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스타 CEO]⑦ 쭝칭허우 와하하그룹 회장…시골 구석구석 거미줄 공급망 코카콜라도 우리 두려워하죠

    입력 : 2013.02.04 14:31:11

  • 사진설명
    중국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기업가 쭝칭허우(宗慶後·67) 와하하(娃哈哈)그룹 회장은 영락없는 중국 부자였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티를 내지 않는 전형적인 중국 부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난해 연말 쭝 회장과 인터뷰를 갖기 위해 베이징 시내 한 호텔 방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그의 소탈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장성 항저우에 집과 본사를 두고 있는 그가 묵고 있는 호텔은 5성급이긴 했지만 ‘럭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반 객실을 하나 더 붙여 집무실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간소한 스위트룸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도 ‘명품’과는 차이가 컸다. 평범한 중국산 바지와 점퍼, 소박한 줄무늬 와이셔츠가 전부였다. 인터뷰가 편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책상에서 자신의 의자를 직접 빼내 기자에 바짝 다가 앉는 모습이나 인터뷰 중간 중간 스스럼없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중국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라오반(老板·사장 혹은 주인)’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가 과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보다도 많은 158억달러(16조8000억원) 재산을 보유한 부자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였다.

    미국 블룸버그 뉴스는 그의 재산을 세계 46위로 평가하고 있다. 의문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조금씩 풀렸다. 그는 사업에서 대성공을 거두고 부자가 되기는 했지만 뼛속에는 여전히 어려웠던 시절의 유전자(DNA)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잊지 않고 지금껏 삶의 교훈으로 삼고 있는 그는 진정 중국인들이 존경하는 민영 기업가다웠다.

    사진설명
    중졸에 웬만한 고생은 다 해봐 고생을 몰라요 쭝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호강을 모르는 아이였다. 집이 가난해 중학교 밖에 다니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15년간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서 정말 고생이 많은 시절이었다. 그는 “지금 살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고생을 전혀 모른다”며 “이는 당시에 너무나 많이 고생한 탓에 웬만한 고생은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생을 견디는 습관을 길렀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큰 자산이 됐다”고 그는 덧붙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가족 생계에 보탬을 주기 위해 농장과 차밭 등을 오가며 힘든 노역을 했다. 그러나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30대에 접어들어서는 시골에서 벗어나 저장성 주요 도시에서 세일즈맨으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젊은 시절을 그럭저럭 보내던 그가 사업에 손을 댄 것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탄 덕분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개혁개방이 1980년대 후반부터 꽃을 피기 시작하면서 그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쭝 회장은 “젊은 시절 뭔가 내 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국유화 정책이 중심이던 때여서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개혁개방이 진전되면서 합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나에겐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 주석의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잇단 실패 여파로 경제적으로 물품이 부족한 시대였다. 그만큼 창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다. 그는 “돈이 없어서 맨손으로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는데 그게 바로 막대 아이스크림 사업이었다”고 말했다. 마흔 살을 훌쩍 넘긴 1987년, 42세 때였다. 그가 친구 2명과 함께 은행에서 대출받은 14만위안이 종잣돈이었다. 쭝 회장은 “아이스크림을 집집마다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하다 보니 이윤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업 첫해 10만위안을 벌었다”고 말했다. 사업에 대한 재질을 스스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는 “주변에서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기껏해야 연간 5000위안 정도 벌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일찌감치 사업가로서 두각을 나타냈었던 셈이다.

    사진설명
    웃음 소리 ‘와하하’ 당시 유행하던 동요 제목 그는 사업 2년차에 접어들어 건강식품 분야로 영역을 확대했다. 당시는 자녀들의 편식과 영양 부족 등 문제로 인해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막 높아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쭝 회장은 식품분야 최고 전문가를 초빙해 어린이용 건강 영양액을 개발했다. 어린이 식욕 회복과 성장에 도움을 주는 식품이었다. 그는 “중의학 원리에 따라 만든 건강식품이었는데 기술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국가과학기술 2등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출시 첫해 490만위안의 매출을 올리더니 이듬해는 매출이 2700만위안으로 껑충 뛰었다.

    매출이 쑥쑥 늘어나면서 그는 어린이용 식품의 장래에 눈을 떴다. 본격적으로 어린이용 음료를 개발해 팔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쭝 회장은 1989년 항저우에 공장을 세우고 ‘와하하(娃哈哈·어린아이가 하하하고 웃는다는 뜻)’라는 브랜드로 어린이용 음료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와하하는 당시 유행하던 동요 제목이었다. 한국의 산토끼처럼 중국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그런 동요다. 그는 “와하하라는 이름이 친숙하고 좋아서인지 출시하자마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판매가 잘됐다”고 말했다. 쭝 회장은 고민 끝에 인근에 있는 국유기업 한 곳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통조림 공장을 800만위안에 사들인 그는 종업원 2000명까지 동시에 인수하는 결단을 내렸다. 당시만 해도 공장과 종업원을 동시에 인수한다는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인수합병(M&A) 사례였다. 그는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를 잡아먹었다고 떠들썩했다”고 말했다. “자본주의가 국유기업을 망친다”는 비난도 감내해야 했다. 워낙 대규모 공장을 인수한 탓에 가동률을 높이기 위해 새 제품을 출시해야 했다. 이때 그가 고안해낸 제품이 바로 과즙우유다. 우유가 어린이들 건강에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지만 당시만 해도 어린이들은 우유 맛에 익숙하지 않았다. 여기에 달콤한 과즙을 첨가해 어린이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공장을 인수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흑자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와하하그룹은 이후 승승장구했다. 내놓는 제품마다 히트를 번갈아 치면서 중국 최대 음료회사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가기 시작했다. 시장을 미리 내다보는 쭝 회장의 혜안이 결정적인 성공 요인이었다.

