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말 변혁의 시대 ‘아르누보’ 건축양식…철과 유리, 화려한 장식의 심미적 건축

    입력 : 2015.09.04 10:30:03

  • 사진설명
    2015년 초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뜻하지 않은 전시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긴 머리카락과 늘어뜨린 옷 주름, 그리고 화려한 꽃과 식물의 덩굴 속에 둘러싸여 몽환적이기까지 한 여인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아르누보(Art Nouveau)’ 회화양식의 창시자 알폰스 무어(Alphonse Mucha)의 작품 전시였다.

    ▶세기 말 새로운 양식에 대한 변혁의 욕구

    아르누보양식이 탄생한 19세기 말은 새로운 양식에 대한 변혁의 욕구가 거센 전형적인 세기말의 시대였다. 기존 질서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탈 전통운동이 일어났고, 부르주아라는 신흥 중산층이 이를 이끌었다. 이들은 문화전반에 거친 변혁을 주도했으며 근대건축운동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초기 근대건축운동은 다양한 양식이 있었는데 신건축, 신예술, 모던스타일 등으로 불렸다. 아르누보는 이런 다양한 양식을 대표하며 세기말적 고민과 미래를 향한 변화와 혁신의 상반된 시대 상황을 투영하며 탄생했다. 탈 전통의 선두에 선 개혁운동으로 19세기 말 가장 대표적인 통일된 예술양식이었다.

    또한 20세기의 변화에 대한 욕구와 19세기의 전통에 대한 미련이 혼재하는 시기에 이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투영하며 새로운 변혁의 욕구를 기반으로 모더니즘을 해석하려는 정신운동이었다. 아르누보의 양식적 기원은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에 있었다. 미술공예운동을 처음 촉발한 사람은 영국의 월리엄 모리스였고 조류를 주도한 대표자는 벨기에의 알리 반 델 벨데이다. 영국인들은 공예품을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하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고 당시를 풍미하던 시대에 뒤떨어진 과장된 복고 양식들에서 등을 돌렸다.

    아르누보는 산업화로 인해 시대의 주역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 부르주아의 신분과 부의 위상을 과시하는 새로운 문화 예술적 표현양식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후원을 받으며 20세기 전후(1890-1905)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유럽 전역에 확산됐다. 아르누보 양식은 장식, 미술, 건축을 중심으로 시작해 회화, 조각, 일상의 거의 모든 물품에까지 다양하게 전개됐다. 이들은 덩굴식물, 백합, 이국적인 꽃, 물결과 노니는 백조, 머릿결 휘날리는 여인 등 식물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유려하고 우아한 선과 파상(波狀)·곡선 ·당초무늬(唐草文) 또는 화염(火焰)무늬와 같은 흐르는 듯한 생동감 있는 선형적 표현과 같은 힘과 생명력에 충만한 선에 그 장식적 가치를 두었다.

    하지만 아르누보는 유미주의 및 상징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다방면에 걸쳐 전개되었지만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미적 감각을 추구하려는 애초 의도는 아쉽게도 사회적 경제적 제약들과 장식 과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또한 아르누보가 추구하는 수준 높은 생산물은 대량생산의 어려움 등으로 대중화를 어렵게 했다. 이것은 아르누보가 비교적 단명하게 끝난 이유이기도 하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르누보는 20세기 모더니즘 양식의 새로운 길을 여는 역할을 하며 신고전주의와 모더니즘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Maison Coilliot, Alphonse_Mucha - Zodiac
    Maison Coilliot, Alphonse_Mucha - Zodiac
    ▶아르누보의 기원-메종 드 아르누보

    유럽 각지의 예술 중심지에서 일어난 아르누보는 광범위하게 건축, 공예, 조각, 미술 등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모습을 드러냈지만, 나라마다 그 나라의 성격에 맞게 조금씩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고 지역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졌다.

