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식물원은 글로벌 종자전쟁의 보루…이택주 한택식물원 원장

    입력 : 2013.06.07 14: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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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쟁이라고 들어봤나. 지구상엔 자생식물이 22만종이나 된다. 우리나라엔 3500여종이 있다. 먹거리도 거기서 나오고 관상가치가 있는 것도 있고, 병들었을 때 고치는 약도 70%는 식물에서 나온다. 그 종자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식물원이다. 식물자원은 인류의 자산이기도 한데 그걸 확보해서 보여주는 곳이 식물원이다.” 국내 최대의 민간 식물원을 세워 운영하고 있는 이택주 한택식물원 원장은 이제라도 식물자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식물원은 단순히 식물들을 모아 놓고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인류의 자산인 종자를 보관하고 있는 보물창고인 만큼 정부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영국의 ‘로열 보태닉 가든 큐’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식물원들이 100여 년 전부터 전 세계 식물종 확보에 노력해왔다고 소개했다.

    “지금 (한택식물원은) 1만종 정도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최대이고 아마 동양에서도 그럴 것이다. 식물원을 처음 시작한 영국은 현재 4만5000여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독일이 5만여종, 미국은 6만여종의 식물을 보유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런 종자들이 국민의 먹거리이자 종자전쟁에 대비한 중요한 자산이지만 한국에선 정부 당국자들조차 무식할 정도로 중요성을 모른다고 지적했다.

    “(꽃이나 나무에서) 꽃가루가 날리고 낙엽이 지고 하는데 이게 다 유기물이다. 유기물은 미생물이 먹고 산다. 그 미생물이 땅을 부식시키는데 그렇게 부식이 되면 (땅은) 옥토가 된다. 그 땅에 식물 씨가 떨어져 잘 자란다. 지상의 모든 동물은 그걸 먹고 산다. 그러니 자연보호의 첫째는 식물을 잘 가꾸는 것이다. 다양한 동물이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먹고 살면서 다양한 먹이사슬을 형성하기에 식물을 잘 가꿔야 한다. 그런데 농림부 장관에게 농업이 무어냐고 물으면 답변을 못한다. 농업은 식물을 잘 키우는 것이다. 닭이나 돼지를 키운다지만 (그 종자는) 다 외국서 사온 것이다. 소는 농약 묻은 짚만 먹이고 나머지(사료)는 외국서 들여온다. 아무 대책도 없이 농업을 어떻게 하냐. 식물을 모르니 막막하다.”

    이 원장은 식물을 제대로 알고 정책을 만들면 농업을 고소득 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식물원이 농업에도 기여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 좋은 게 들어오면 2년 후엔 어김없이 시중에 나온다. 사람들이 와서 보고 장사에 적용한다. 그런 것을 선도하는 것도 식물원 역할의 하나다. 인구밀도 세계 3위인 네덜란드는 농업으로 우리보다 국민소득이 배가 넘는다. 스위스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씨앗의 상당부분을 외국서 들여오고 있다. 그건 외국의 농업식민지다. 이 분야에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하는 데 언론도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면서 국민에게 식물자원의 중요성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루 빨리 식물원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법을 만들자고 해도 무지한 당국자들의 제 몫 챙기기 때문에 그것마저 쉽지 않다고 비판했다.

    “법을 만들려고 하니 산림청이 반대해서 안됐다. 그래서 산림청을 설득해 (산림청 주도로) 만들려니 이번엔 환경부가 반대해 수목원법으로 제정했다. 이후 환경부가 동식물원법을 만들려고 하니 이번엔 산림청이 또 반대해 아직도 법이 없다.”

    그는 외국에선 어린이부터 교육을 시켜 농업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 대책도 없다며 당국자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유럽이나 미국에선 국가가 청소년 (농업) 교육을 열심히 한다. 왜 그런지 아나. 식물을 가꾸는 게 농업이다. 그런데 농업은 육체적 고통이 따르니 누구도 선뜻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10만명 열심히 가르치면 그중 몇 명 정도가 그 가치를 알고 농사일을 한다. 선진국은 그렇게라도 후계자를 기르려고 열심히 교육을 하고 있다. 칠레에선 독일인 강사를 초청해서 청소년 교육을 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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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음의 꿈으로 시작한 식물원 이 원장은 동국대 대학원에서 도시행정을 전공했다. 그런 그가 식물원을 연 계기가 궁금했다.

