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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x]조세피난처 검은 돈 드러날까
입력 : 2012.08.06 1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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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국내거주자이면서도 싱가포르를 드나들며 비거주자로 위장한 최 모씨는 조세피난처인 라부안에 위장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실질적으로 자기 소유의 국내 회사인 C사를 우회 지배했다. 최씨는 페이퍼컴퍼니 C사가 보유했던 주식을 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넘긴 뒤 다시 정상가로 매각해 150만달러를 챙겼다.
역외탈세가 지능화·고도화되면서 ‘쫓는 자(국세청)’와 ‘쫓기는 자(탈세자)’의 세금 전쟁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브로커를 이용해 현지에서 돈을 주고받는 ‘환치기’ 같은 낡은 방식은 최근 단수가 높아진 역외탈세 수법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해외로 빠지는 검은 돈
역외탈세의 명저로 평가받는 ‘보물섬’의 저자이자 저널리스트인 니콜라스 색슨은 바나나를 예로 들어 이 점을 설명했다. 온두라스에서 바나나를 생산해 영국에 팔아 연간 20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 있다고 하자. 이 회사는 세율이 낮은 룩셈부르크에 금융 자회사를 설립한다. 이후 온두라스의 바나나 생산 회사에 대출하고 연간 2000만달러의 이자를 부과한다. 그러면 온두라스의 바나나 회사는 이익을 전액 비용(이자 대금)으로 처리할 수 있다. 온두라스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반면 룩셈부르크의 금융 자회사가 거둔 소득은 매우 낮은 세율이 부과된다.
‘거주지’ 문제는 역외소득에 대한 세금 추징을 더욱 어렵게 하는 부분이다. 한국에 살면서 홍콩에 있는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에 대한 소득세는 한국과 홍콩 중 누가 매겨야 하는 걸까? 세법에서는 소득이 발생하는 곳을 ‘원천지국(홍콩)’, 세금 납부자가 사는 곳을 ‘거주지국(한국)’이라고 한다.
한국과 홍콩 두 곳에서 모두 소득세를 거둔다면 도저히 기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각국은 이런 이중과세를 피하기 위해 조세조약을 맺고 원천지국과 거주지국 중 누가 세금을 거둘지를 미리 정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세계적인 추세는 거주지국에 세금을 내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여기에는 허점이 있다. ‘거주지’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이 없는 데다 모호하다는 점이다. 탈세혐의자는 국내 체류일수를 조작하고 영주권 등을 동원해 국내 거주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여지가 있다. 물론 그는 세율이 낮은 홍콩, 싱가포르 등에 산다고 항변할 것이다. 최근 논란이 되는 선박왕 사건 등이 이런 유형이다.
더욱이 국가 간 금융·자본 이동은 자유로운 반면 납세정보에 대한 국세청 간 정보 교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보니 탈세자는 두 나라 모두에서 비거주자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중과세를 피하려다 이중 비과세를 부추기는 셈이다.
역외탈세의 창고 ‘조세피난처’
역외탈세를 계획한다면 빼돌린 돈을 보관할 창고가 있어야 한다. 탈세자 입장에서 보면 창고는 튼튼하고 창고지기는 입이 무거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역외탈세의 글로벌 창고가 바로 ‘조세피난처’다. 조세피난처는 말 그대로 전 세계의 역외탈세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세금이 아예 없거나 매우 적게 부과하는 나라나 지역을 말한다. 중남미 카리브해 도서나 태평양 연안 섬나라, 유럽의 작은 나라들에 집중적으로 분포돼 있다.