    메종 드 아르누보(Maison de l’Art Nou veau, House of New Art)라는 이름은 1895년 파리의 독일 예술품 판매상인 사무엘 빙이 연 갤러리의 이름이다. 그의 갤러리는 현대 가구, 태피스트리, 예술 작품들을 보여주었던 1900년 만국 박람회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박람회 이후에 그의 갤러리에서 제공했던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갤러리 이름과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되었던 용어인 ‘아르누보’라는 단어와 깊게 관련짓게 된다. 아르누보라는 이름은 독일 권에서는 뭔헨에서 발행하는 유켄트라는 잡지가 이 스타일을 전파하면서 여기서 유래가 되어 유켄트슈틸(Jugendstil)로, 오스트리아 빈의 분리파 예술가들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전역에 걸쳐 상당한 영향을 주며 세제션(Secessi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틸레 리바티(Stile Liberty) 등으로 불렸다.

    Metro station entrance Paris
    Metro station entrance Paris
    ▶대도시 바꾼 아르누보 건축

    건축에서 ‘아르누보’란 말은 처음에는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의 에펠탑과 기계관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새로운 예술’이란 의미를 갖는 아르누보란 말은 그 당시의 새로운 재료인 철재를 이용 거대한 탑의 높이와 기계관의 대공간 등 첨단 테크놀로지를 구현해 그 모습을 드러낸 에펠탑과 기계관을 지칭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1893년에 본격적인 아르누보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오르타의 타셀하우스가 지어지고 월리엄 모리스가 신재료에 의한 장식운동을 통칭하여 ‘아르누보’로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흥 부르주아는 건축적으로는 철과 유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철과 유리가 혼용된 건축은 건물의 골조를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으며 이러한 건물은 거대한 건축물이 마치 무게가 없는 듯이 보이게 했다. 아르누보 건축의 본질적인 규정요소는 장식, 즉 선형의 유기적인 새로운 형태의 장식으로 자연에서 모티브를 얻은 기하학적인 장식형태나 양식화된 선이 그 특색이다. 공간구성보다 면의 장식에 치중했다. 아르누보 양식의 철물장식은 귀족계층과 구별되는 신흥부르주아의 상업미학을 대표하는 대중성을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르누보 건축의 흐름을 주도한 중심지는 스코틀랜드와 벨기에, 프랑스의 파리와 낭시, 독일의 뮌헨과 다름슈타트, 오스트리아의 빈이었다.

    아르누보 건축의 본질적인 규정요소인 장식만을 입힌 특색을 넘어서는 건축물, 이것들과 구별되는 골조 및 새로운 재료를 대표해주는 모던하며 순수한 아르누보 건축물들은 주로 이들 대도시에 지어졌다.

    아르누보 건축물들은 ‘요제프 마리아 올리브히’의 <빈분리파 건물>과 ‘빅토르 오르타’의 <솔베이 호텔>, <타셀가옥>, <시민회관 극장>, <아 이노바시옹 백화점>, ‘찰스 레니 맥킨토시’의 <글레스고 예술학교> 등이며, 아르누보 건축의 창시자라 불리는 ‘앙리 반 데밸데’의 <블레멘 베르프 가옥>, <호엔 호프>, <폴크방 미술관 로비> 등이 있다. 또한 시대를 넘어서는 건축적 가치와 정신을 실현한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을 들 수가 있다. 아르누보 건축은 20세기 초 철골과 콘크리트에 의한 새로운 구조공법이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면서 소멸된다. 산업화로 인한 인구집중은 부동산 개발을 활성화시키며 구조적 효율성과 경제성이 근대 건축의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르누보의 장식적 성격은 물리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엔지니어링 건축의 거센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공업화에 부합되기 어려운 한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에 오면서 엔지니어링 제일주의가,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던 아르누보 건축을 보수적인 건축으로 만들며 아르누보 건축은 실패로 끝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아르누보 건축의 뿌리인 장식적인 차원과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철, 유리, 콘크리트의 재료적인 특성을 살린 건축물은 세기 말 고전주의가 무너지는 혼란기에 새로운 안정적인 건축 질서를 보여주며, 고전과 모더니즘을 연결하는 신건축이었다.

