지 핵심 인사 3인을 만났다. 다른 장관들이 장관급 인사만 만나고 돌아오는 것에 비하면 미국 측의 대접이 상당했던 셈이다. 일본 언론 등에서는 스가 관방장관에 대한 환대엔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스가 관방장관의 위상을 고려한 것이라는 평가까지 내놓고 있다.

    [정욱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5호 (2019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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