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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의 1막1장] 빼앗긴 들의 봄을 되찾으려던 100년전 이 땅의 청춘들
입력 : 2019.03.12 15: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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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7월 대한제국군대를 무장해제시키며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낸다. 강제해산의 울분을 금치 못한 대한제국 군인들은 정미의병에 가세해 조직적인 구국항일무력전을 구축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굴의 애국심이 불타올라도 체계적 군사훈련과 신식무기를 갖춘 일본정규군을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초반에는 빛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지만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되자 역공으로 야만적인 토벌작전이라는 치명타를 맞아 그만 지리멸렬한다. 이에 비밀결사항일단체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창설해 독립전쟁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던 계획을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적당한 장소물색을 위해 간도로 선발대를 비밀리에 출국시켰고 모든 준비가 착착 진행되는 듯했다. 허나 그 사이 청천벽력 같은 한일합방체결로 가뜩이나 없던 후원자들은 완전히 주머니를 닫아버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05인 사건까지 발생해 도산 안창호를 비롯한 조직 수뇌부들이 대거 구속된다.
자금모금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신민회가 돌파구를 찾지 못하자 우당 이회영(1867~1932)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이 물꼬를 튼다. 당시 우당집안은 한반도 5대재벌로 10만석꾼 다섯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서울 명동 일대의 대부호였다. 그들은 ‘오성과 한음’의 오성으로 알려진 백사 이항복의 직계후손이다. 정승판서만 9명을 배출한 명문가 자손들로 대대손손 부와 명예를 보장받았다. 하지만 우당의 ‘일제의 노예가 되어 금수처럼 생명을 구걸할 수 없다’는 의견에 동의한 그들은 전답과 돈이 될 만한 물건을 모조리 처분해 식솔들을 이끌고 서간도행을 감행한다. 우당 집안에서 마련한 40만원을 소값으로 계산해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600억원이지만, 땅값으로 환산하면 2조원이 훨씬 넘는 금액이다. 우당집안을 뒤이어서 석주 이상룡, 김대락, 김동삼 등 경북 안동의 깨어있는 혁신 유림들도 ‘학문은 나라를 찾은 다음에 배우면 된다’는 신념으로 50일 만에 모든 재산을 정리한다. 본인과 가문의 영달에만 혈안이 되었던 위정자들이 대다수였던 조선 땅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이들을 역사는 기억한다.
살을 에이는 영하 30도의 스산한 만주벌판혹한을 온몸으로 맞으며 이들은 서간도 길림성 유하현의 추씨 집성촌 부근에 도착한다. 접근과 진입이 어려운 탓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그곳은 무장투쟁인재를 양성하기에 그야말로 안성맞춤 요충지였다.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던 지체 높은 사대부 양반들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손에 흙을 묻히며 삽과 괭이를 들고 농사일에 손을 보태야만 했다. 그러나 토착 중국인들의 방해와 배척이 극에 달해 아무도 조선인들과는 집도 땅도 거래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흉작에 식수 부족으로 극심한 기근에 허덕여야 했다. 어쩔 수 없이 1911년 임시방편으로 허름한 옥수수 창고를 빌려 교사를 마련하고 신흥무관학교의 모태가 되는 신흥강습소를 세운다. 강습소로 위장했지만 어엿한 군사교육기관으로 이듬해에는 9명의 독립군을 배출하기에 이른다.
때마침 1911년 11월 신해혁명으로 중국의 실세로 등극한 원세개(위안스카이)와의 친분이 있던 이회영은 그와 담판을 벌여 토착 중국인들과의 갈등을 해결한다. 마침내 길림성 합니하의 강이 반원을 그리며 압록강 쪽으로 휘몰아치는 천혜의 요새 산기슭에 한인촌과 학교다운 학교를 세운다. 그러나 학교가 일체의 수업료를 받지 않다보니 조선에서 가지고 온 거금은 2년 만에 동이 나버린다. 또한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신민회가 갑작스럽게 와해되자 이들은 지독한 식량난으로 다음 해 농사를 위한 종자까지도 충당해야했다. 척박한 만주 땅에서 벼농사에 성공하는 쾌거를 이룬 간도 조선인들과 고국에서 모금한 군자금으로 근근이 운영했지만 수많은 난관은 하나 넘기 무섭게 매번 새로이 도사리고 있었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팔도강산을 뒤덮고, 항일정신이 고취된 조국의 인재들이 이역만리 무장투쟁의 메카 신흥강습소를 찾아 몰려든다. 입학하려는 생도를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신흥강습소는 부근의 대도자로 본교를 이전하고 신흥무관학교로 학명을 변경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군인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천 중위와 운남사관학교 출신 이범석 등의 우수한 엘리트들이 최신 병서를 들고 신흥무관학교로 망명한다. 특히 풍부한 근대적 군사지식과 제1차 세계대전 실전경험까지 갖춘 지청천의 합류로 신흥무관학교의 사기는 하늘로 충천되었고 조국을 되찾기 위해 각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군사훈련 이외에 국어, 국사, 지리 등의 수업을 받아 투철한 민족의식이 함양된 졸업생들은 독립군이나 비밀결사대원이 되어 독립전선의 중추가 되었다. 허나 이들의 두드러진 활약으로 궁지에 몰린 일제는 대대적인 독립군토벌을 계획해 잔악하게 포위망을 좁혀 신흥무관학교를 옥죄인다. 결국 코앞까지 밀고 들어온 일본군을 피하려 1920년 가을, 학교는 폐교된다.
기존 졸업생들이 대거 포진한 서로군정서에 합류한 신흥무관학교 학생들과 지청천 교장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청산리대첩이라는 빛나는 역사의 주역이 된다. 나라 잃고 가장 혹독한 역사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들은, 빼앗긴 들의 봄을 되찾기 위해 멈추지 않고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독립의 날은 그들 중 극소수만 맞이할 수 있었다.
어떠한 기록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만주벌판에서 사라졌던 이들, 신흥무관학교의 무명 순국선열을 그리는 창작 뮤지컬이 육군본부의 주최로 공연된다. 혼란과 격변의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 집중하는 창작뮤지컬 <신흥무관학교>는 상징적 무대, 강렬한 음악 그리고 역동적인 안무와 액션으로 역사적 여운과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육군 창작 뮤지컬 <신흥무관학교> - 150분 · 공연일시 : 2019년 2월 27일(수)~4월 21일(일)
화, 목, 금 8시 | 수 3시,8시 | 토, 공휴일 2시30분,7시 | 일 3시
· 공연장소 : 광림아트센터 BBCH홀
· 출연 : 지창욱, 고은성, 조권, 강하늘, 김성규, 이진기(온유) 등
[황승경 국제오페라단장 사진제공 육군·㈜쇼노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2호 (2019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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