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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현 기자의 Blue House Behind] 파란만장했던 에티오피아 방문 3박4일 박 대통령, 사상초유 해외순방 중 거부권 행사
입력 : 2016.07.26 11:5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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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26일 오후(현지시각)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대통령궁에서 물라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현안에 대한 대화를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각종 예방주사 후유증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그야말로 기회의 땅. 힘들더라도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아프리카로 향하기 전 국내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출국 엿새 전(5월 19일, 이날은 19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정의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으로 국회법 개정안이 기습적으로 통과됐다. 국회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원회 차원에서 수시로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해 이른바 ‘상시 청문회법’으로 불렸다.
이 법안에 대해 청와대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차원을 넘어 마비시킬 수 있는 위험한 법”이라며 즉각 반발했다.
청와대 일각에선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대해 다소 신중한 기류가 감지되기도 했지만, 박 대통령의 생각은 단호했다. 꼼꼼히 따져보고 위헌 소지가 높은 것으로 판단되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일부 참모들과 수시로 전화 통화를 해가며 상황을 파악했다.
새누리당에선 헌법학자 출신인 정종섭 의원(당시는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이 적극 나섰다. 그는 “여러 논란 가운데서도 가장 명확한 것은 ‘소관’ 현안 조사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청문회를 열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며 “소관이란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서 행정부에 큰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밝혔다. 정 당선자는 “외교통일위원회를 예로 들자면 소관 현안을 조사하기 위해 외교부나 통일부 관계자를 언제든 수시로 모두 불러 조사할 수 있다. 공직자들뿐 아니라 이해 관계자들도 마찬가지”라며 “이건 그야말로 공무원들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행정부를 마비시키는 법으로 입법부 독재·의회 독재란 비판이 쏟아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위헌 여부와 관련해 정 당선자는 “이 법안은 행정부를 전방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며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과도하게 행정부 영역을 침해할 수 있는 만큼 위헌 소지가 꽤 크다”고 지적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에 도착해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왼쪽)의 영접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국회는 지난 5월 23일 국회법 개정안을 정부로 송부했다. 공은 정부로 넘어왔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최종 결정’을 미룬 채 5월 25일 전용기에 올랐다. 논란을 뒤로 하고 10박12일에 걸친 아프리카 3개국·프랑스 순방에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은 현지시간 5월 25일 밤 첫 순방지인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도착한 직후 곧바로 호텔로 향해 다음날 있을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26일 열린 정상회담은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한국전쟁에 지상군을 파병해 한국을 도왔던 인연 때문인지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한국의 발전에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두 정상은 우선 아디스아바바 부근 30만 평에 한국 섬유단지를 조성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도로건설·통관시스템 등 7억달러 규모에 달하는 5개 현지 프로젝트에 우리 기업과 정부가 참여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됐다. 이 때문인지 지구촌 마지막 성장동력으로 꼽히는 아프리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가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뎠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30만 평 규모의 한국 섬유단지는 적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현재 미국과 EU는 아프리카에 대해 최빈곤국 수출 관세혜택을 부여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은 사하라 이남에 위치한 아프리카 국가에서 생산한 의류 등 1837개 품목에 대해 무관세 수출 혜택을 준다. EU는 동아프리카공동체(AEC) 회원국 생산제품에 무관세·무쿼터 특혜를 제공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과 EU에 무관세 수출이 가능한 에티오피아에 우리 섬유기업들이 생산기지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대미·대EU 수출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게다가 에티오피아는 섬유산업 기술력이 매우 강한 나라인데다 인건비·원부자재 비용 등이 중국의 30% 수준이어서 우리 기업들이 강력한 원가 경쟁력도 갖출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의 첫 일정은 피곤한 가운데서도 매우 보람되게 마무리됐다. 동행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참모들도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방으로 흩어져 잠을 청했다.
새벽 2시 휴대폰으로 대변인 브리핑 알려
다음날 새벽 2시경. 갑자기 기자들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 소리가 잇따르더니 급기야 전화까지 왔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전화를 받았더니 춘추관 관계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얘기한다. “지금 긴급한 상황이 발생했다. 곧 대변인이 공식 브리핑을 할 예정이다.”
한국은 아침 8시였다. 국무총리실에서 거부권 행사와 관련한 임시국무회의가 열릴 계획임을 알렸다고 한다. 국내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고, 여당과 정부는 초연했다. 서울에선 오전에 황교안 총리 주재로 임시국무회의가 열렸고,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확정됐다. 회의 직후 곧바로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에 있는 박 대통령 집무실로 서류가 발송됐다. 해외 순방 중, 대통령이 전자결재를 통해 거부권 행사를 최종 승인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에티오피아는 아직 새벽 시간이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은 취침중이었다. 박 대통령은 현지 시간으로 전날 저녁 참모들과 거부권 문제를 최종 숙의하고 황 총리가 임시국무회의를 여는 방안을 허락했다고 전해진다.
