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봉권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새로운 채권왕 제프리 군드라흐 시대 열리다

    입력 : 2014.11.14 16: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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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셋째 주 캘리포니아 주 뉴포트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핌코(퍼시픽인베스트먼트매니지먼트) 본사. 핌코 설립자이자 채권왕으로 불리는 빌 그로스는 분노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1971년 핌코를 설립한 뒤 세계 최대 채권운용회사로 키운 사람이 바로 난데. 나를 해고하려고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1월 그로스에게 반기를 들었던 모하메드 엘 에리언 당시 최고경영자(CEO)가 사퇴한 뒤 자신의 리더십에 생채기가 났고 언젠가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결정의 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엘 에리언이 갑작스레 뛰쳐나간 뒤 그로스 설립자가 직접 최고투자책임자(CIO)로 임명한 대니얼 이바스킨 등 5명의 선임 펀드매니저들까지 내가 회사를 떠나지 않을 경우, 퇴직하겠다고 핌코이사회에 통보했다니. 고객 자산을 굴리는 게 평생의 업이었고 고희의 나이가 됐지만 아직도 현역으로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나이인데.’ 그로스는 스스로에게 독백하듯 물었다. 내가 그렇게 권위적이고 독선적이란 말인가.

    마음을 정리한 그로스는 수화기를 들어 제프리 군드라흐(54)가 설립한 채권운용사 더블라인캐피털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로스가 전화를 걸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군드라흐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로스라고? 한 번도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 그로스가 왜 나에게 전화를 했을까? 장난 전화 아닐까?’

    장난 전화일수도 있다고 생각한 군드라흐는 비서에게 전화번호를 일단 받아놓으라고 했다. 그로스 전화번호라는 것을 확인한 뒤 군드라흐는 퇴근 후 LA자택에서 전화를 했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로스는 대뜸 “회사(핌코)가 나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며 “회사를 나와야 할 것 같다”고 폭탄발언을 했다.



    그로스도 인정한 신 채권왕 군드라흐 전화통화 후 다음날 오후 군드라흐와 그로스는 군드라흐 LA자택에서 마주앉았다. 그로스는 군드라흐에게 더블라인캐피털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밝혔다. 그로스는 “나는 미국 프로농구 우승 반지가 5개나 되는 코비(코비 브라이언트)고 당신은 우승 반지가 지금은 2개지만 앞으로 5개가 될 수 있는 르브론(르브론 제임스)”이라며 채권드림팀 구성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로스의 제왕적 통치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군드라흐는 머뭇거렸다. 그러면서 군드라흐는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다고 밝혔다. 바로 더블라인캐피털 주인은 자기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협력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별다른 결론은 내지 못한 채 헤어졌고 지난 9월 26일 그로스는 핌코와 절연을 선언한 뒤 야누스캐피털로 이직한다고 발표했다.

    그로스의 전격적인 사퇴 발표에 채권시장은 크게 술렁거렸다. 곧바로 그로스의 명성을 믿고 돈을 맡겨온 투자자들의 펀드 해지요청이 잇따르면서 펀드런이 발생했다. 그로스가 직접 운용하던 세계 최대 펀드이자 핌코 대표펀드인 토털리턴펀드에서 9월 한 달간 235억달러(약 24조9000억원) 뭉칫돈이 빠져나갔다. 월간 기준으로 사상 최고 유출액이다. 지난 8월 말 토털리턴펀드 운용액(2216억달러) 대비 한 달 새 전체 자산의 10% 이상이 한꺼번에 빠져나간 셈이다. 그야말로 독심을 품은 그로스의 저주로 채권자산운용 시장에서 그동안 핌코가 다져온 지배적인 위치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진단이 흘러나오는 배경이다.

    이처럼 채권시장에 충격파를 던진 그로스의 전격적인 사퇴와 함께 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것은 바로 그로스가 사퇴 전 군드라흐에게 접근했다는 것. 이와 관련해 일부 호사가들을 중심으로 그로스가 핌코와 절연하면서 현재 채권업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채권펀드매니저인 군드라흐와 협력관계를 구축, 내심 핌코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었던 것 아니냐는 해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 접근했든지 간에 그로스가 자존심을 접고 군드라흐와 만남을 가진 것 자체가 월가에서 큰 화젯거리가 됐다. 본인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독불장군 채권왕 그로스가 군드라흐의 채권 운용 실력을 인정해준 것이라는 게 월가의 분석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군드라흐는 오래전부터 그로스의 뒤를 이을 차세대 채권왕으로 불린 채권업계 거물이다. 그로스 이탈로 핌코의 절대적인 위치가 흔들리면서 앞으로 채권 운용 시장에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가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이 중 군드라흐는 군계일학이다.

    군드라흐가 설립한 더블라인캐피털이 굴리는 자금은 520억달러(약 53조원)정도로 운용자산 규모 2조달러에 달하는 핌코와 비교하면 아직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장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군드라흐가 직접 운용하는 356억달러 규모의 더블라인토털리턴채권펀드는 지난 4년간 운용규모가 11배 폭증했다. 특히 그로스 사임 후 자금유입 규모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더블라인토털리턴채권펀드에 지난 9월 25~30일 사이에 5억5900만달러가 유입되는 등 지난 9월 한 달간 전 달의 두 배가 넘는 13억200만달러가 봇물 터지듯 들어왔다. 더블라인캐피털 전체적으로 보면 지난 9월 한 달간 회사설립 이후 월간 기준으로 최고액인 16억5000만달러가 순유입됐다.

    이 같은 더블라인캐피털 급성장은 그로스가 전화를 해 파트너십을 제안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은 군드라흐 명성 덕분이다. 채권시장 흐름을 내다보는 군드라흐의 예지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그로스가 나이가 들면서 총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과는 정반대다. 올초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테이퍼링(양적완화축소)을 시작했을 때 압도적 다수의 채권전문가들은 연준이 긴축에 들어가는 만큼 미국 10년물 국채금리가 큰 폭으로 상승해 3% 중후반대까지 급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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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국채금리 하락 전망 유일하게 적중 그런데 군드라흐는 유일하게 지표물인 10년물 미국국채금리가 오히려 하락해 2.2% 선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채권시장에서는 말도 안 된다는 분위기였지만 뚜껑을 열고 보니 그의 예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지난 10월 초 10년물 미국 국채금리는 2% 선 아래로 떨어져 지난해 6월 이후 1년 4개월 만에 처음으로 1.9% 선까지 밀려났다. 미국 국채금리가 연준 통화정책보다는 유럽금리 움직임에 더 큰 영향을 받을 것으로 진단한 군드라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채권시장 흐름에 대한 놀라운 예지력을 발휘하고 있는 군드라흐가 운용하는 더블라인토털리턴펀드 수익률은 올들어 5.3%를 기록했고 다른 채권펀드수익률과 비교해 상위 93%수준이다. 반면 그로스의 토털리턴채권펀드 수익률은 중간 이하 성적을 내고 있다. 군드라흐는 수익률이 사상 최저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국채보다는 다소 위험하더라도 국채보다 상대적으로 더 높은 수익이 보장되는 주택담보부채권(MBS)과 정크본드에 8대 2 비율로 투자하는 것을 선호한다. 위험은 다소 높을 수 있지만 시장흐름을 파악해 투자위험을 최소화함으로써 상대적으로 고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난 3년간 토털리턴펀드의 연평균 수익률은 6%에 육박해 다른 채권펀드 수익률을 압도했다. 그로스의 뒤를 잇는 신(新)채권왕으로 급부상한 군드라흐가 앞으로 얼마만큼 더 성장할지 시장 초미의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0호(2014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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