    “1979년부터 식물원을 시작했으니 34년이 됐다. 원래 토목과 도시설계를 하다가 이쪽으로 돌아섰다. (내가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60년대엔 어려웠다. 이후 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바빠졌다. 새벽 5시에 나가서 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때 젊은이들의 꿈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는 거였다. 당시만 해도 도시엔 사람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농촌에 살 때였다.

    (시골 출신들은) 고향에 가서 초지를 조성하고 소를 키우는 게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남진의 노래도 있지 않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하는. 그런 거였다. 나도 어렵게 돈을 벌어 고향에 20만평을 사들여 초지를 조성했고 서원에 숙소도 지었다.(한택식물원은 동원 서원으로 나뉘는데 현재 동원만 공개하고 있다) 젖소를 사고 한우도 150만원씩 주고 100여 마리를 사다 키웠다. 그런데 3년 기르고 나니 소값이 90만원으로 떨어졌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서 소는 장조카에게 주고 나무를 사다 심었다. 조경수를 심었는데 자꾸 죽기에 전문가에게 물어서 했더니 더 죽더라. 그래서 유럽은 어떤가 보려고 배낭 메고 떠났다. 영국을 위시해 유럽을 돌아보니 식물원이 잘 돼 있었다.

    돌아와서 조사해보니 UN에 가입한 국가 중 식물원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었다. 북한도 2개나 있었는데…. 사회주의 국가는 대개 정부에서 그런 걸 했다. 그래서 내가 하겠다고 나섰는데 쉽지가 않았다.”

    전국 누비며 수집한 식물들 어쨌든 이 원장은 작정을 하고 식물원 만들기에 나섰다. 그런데 처음부터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돈도 많이 들어갔지만 한때는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도 없어 우울증까지 걸렸다고 했다. 그러다가 CITES(멸종위기 동식물 국제거래에 관한 협약) 가입 후 붐이 일어난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외국 식물은 돈을 주면 살 수 있는데 국내 식물은 아무리 돈을 주더라도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79년부터 주 2회씩 (식물을) 찾으러 다녔다. 제일 힘든 게 우리나라 식물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992년에 생물종다양성협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도 가입했는데 자기 나라에 자생하는 생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멸종되면 인류와 후세에 죄가 되니 제대로 관리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 추세를 미리 알아서 야생화를 연구해 책을 냈는데 그게 한국에도 알려져 80년대 말부터 야생화 붐이 일어났다. 당시 한택식물원에 야생화가 많다는 얘기가 퍼지니 언론에서도 많이 찾아 왔고 그 때문에 꽤 유명해졌다. 그렇지만 사실 그때는 하도 힘들어 그만두려 했을 때였다. 그런데 남들이 잘났다고 하니 진짜 잘난 줄 알았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부인은 반대를 하지 않았는데 그게 도와준 것이라고 했다.

    “집에선 크게 도와주지는 않았으나 반대도 하지 않았다. 내가 (토목 설계를 할 당시) 고생한 것을 알고 있는 데다 먹고 살 것이 돼서 고향에 내려왔으니 반대도 안 했다. 그게 도와준 것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한택식물원의 가치 대부분의 외국 식물원은 국가나 대기업이 주도해 운영하고 있다. 그만큼 여러 사람들이 나서서 식물종을 수집하고 관리한다. 그러나 한택식물원의 종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 원장이 직접 수집하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살려서 심은 것들이다. 그만큼 이 원장은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내가) 야생화를 수집한 것은 전 세계 누구도 못한 것이다. 학자들은 가서 사진만 찍고 온다. 그런데 나는 직접 캐서 가지고 왔다. 그래서 나는 각각의 식물의 생태를 잘 알고 있다. 어느 곳,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지를 잘 알기에 거기에 맞춰서 심어준다. 다른 식물원에선 종별로 구분해서 심어놓고 있는데 여기선 (여러 종류의 식물이) 혼식이 돼 있다. 자연에서 배웠다.”

    실제 한택식물원을 거닐다보면 그늘진 곳엔 곰취나 고사리 고비 족도리풀 등이 함께 나고 햇볕이 잘 드는 모란이나 작약 양귀비 등이 함께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백두산을 비롯한 북한 지역에서 많이 자생하는 삼지구엽초도 여러 종이 보인다.

