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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만 있고 책임은 안진다?…등기이사에서 물러나는 오너들
입력 : 2013.07.15 09: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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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업들은 오너 일가의 등기이사 사퇴와 관련해 ‘전문경영인 체제의 확산’을 위해서라고 답하고 있지만, 재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강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 바람에 대한 선제적 대응책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최근 ‘갑의 횡포’ 논란으로 촉발된 반기업 정서 역시 오너 일가들의 등기이사 사퇴 추세를 부채질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법적 책임지는 등기이사직 가장 먼저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재벌가 오너는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다. 최 회장은 지난해 말 그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그룹을 대표하는 권한을 내놓았다. 대신 전문경영인인 김창근 부회장이 의장을 맡았으며, 최 회장은 포트폴리오 혁신과 글로벌 경영에 매진한다고 밝혔다.
뒤이어 지난 2월 중순에는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이 ㈜신세계와 이마트의 등기이사직을 내놓았다. 정 부회장은 대신 그룹 부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했다.
신세계그룹은 “정 부회장의 등기이사 사퇴는 2011년 신세계와 이마트의 기업분할에 따라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며 “올해 3년의 등기이사 임기가 끝나 물러나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향후 각 계열사는 전문경영인의 책임경영 체제로 운영되며, 정 부회장은 신사업 및 해외사업 진출 등 규모가 큰 의사결정과 대주주로서의 권한을 행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 역시 3월 진행된 정기주총에서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을 사임했다. 신 회장이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것은 7년 만이다. 이에 따라 롯데쇼핑은 당초 ‘4인 대표체제’에서 신격호 총괄회장, 이인원 정책본부 부회장, 신헌 사장 등 ‘3인 대표체제’로 재편됐다. 신 회장은 임기 2년의 등기 임원으로 재선임 됐다.
롯데그룹은 “신 회장의 롯데쇼핑 대표이사직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면서 “롯데쇼핑 대표에서 물러났지만 롯데케미칼과 롯데제과 등 다른 계열사의 대표와 롯데쇼핑의 신사업과 해외사업도 그대로 맡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노조와의 갈등으로 국회 청문회까지 섰던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 역시 지난 3월 29일 대표이사직(등기이사는 유지)을 내려놨다.
재계서열 1위의 삼성그룹 역시 이 같은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등기이사직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예상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올해에도 비등기 이사로 남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자제 중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린 이는 첫째딸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유일하다. 이건희 회장 역시 과거 삼성전자 사내이사에서 물러난 뒤 현재까지 등기이사직을 맡지 않고 있다.
반면 등기이사직을 유지하거나 직을 더 맡은 재벌가 오너들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현대차그룹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현대차, 현대제철, 현대모비스, 현대건설 등 그룹 내 주요 6개사의 이사를 겸하고 있다.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 역시 현대차를 포함해 현대모비스, 기아차, 현대제철, 현대오토에버 등 6개사의 등기임원이다. 현대차그룹은 이에 대해 “오너 일가의 책임경영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GS그룹 역시 허창수 회장이 사내이사를 맡고 있으며, CJ그룹 이재현, 코오롱그룹 이웅열 회장, LS그룹 구자엽 LS전선 회장 역시 주력계열사들의 사내이사로 등기부등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대기업들은 대부분 주식회사로 설립되는데 이때 구성되는 3곳의 기관이 있다. 바로 주주총회와 이사회, 그리고 감사위원회다.
이 중 ‘주주총회’는 주식회사의 근간이 되는 주식을 부여받는 대신 투자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해당 회사의 가치를 앞서 내다보고 투자를 결정하는 투자자들의 모임이다. ‘이사회’는 주주총회의 소집과 대표이사의 선임권을 행사하며 장단기 사업계획 수립을 비롯해 국내외 주요 투자, 채용, 임원 인사 등 회사의 경영전반을 결정하는 기구다. ‘감사위원회’는 바로 이사회가 제대로 일하고 있는지를 감사하는 기구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등기이사의 중요성은 바로 이 부분에서 갈린다. 주식회사에는 등기이사와 미등기이사가 있는데, 이 중 회사의 주요 경영 사안에 대해 결정하는 이사회에 참석할 수 있는 이는 바로 등기이사만 가능하다. 등기이사는 이처럼 많은 권한을 갖게 되는 만큼 이에 대한 법적인 책임도 지게 된다. 이 때문에 그동안 정부에서는 재벌가 오너 일가들에게 등기이사직을 겸임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경영 사안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지는 만큼 재계가 강조하는 ‘책임경영’이 이뤄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대기업들은 대부분 “전문경영인 체제 확립과 이에 따른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입을 모은다. 오너 일가는 대주주로서 견제와 감시의 기능을 맡고,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겠다는 의미다.
재계에서는 그러나 오너 일가의 등기이사직 사퇴에 대해 “정부의 경제민주화 방침에 따라 논란이 될 수 있는 계열사의 대표이사직을 물러남으로 법적인 책임을 피하려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다.
실제 최근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오너 일가들은 계열사 부당지원 및 검찰의 조사를 받았던 곳에 집중됐다. 가장 먼저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부터 ‘비자금 수사’로 인해 재판을 받고 있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역시 계열사 부당지원으로 인해 회사가 조사를 받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 역시 지난해 국정감사에 불출석했다가 약식 기소됐다. 조남호 회장의 처지 역시 비슷하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정책 변화가 오너 일가들의 등기이사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가 그동안 책임경영을 강조하며 대기업 오너들에게 등기이사를 맡도록 독려해 왔지만, 최근 경제민주화 정책에 따라 대기업 오너 일가들의 법적인 부담이 커졌다는 것. 여기에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인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까지 도입되면 법적인 책임을 저야 하는 등기이사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지기 때문에 오너 일가들이 이런 부담을 피하기 위해 등기이사직을 내려놓고 있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실제 정용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의 등기이사직 사퇴는 최근 불거진 계열사 부당지원에 따른 검찰의 조사를 피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오너 일가가 먼저 경영능력 갖춰야 그렇다면 대기업 오너 일가들은 앞서 밝힌 것처럼 대주주로서의 ‘견제와 감시’에 치중하며 전문경영인에 그룹 경영을 모두 맡길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대부분 회의적인 시각이다. 참여연대 관계자는 “국내 대기업들의 경우 오너 일가의 ‘제왕적 경영’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단순히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오너 일가의 강력한 회사 지배력이 훼손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대기업 계열의 경제연구소 관계자 역시 비슷한 반응이다. 이 연구원은 “전문경영인에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경영을 맡긴다고 하지만 전문경영인의 인사권을 이사회가 쥐고 있고, 이사회에 오너 일가들이 포진해 있다면 전문경영인은 오너 일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전문경영인을 내세워 대리 경영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서는 ‘오너 일가의 전문화’를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대기업 오너 일가들이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전문성을 가져야 등기이사직을 맡는 것은 물론 회사의 발전에도 이바지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 관계자는 “오너 일가들이 여러 계열사의 등기이사를 맡는 것보다는 자신의 경영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계열사의 등기이사를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얘기했다. 오너 일가가 그룹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전문 분야가 아닌 계열사까지 등기이사를 맡는다는 것은 결국 회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서는 한동안 오너 일가들의 등기이사 사퇴 바람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하고 정치권이 이에 대해 동조하고 있는 만큼, 법적인 책임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오너 일가들이 등기이사직에서 사임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서종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4호(2013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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