    건강식품 등 150가지 제품 매출 679억위안 지금 와하하그룹은 유산균 음료와 생수, 탄산음료, 차음료, 주스, 통조림, 건강식품, 유아분유, 아동복 등 10가지 분야에서 150개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중국 29개 성과 시, 자치구에 있는 생산기지가 무려 66곳에 달한다. 자회사는 170개, 전체 직원 수는 3만명에 달한다. 지난 2011년 기준으로 679억위안(11조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남다른 제품 공급 전략도 와하하그룹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 전역을 커버할 수 있는 탄탄한 공급망이 바로 그것이다.

    와하하는 각 성에 있는 자회사가 6000여개 1차 대리점에 제품을 직접 공급하면 이어 1차 대리점이 3~4만개 2차 대리점과 소매상에 공급하는 수직구조로 공급망을 운영하고 있다. 중국 전역에 깔린 판매 네트워크가 100만개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방식으로 시골 오지까지도 와하하 제품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대리점으로부터 미리 보증금을 받은 뒤 은행 금리보다 높게 이자를 쳐서 상품을 공급하고 연말에 판매수익의 일부를 나눠주는 방식으로 대리점들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대리점들은 와하하 제품을 많이 팔수록 이익이 커지기 때문에 영업에 열심히 나설 수밖에 없다.

    와하하그룹을 전국적으로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8년 글로벌 브랜드 코카콜라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였다. 와하하가 코카콜라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해 중국산 콜라인 ‘페이창콜라’를 출시한 것. 시골 구석구석까지 뻗어 있는 판매망을 통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구사하면서 코카콜라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출시 3년 만에 판매량이 코카콜라의 30% 수준까지 늘어났다. 지금도 코카와 펩시에 이어 당당하게 중국 내 콜라 판매 순위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백화점 바이오 등 신규 사업도 적극 나서 그의 꿈은 국민들한테 인정받는 기업인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일부 사람이 먼저 부자가 된 뒤 먼저 부자가 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줌으로써 최종적으로 모두가 부자가 돼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선부론(先富論)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의 꿈은 회사에서 먼저 실현되고 있다. 그는 “와하하그룹은 직원 모두가 자동차와 집, 회사 주식을 갖고 있어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모든 사람이 직원이면서 동시에 사장”이라고 힘줘 말했다.

    쭝 회장은 후계 수업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로 외동딸 쭝푸리(宗馥莉)를 지명했다. 와하하그룹은 신규 사업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아동복과 인쇄, 향료, 기계 등 분야에 다수 계열사를 두고 있다. 일찌감치 진출한 아동복 사업의 경우 벌써 체인점만 800개에 달한다. 요즘은 바이오 쪽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는 “중국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있어 건강하게 오래 살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며 “최신 바이오 기술을 적용한 건강식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에너지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 저탄소 녹색사회 도래를 앞두고 탄소 저감형 신에너지 사업이 대상이다. 이미 바이오와 에너지 관련 국내외 다수 연구소와 합작을 추진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자금 넉넉 상장할 계획 아직 없어 그는 중국이 그동안의 수출 주도형 경제에서 소비형 경제로 전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소매업 분야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미 지난해 항저우에 첫 번째 쇼핑몰을 열었다. 올해는 10개 정도 쇼핑몰을 추가로 확장하고, 3~5년 내 100개를 추가 오픈할 계획이다. 그는 “쇼핑과 엔터테인먼트를 함께 즐길 수 있는 복합 오락 쇼핑몰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쭝 회장은 카리스마가 강한 경영자다. 회사 내에 2인자를 두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와하하그룹에는 부사장이 없다. 생산과 판매 등 주요 분야 관리는 담당 부장이 담당할 뿐이다. 작은 부품을 하나 구매할 때도 쭝 회장의 사인을 직접 받아야 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가 독재적인 경영자는 아니다.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원들과 함께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직원들의 이직률이 낮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와하하그룹이 아직 증시에 상장하지 않은 것도 이색적이다. 그는 “예금이 많아 돈을 외부에서 조달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상장할 계획이 아직 없다”고 말했다. 만약 회사가 상장되면 그의 재산은 지금보다도 훨씬 많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아시아 최고 부자인 리자청(李嘉誠) 홍콩 창장그룹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으로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창업을 하려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에 그는 인내심과 창의성을 강조했다. 쭝 회장은 “과거에는 물품이 부족하던 시기였던 반면 지금은 과잉생산의 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과거에 비해 창업이 어렵다”며 “그래서 창신(창의와 혁신)이 더욱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이들의 성급함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성공한 사람의 결과만 보고 창업의 과정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며 “인내심이 없으면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9호(2013년 02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