    “북한 식물은 직접 가서 수집해올 수도 없고 해서 중국에 가서 얻어왔다. 90년대 초 북경식물원과 상호교류협약을 체결했다. 처음엔 잘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칭화대 기숙사에서 사흘간 머물면서 설득하니 그때서야 친하게 됐다. 한번 친해지자 그 뒤론 아주 협조를 잘 해준다. 요령성에 갔을 때는 임업국장이 직접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중국 남쪽은 아열대기후 지역이라 우리와 맞지 않고 북부만이 탐사 대상이었다. 매년 중국에서 20여일씩 머물면서 생태 탐사를 했다. 그게 생태에 대한 교육이 됐고 그게 지식이다.”

    이렇게 발품을 팔아 얻은 살아있는 지식은 한택식물원이 세계적으로 독특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국내 희귀종을 복원하는 데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환경부에서 희귀멸종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돼 울릉도 고추냉이 자생지를 복원해줬고 설악산 솜다리 등을 다시 심어주기도 했다. 울릉도 고추냉이는 거기 밖에는 안 사는데 울릉도가 유원지 만든다고 훼손했다. 고추냉이 자생지를 복원하는 일은 기자협회에서 경비를 지원해서 할 수 있었다. 기자들이 나서서 하니 환경부도 어쩔 수 없었는지 따라왔고 지금은 환경부가 지원을 해주고 있다. 그때 기자들이 함께 간다니 해군이 군함까지 내줘 묵호에서 울릉도까지 갔다. 기자들이 가니 환경부도 따라갔고 결국 법도 만들었다.”

    이 원장은 전국의 식물을 수집하는 데는 일제 때부터 식물 연구를 해온 선구자들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대한식물도감 지은 이창복 선생이나 한국식물도감을 지은 이영노 선생 같은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지금 한국에서 나온 식물에 관한 책은 이 분들 책을 베껴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이영노 선생은 나보다 22세나 많은데도 친구처럼 지냈다. 그 분이 어느 식물이 어디에 있다고 가르쳐줘 찾아가면 거기에 있었다. 유달영 선생으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을 역임했고 국내 원예학을 창조한 분인데 그 분이 식물원 만드는 게 평생 꿈이었는데 내가 대신 한다니 고맙다며 수시로 찾아와 도와줬다.”

    그렇게 수집한 식물 중 특히 애착이 가는 게 뭐냐고 물었다.

    “다 애착이 간다. 그중에 좋아하는 것을 굳이 찾으라면 아마도 깽깽이풀일 것 같다. 법정보호식물이었는데 내가 번식해서 퍼져 올해 해지됐다. 어느 계곡에 가서 보니 깽깽이풀이 일직선으로 나 있었고 또 어느 곳엔 무더기로 나 있었다. 일직선으로 난 곳은 사람이 줄을 치고 심어도 어려울 만큼 똑바르게 나 있었다. 보라색 꽃이 하도 예뻐서 누가 이 산속에 심어놓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조사해 보니 종자에 꿀선이 있어서 개미들이 물고 가다가 흘려서 그렇게 났다. 개미들이 줄을 지어 가다보니 그 자리에 직선으로 꽃이 자란 것이다.”

    스웨덴 린네 가든이 인정한 곳 그가 피땀으로 일군 한택식물원은 지금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3년 전 스웨덴 린네 가든의 식물원 전시를 여기서 했다. 칼 폰 린네는 식물을 최초로 분류한 사람이다. 스웨덴의 린네 식물원이 린네 탄신 300주년 기념행사를 전 세계에서 다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하지 못했다며 여기서 하자고 해서 전시를 했다. 그런데 전시가 끝나자 린네 가든 관계자들이 한국에 이렇게 훌륭한 식물원이 있는 줄 몰랐다며 웁살라 대학으로 초청을 했다. 그래서 가니 린네 가든과 한택식물원의 MOU를 체결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그러면서 웁살라 대학 식물원 운영위원장이 자기네는 300년이 됐고 한택식물원은 30년 밖에 안됐는데 당신이 더 잘했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직접 식물을 캐다 심어서 식물의 습성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문구를 수정해야 하니 MOU 체결을 하루만 미루자고 했다. 그래서 뭐를 수정하느냐고 물으니 ‘경험에 의한 기술도 교류하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다.”

