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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걸 기자의 Blue House Diary] 박 대통령이 진짜 화난 이유
입력 : 2015.08.21 09: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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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16일 청와대에서 새로 선출된 원유철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와 회동하며 유승민 사태로 불거진 당청갈등 봉합에 나섰다.
박 대통령 임기 말에 인생 첫 권력분점 어떻게
“배신의 정치!”
박근혜 대통령 입에서 나온 이 한마디가 지난 한 달간 정치판을 뒤흔들었다.
평소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길 꺼려하는 박 대통령이다.
그러나 지난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모습은 달랐다. 켜켜이 쌓인 분노를 담아 언성을 높였다. 의도적으로 누구에겐가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이날은 국회가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되던 날이었다.
박 대통령이 갑자기 유승민 원내대표를 겨냥한 폭탄발언을 터뜨릴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속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정말 뜬금없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새누리당은 콩 볶듯 시끄러워졌다.
박 대통령의 친위대격인 국회의 이른바 ‘친박계’ 국회의원들은 곧바로 들고 일어났다. ‘배신의 정치’로 지목된 유승민 원내대표를 흔들어대기 시작했고 당은 사분오열이 됐다. 결국 우여곡절을 거쳐 13일 만에 유 원내대표는 사퇴했다. 박 대통령이 원작, 각색에 주연배우와 연출까지 맡은 2주간의 정치드라마이자 활극이었다.
▶朴 “동물들은 배신하지 않아” 사실 ‘배신’이란 단어는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쉽게 나올 만한 말은 아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웬만해선 쓰긴 힘들다. 상대방의 인격을 완전히 깎아내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이 말을 쉽게 썼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박 대통령에게도 이 말은 최고수준의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는 극단의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에게 ‘배신’이란 무엇일까. 최근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기자시절 인터뷰한 내용을 쓴 책에 박 대통령에 대한 구절이 있어 주목을 받았다. 바로 박 대통령이 ‘배신’에 대해 느끼는 속내를 20년 전 박 의원이 기자시절 털어놓았던 대목이다.
“당시 나는 ‘육영수 여사 서거 20주기’ 인터뷰를 마치고 서울 모처 식당에서 그와 점심을 하며 하루 일과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박 대통령은 ‘TV 프로그램 중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본다’고 답변했다. 이어 ‘왜 동물의 왕국을 즐겨 보세요?’하고 물으니, ‘동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라고 답했다. (중략) 아버지에게 혜택 받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등을 돌리는 것을 보며 쌓인 ‘배신의 분노’를 삼키며 보냈을 지난 30여 년. 박 대통령에게 그 세월은 너무 길었던 것일까. 박 대통령에게 ‘배신’이란 남들이 느끼는 것보다 깊고 강하다.”
▶2008년 강재섭에도 ‘배신과 거짓’
박 대통령이 아버지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느꼈을 그 배신의 감정은 그녀가 운명처럼 정치에 입문한 뒤 본인 주변 사람들을 보며 두어 차례 더 경험하게 된다. 실제 박 대통령은 현실 정치에서 본인이 직접 ‘배신’을 토로한 것은 아주 드물다. 그런데 그중 이번과 매우 흡사한 경우가 바로 지난 2008년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탄했던 일이다.
2008년 3월 당시 박근혜 전 대표는 한나라당의 18대 총선 공천을 비난하는 사자후를 토한다.
박 전 대표는 당시 자신의 측근들이 한나라당의 공천에서 떨어져 ‘공천학살’이란 말이 나오자 기자회견을 자청해 강재섭 당 대표의 사퇴를 요구했다. 핵심은 연설 중 ‘배신’을 언급한 대목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칙과 신뢰가 깨지는 것을 종종 경험하지만 아무리 거짓과 배신이 판치는 정치라 할지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경우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2008. 3.23)”
흥분한 박 전 대표는 당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뤄낸 공신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당을 나가도록 만들고 그 뒤에 대고 ‘몇 명 나간다고 당이 안 깨진다’ ‘은혜를 모른다’는 말까지 하는 것은 그분들을 두 번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탈당 후 무소속 출마를 준비하는 이들을 옹호하는 말까지 했다.
▶강재섭 대표 아직도 재기 못해
결과적으로 박 대통령을 ‘배신’한 사람의 뒷모습은 아주 처참해진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까지 지냈던 강재섭 전 대표는 TK(대구경북)정서에 눌려 아직까지도 정치복귀를 하지 못하고 있다. 새누리당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흥미로운 얘기가 있다. TK의 거목이었던 강 전 대표지만 한차례 박 대통령을 배신한 것을 계기로 아예 ‘정치적 불구’ 수준이 됐다는 얘기다. 지난 2011년 4월 경기 분당을 보궐선거를 통해 정계복귀를 노리던 강 전 대표는 야당의 손학규 전 대표에게 고배를 마신다. 당시 손학규 51.0%(4만1570표), 강재섭 48.3%(3만9382표)로 강 전 대표는 손 후보에게 2.7% 표차로 졌는데 나중에 분석해보니 분당을 지역에 사는 TK표심이 대부분 강 대표에게서 돌아섰었다는 얘기다.
강 전 대표는 경북고와 서울 법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TK엘리트로 32살의 젊은 검사시절 청와대 정무·법무비서관으로 발탁될 정도로 잘나갔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정계에 입문한 이후 17대까지 내리 5선을 하면서 부총재, 최고위원, 원내대표, 대표까지 지낸 거목이었지만 2008년 박 대통령에게 ‘찍힌’ 이후 지금까지 정치권에 복귀조차 못하고 있다.
▶TK초재선과 비례대표에도 배신감
그렇다면 이번에 박 대통령이 화가 난 대상은 누구일까.
물론 유승민 원내대표다. 유 원내대표는 여당 원내대표로 선출 직후 국회연설에서 박 대통령의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를 ‘허구’라고 말해 청와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집권여당 원내대표가 대선 공약도 현실성이 없다며 파기를 선언했다, 유 원내대표는 당시 “문제는 134조5000억원의 공약 가계부를 더 이상 지킬 수 없다는 점”이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이 반성한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이 국민과 했던 약속이 ‘허구’라고 여당 원내대표가 밝히고 나서니 청와대로선 아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유 원내대표는 청와대와 정책협의를 하면서도 청와대 수석 등 대통령의 메신저들을 하대하고 무시했다고 청와대 측은 얘기한다. 국회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청와대의 외교정책을 평가절하 하면서 썼던 ‘청와대 얼라들’이란 표현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 한사람에게만 분노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유 원내대표 개인은 물론 그를 옹호하는 새누리당 초재선 그룹도 아주 못마땅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TK지역 초재선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 중 몇이 청와대에 협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 데 대해 특히 배신감을 느꼈다는 얘기가 많다. 한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으로선 TK지역서 공천 받았거나 비례대표로 선출된 의원들은 모두 자신이 국회의원을 시켜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서 “그런데 이들이 유 원내대표를 싸고도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에서 말하는 대상은 경북 대구 지역의 K의원과 또 다른 K의원, 그리고 비례대표인 M의원 등이다.
※ 59호에서 계속... [글 김선걸 기자 / 사진 김재훈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9호 (2015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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