    이러한 재료적 특성을 예술과 산업의 협력으로 이끈 양식은 나중에 새로운 생산방식에 어울리는 디자인 방식의 적용과 공업화를 추구하는 바우하우스로 이어지게 된다. 바우하우스는 산업계와 연결하는 건축을 주축으로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며 교육하는 학교로 아직까지도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의 주요 건축가와 작품

    빅토르 오르타
    빅토르 오르타
    아르누보 건축은 벨기에에서 상당히 발달했다. 벨기에의 아르누보 건축을 주도한 대표적인 건축가라 할 수 있는 빅토르 오르타(Victor Horta, 1861-1947)는 벨기에의 부르주아 그룹의 후원을 받으며 1890년대 일련의 주택들을 설계한다. 오르타를 후원한 벨기에의 인테리전트한 부르주아는 ‘아미 필란트로프-박애주의자들의 모임’이라는 그룹이었다. 대부분의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그 그룹의 일원들에게서 수주해 1892년 오르타는 <타셀주택>의 설계를 통해 아르누보의 건축의 창시자로 전 유럽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다. 오르타는 복잡한 양식의 혼재 속에서 한 가지 통일된 주제로 철을 주거용 건축에 많이 사용하였다. 철골구조와 유리창문은 그의 순수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의 나이 32세 때 설계한 타셀 주택은 건물의 외관보다 실내로 들어가면 그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을 볼 수 있는데 현관홀과 계단실의 철을 이용한 화려한 장식적인 표현이 완결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는 대표작으로 곡면을 유리와 철을 사용해 풍부한 아르누보의 장식을 화사드에 사용한 브뤼셀의 솔베이 부부를 위해 설계한 솔베이 저택(Solvay House)이란 건축물을 만들어 냈다.

    공간 분할과 배치, 재료들의 값비싼 소재들,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과 외국산 목재, 금속, 호화로운 마감재, 채색, 광택제의 실내장식은 성의 내부를 방불케 했다. 그의 또 하나의 대표작으로 집회장의 철골 골조를 흐르는 듯한 곡선을 사용해 장식적으로 처리한 사회당의 브뤼셀 본부인 인민의 집(1898) 등이 있다.

    프랑스에서 아르누보 건축은 그다지 번창하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는 하나의 통일된 건축적 양식을 지향하기엔 너무나 많은 건축적 논쟁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다원적인 프랑스 건축의 경향 중 아르누보 건축의 경향을 보인 대표적 건축가를 보면 헥토르 귀이마르를 들 수 있다.

    귀이마르의 대표적 작품인 카스텔 베란제(Caste Beranger)는 파리에 세워진 집합주택으로 추상적인 형태에 의한 흐르는 듯한 곡선의 금속세공으로 된 문, 장식된 테라코타의 패널과 석재로 조각한 개구부, 스테인드글라스에 의한 풍부한 공간 구성은 환상적이며 아름답다.

    그러나 귀이마르의 이름을 유명하게 한 것은 1900년 프랑스의 만국박람회 개최 시기에 맞추어 개통된 파리 지하철 역사의 샘플 설계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된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는 14년 동안 무려 140개의 파리 지하철 역사를 설계한다.

    안토니오 가우디는 너무나 유명한 스페인의 대표적 건축가다. 그는 아르누보 건축의 대변자이기보다 아르누보 정신의 대변자로 그 양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축가다. 그의 건축물은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곡선과 창조적인 자연을 닮은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섬세하고 강렬한 색상의 장식이 주를 이루며 건물의 난간이나 문에 금속성의 장식을 많이 사용했다.

    가우디의 건축적 특징은 자유롭고 선적인 흐르는 듯한 형태를 3차원의 표현적인 건축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철제 장식이라고 믿기 어려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격자무늬 곡선의 조화. 카사밀라의 테라스 장식을 보면 바위 위의 해초 같은 형태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철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장식을 이루고 있다.

    [김종우 한미글로벌 부장]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0호 (2015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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