    당시 MOU엔 한택식물원에 린네 가든을 만들고 또 린네 가든엔 코리안 가든을 만드는 내용이 들어갔다. 그런데 이후 유럽위기로 무산됐다. 서구의 식물원은 국가나 기업들의 지원으로 운영되는데 한택식물원에 린네 가든을 설치해주기로 한 볼보가 다른 회사에 팔려나가는 바람에 약정이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어쨌든 한택식물원은 스웨덴 린네 가든 외에도 중국의 북경식물원, 호주의 시드니 로열 보태니컬 가든 등과 교류하며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어렵게 식물 수집하고 있는데 정부 도움은커녕… 그에게 어려움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지금도 식물을 수집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정부가 협조를 하지 않는다. 식물검역소란 곳에서 통관을 안 시켜주고 태워버리기도 한다. 외국은 식물원서 도입하는 것이라면 검역도 하지 않고 통관시킨다. 무식해서 그렇다. 정부가 도와주지는 않고 방해한다.”

    병충해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하자 이 원장은 실제로 중요한 병충해엔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산더미처럼 들여오는 사료 전체를 검역한 적이 있는가. 밀은 또 어떤가. 그 사료와 밀을 통해 병충해가 퍼져나가고 있다. 그런 것은 검역도 못하면서 종을 확보하려고 소량을 도입하는 것은 검역한다고 난리다. 여기 심어놓고 검역하면 되는데도 그러질 않는다. 네덜란드에선 화분째 가져간다. 흙째 떠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검역 한다면서 한 달 이상 걸리니 통관이 되더라도 제대로 살지 못한다. 산림청과 환경부가 싸우고 있으니 제대로 되지 않는다.”

    전 재산 털어 일군 식물원 이 원장은 한택식물원을 영원히 식물원으로 유지하려고 지난 2001년 재단을 만들었다. 누가 후계를 맡더라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엄청난 수익을 내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좋은 사업’ 한다고 한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소리다. 이곳에 수백억 원이 들어갔다. 그동안 부동산을 팔아서 조달했다. 이제는 팔아먹을 땅도 없다. 그런데도 은행금리는 고사하고 직원들 월급 줄 것도 안 나온다. 나무 팔고 딴짓 해서 겨우 유지하고 있다. 요즘엔 어느 정도 관객이 있으나 겨울엔 사람도 안 온다. 그러니 유지 자체가 쉽지 않다. 북경식물원은 규모는 우리보다 훨씬 작은데 직원은 680명이나 된다. 우리는 직원 40여명으로 꾸려가야 한다. 식물원법을 제정하면 법률적으로 지원이 가능할 것이다. 다만 재단을 만든 뒤 KT서 어린이 정원 만드는 것을 도와줬고 현대카드서 극장의 오디오와 조명시설을 도와줬다.”

    아울러 자원봉사자들의 도움도 기대한다고 했다.

    “외국의 식물원은 국가나 대기업이 한다. 미국 롱우드가든의 경우 듀퐁이 만들었는데 환경운동가들이 와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거기 가서 보니 노인이 티켓을 발급하고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자원봉사자였다. 한국의 환경운동가들은 정부에 대고 소리나 지르지…. 한국에도 지원봉사 문화가 생겨야 한다.”

    반평생과 온 재산을 들였지만 이 원장은 “그래도 보람은 있다”고 했다. “이런 것 만들어서 남겨 놓았으니…. 그리고 나이 칠십 돼서도 할 일이 있으니 좋지 않나. 대기업 다니던 친구들은 돈은 많으나 병 걸려 눕기도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아직도 할 일이 있으니 이제는 그들이 나를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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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택주 원장과 한택식물원 이 원장은 “아침 6시 50분에 나와서 해질녘에 들어간다”고 할 정도로 지금도 정열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1941년생으로 동국대 대학원에서 도시행정학을 전공했다. 각 대학에서 강의 요청이 쇄도하나 시간 때문에 외부 강연은 사절하고 대신 식물원으로 찾아오면 강의를 해 준다.

    1979년 식물원 서원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1983년 마스터플랜을 세워 동원을 개발했다. 이후로도 계속 식물을 수집하며 투자를 계속했고 2002년 산림청에 수목원으로 등록한 뒤 2003년에야 정식으로 개장했다. 사계정원 자연생태원 약용식물원 희귀식물원 수생식물원 등 36개 테마정원이 있다. 생물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데 여러 식물의 상호작용으로 병충해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 원장은 “산채들은 일반 채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양가가 높다”며 농민들이 이런 것을 재배해 팔면 도움이 될 것이지만 그 얘기를 하자면 1시간을 더 해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3호(2013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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