박 대통령은 5월 27일 아침 7시 10분께 에티오피아 호텔 집무실에서 전자결재를 통해 거부권 행사 방안(재의요구안)에 최종 서명했다. 거부권 행사가 마무리된 후, 순방에 동행했던 김성우 청와대 홍보수석이 기자실을 찾아 새벽에 갑작스레 전화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일부 기자들이 불만을 쏟아내긴 했지만, 대충 이해하고 넘어갔다.
정종섭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위헌소지를 지적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전자서명을 마친 뒤 이날 예정된 공식일정에 돌입했다. 첫 일정은 ‘아프리카의 유엔’ 격인 아프리카 연합(AU) 본부 특별연설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이곳을 찾아 연설하는 것은 박 대통령이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 연설을 듣기 위해 아침부터 무려 1300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은코사자나 들라미니 주마 AU집행위원장과 하일레마리암 에티오피아 총리, 현지 외교단, 국제기구 대표,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용사 등 면면도 화려했다.
박 대통령은 연설에서 아프리카 성장·발전을 위한 한국의 포괄적 협력 청사진 중 하나로 ‘쌍방향 1만 명 교류 계획’을 언급해 관심을 끌었다. 박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청년고용 기회를 증진시킬 ‘쌍방향 1만 명 교류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앞으로 5년간 아프리카 인재 6000명을 한국에 초청하거나 아프리카 현지에서 교육·훈련 기회를 제공하고, 한국인 봉사단 4000명을 아프리카에 파견하겠다는 설명이다.
이어 박 대통령은 ‘제 65주년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 참석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한국전에 지상군을 파병한 유일한 나라다. 당시 셀라시에 황제가 파병 결단을 내렸으며, 파병부대 이름인 ‘강뉴(Kagnew)’는 에티오피아어로 ‘격파하다’라는 의미다. 우리 정부는 현지 날씨가 우기로 접어든 점을 감안해 생존 참전용사들에게 국산 3단 우산세트를 선물로 준비했다. 박 대통령은 참전용사회측으로부터 1968년 한국을 찾은 셀라시에 황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찍은 사진 액자를 선물로 받았다.
참전용사들은 1974년 공산정권 치하에서 핍박을 받았다. 정권교체 이후 핍박은 면했으나 여전히 고령과 가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은 이들에게 월 5만원 상당의 생활비를 제공하는 등 각종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참전 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며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의 시간을 보냈음에도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해 주고 계신 참전용사 여러분들을 우리 국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행사엔 박 대통령과 물라투 에티오피아 대통령, 한국전 참전용사와 유가족 150명 등 250여 명이 참석했다.
남수단한빛부대원과 포옹하는 박대통령
5월 28일, 에티오피아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박 대통령이 이번 아프리카 3개국 방문에서 가장 정성을 기울였던 행사 중 하나가 바로 이날 열렸다. 다름 아닌 ‘코리아 에이드(Korea Aid)’ 론칭 행사다.
박 대통령은 음식과 의료봉사, 문화공연의 3개 콘텐츠를 토대로 아프리카에 대한 한국형 개발협력 모델을 구상했는데 그 이름이 코리아 에이드다. 푸드트럭과 냉장트럭(음식), 진료차량과 구급차(의료봉사) 문화영상트럭(문화)이 한 팀을 이뤄 아프리카 곳곳을 누비며 한국에 대한 이미지를 심게 된다. 바로 이 코리아 에이드가 이날 에티오피아에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행사장엔 600명 가까운 현지인들이 찾아 한국 음식을 맛보고 한국의 농악·태권도 시범 등 문화 공연을 관람했다. 김남주 서울대 병원 교수와 정혜원 이대목동병원 교수 등 한국에서 파견된 의료진과 현지 의료진으로 구성된 진료 코너에서 진찰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한국 음식을 시식해 본 현지 여성 게넷 씨가 “한국과 에티오피아 음식이 잘 통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박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네. 쌀로 만든 식품이에요”라며 다정하게 답했다. 옆에 있던 물라투 대통령은 “쌀과자 가공기술을 한국으로부터 전수받으면 좋겠는데 방법이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동진료 코너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초음파 검진을 받은 에티오피아 임산부에게 “많은 도움이 되시기를 바란다”고 말했고 계속되는 기침 증상으로 진료소를 찾은 에티오피아 소녀에겐 “처방을 받고 완전히 건강이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행사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은 부랴부랴 공항으로 이동해 전용기에 올라탔다. 파란만장했던 3박4일간의 에티오피아 일정을 마무리하고 두 번째 순방지인 우간다로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사진 김재훈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0호 (2016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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