이 때문에 OECD를 비롯해 유엔, 국제통화기금(IMF) 등은 조세피난처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집중 감시하고 있다. OECD는 지금까지 38개국을 조세피난처로 지정했다. 바하마, 버진아일랜드, 모나코 등이 대표적이다.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위장 설립하고 차명계좌를 다단계로 활용하는 것은 기본이다. 한 술 더 떠 역외탈세자들은 대부분 조세피난처에 주소를 두고 국내 비거주자임을 내세우며 국세청의 화살을 피하고 있다. 국세청은 △실제 제품·서비스 거래 없이 해외 자회사로 돈을 빼돌리는 가공경비 △해외법인 손실을 위장한 뒤 이득을 챙기는 가공손실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주식 배당소득 착복 등을 대표적인 역외탈세 사례로 꼽는다. OECD 등은 조세피난처에 숨은 자금이 7조달러가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검은 돈의 종착지로 꼽히는 곳이 스위스다. 스위스는 1934년 계좌 비밀 보장을 법으로 제정한 이후 70여 년간 은행 비밀주의를 고수해 왔다. 이미 UBS와 크레디스위스 등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는 영화의 단골소재가 됐다. 국내에도 스위스 은행 계좌를 보유한 사람이 적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2월 스위스 국세청은 한국 거주자에 대한 배당세금이라며 58억원을 한국 국세청에 돌려줬다. 역으로 계산하면 최소 1조원이 스위스 은행 금고에 들어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역외탈세와의 전쟁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역외탈세자를 잡기 위한 국세청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국세청의 최우선 목표는 해외 정보 획득이다. 국내에서는 역외탈세자들의 정보 차단으로 사건 파악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한 회계사는 “역외탈세자들은 과세당국에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인 접촉을 자제하고 세무·회계법인 등도 해외법인을 이용한다”며 “심지어 해외법인에도 대리인을 내세우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등 정보 관리에 철저하다”고 밝혔다.
현지 정보 취득 방식에 대해선 국세청은 굳게 입을 다문다. ‘영업비밀’이 노출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처음 영수증이 필요 없는 특수활동비 20억원이 책정되면서 음성적인 정보에 접근이 가능해진 점은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역외탈세 차단과 관련해 가장 주목할 부분은 역외탈세 정보를 수집할 비밀 정예요원들을 별도로 선발해 일선 현장에 집중 배치했다는 점이다. 서울지방국세청 국제거래조사국 산하에 배치된 10여명 규모의 비밀 정예요원(해외세정연구관)들은 조세피난처, 한인 밀집 지역 등 해외 현지를 뛰어다니며 역외탈세 관련 정보를 광범위하게 수집·분석·조사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다만 국세청은 외교적 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는 업무 특성을 감안해 이들의 신상을 대내외에 전면 비공개로 운영하고 있다. 최고급 정보는 단연 스위스 등 해외 은행 관계자들이 빼돌리는 고객이나 계좌 정보다. 2009년에는 스위스처럼 베일에 싸인 것으로 유명한 리히텐슈타인 국영은행인 LGT의 전직 직원이 1만2000쪽에 달하는 고객 정보를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국 정부에 팔아 당시 도이체포스트 최고경영자(CEO) 등 유력 기업인들이 대거 체포되기도 했다.
역외탈세자와 국세청 간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적발 금액도 급증하고 있다. 역외탈세가 화두로 떠오른 2009년 1801억원(54건)에 불과하던 적발 실적은 지난해 9637억원(156건)으로 1조원을 육박했다.
빗장 열리는 스위스IMF
우리도 스위스와의 조세조약 개정에 성공했다. 이에 따라 7월 25일부터 국세청이 스위스 은행 계좌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름 없이 계좌번호만으로도 정보 조회가 가능해져 스위스 은행을 통해 탈세행각을 벌이는 부유층과 기업이 조사망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정보공개 요건에 예금자 이름이 포함될 경우 제도의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란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탈세자가 차명계좌를 이용했거나 조세피난처 등에 위치한 페이퍼컴퍼니 등의 계좌를 거쳐 스위스 은행에 입금했을 경우 사실상 예금주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정 조세조약은 계좌번호와 일치하는 인적사항 입증에 대한 내용이 빠져 이런 차명·연결 계좌를 상대적으로 쉽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됐다.
다만 스위스 비밀계좌를 국세청이 모두 들여다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우선 국세청은 탈세 목적으로 거래한 스위스 은행을 구체적으로 적시해야 한다. 또한 지난해 1월 1일 이후 금융정보만 요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스위스 은행계좌에 있었더라도 지난해 이전에 미리 돈을 뺐다면 관련 금융정보를 받아볼 수 없다. 거꾸로 2011년 이후 계속 유지되는 계좌라면 수십 년 전 계좌라도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전정홍 매일경제 경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3호(2012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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