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예인생 50년 왕실도자기 명장 박부원…수천 년 세월을 담은 신비의 달항아리

    입력 : 2012.07.09 16: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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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달항아리에는 수천 년 세월이 담겨 있다. 아니 수천만, 수억 년 전 우주가 만들어냈을 법한 신비가 아로새겨져 있다. 아! 이것이 정말 사람의 손에서 태어난 것일까. 남산 위로 솟아오른 둥근달 같은 매끈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달항아리만을 생각하고 찾아간 전시장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한 우윳빛이 감도는 백자 달항아리에는 달인지 화성인지 모를 어느 별의 분화구 같은 점들이 대지를 수놓고 있었다. 그 뒤 울진의 반구대를 뛰놀던 호랑이며 사슴이며 뭇짐승들이 새겨진 분청의 암각문 항아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비바람이 쪼고 칠팔월 햇빛이 구워서 그랬을까, 수천 년을 녹아내리다 스며들다 굳어져 그랬을까. 그것은 신석기 사람들의 혼이 담겼을 암각화 그 자체였다. 지난 5월 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왕실 도자 500년, 50년의 설레임’ 전(展)에 나온 왕실도자기 명장 박부원의 달항아리들은 많은 관객들의 발을 묶어 놓았다. 옮기던 발길을 되돌리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달항아리의 주인공을 만나러 광주로 갔다. 박 명장의 작업장 ‘도원요’는 광주에서 곤지암으로 가는 3번 국도변 양지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청자·백자 재현한 한국도자 1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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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명장은 자신을 도암 지순탁이나 해강 유근형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도자 1세대의 막내라고 소개했다. “1962년에 故 도암 지순탁 선생을 만나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리에서 도예를 시작했다. 먼저 청자를 재현했고 이어 조선백자와 분청도 재현해냈다. 얼마 전 50년 도예 인생을 정리하며 왕실 도자 50년, 50년의 설레임전(展)을 열었다.”

    그가 도예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동기는 없다. 나는 전북 김제에서 태어났다. 쌀이 많이 나고 금이 많이 나고 해산물이 풍부한 곳이다. 예부터 김제 만경에 흉년이 들면 나라가 굶는다고 했을 만큼 풍요로운 곳이다. 그런데 중학교를 다니다 공부를 더 해 꿈을 이루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올라와선 고학을 했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 그런데 전혀 그 꿈과 관계없는 것에 매료돼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어느 날 인사동을 거닐면서 도자기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사발을 뒤집어 진열해 놓은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사발의 발이 옛날 짚신을 오래 신어서 닳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 분이 만들었을까 수소문 끝에 지순탁 선생을 만나게 됐고 한 순간에 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오래전부터 신의 섭리로 도자기를 만들게 된 것 같다. 사실 우리 집안은 도자기와 전혀 관계가 없다. 그때만 해도 도공을 하대해 불렀는데 그릇 하나 때문에 내 일생이 결정됐다. 나이 스물넷이었다.”

    지순탁 선생이 쉽게 받아들였을까.

    “그때만 해도 도자기 하는 사람이 없어서 쉽게 할 수 있었다. 집에선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을 만큼 도자기가 어려울 때였다. 1962년은 GNP가 400달러가 안됐으니 도자기라면 골동품만 겨우 거래될 때였다. 그때 강원도 산골로 갔다. 뭣에 단단히 씐 것처럼 끌려갔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고 한겨울엔 손에 동상이 걸려 고생도 했지만 그게 그리도 좋았다.”

    박 명장은 이어 자신이 왜 도자 1세대인지를 설명했다.

    “해방 후 조선 백자를 계승하자며 1955년 성북동 가마(한국조형문화연구소)가 세워졌으나 바로 문을 닫았다. 이듬해 조각가 윤효중 씨가 고려청자를 재현하자며 대방동 가마(한국미술품연구소)를 세워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시기라 사회적 공감대를 얻지 못해 결실을 보지 못하고 1958년 문을 닫았다. 대방동 가마를 지순탁 선생이 지휘했는데 해강 유근형 선생은 거기서 조각을 했다. 이후 해강은 청자를 재현했고 도암은 청자와 백자 분청을 재현해냈다.”

    대방동 가마 출신들이 한국 현대도자기의 문을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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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명장은 지순탁 선생과 함께 홍천에서 요강 만들던 가마를 수리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또 재현작업을 함께 했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 도자 1세대의 막내란 것이다. “처음엔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청자 재현작업부터 시작했고 이어 백자와 분청을 했다. 스님들이 재로 옷감에 물을 들이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재로 유약 만드는 실험을 수없이 했다. 강원도로 간 것은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 구하기가 쉬웠고 옛날 왕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양구 방산의 도석을 가져다 쓰기에도 좋았기 때문이다. 군사보호구역 안에 있어서 마음대로 도석 채취를 못할 때인데 당시 3군단장을 하던 최석 장군의 소개로 조금씩 얻어다 작업을 했다.”

    2년 후인 1964년 박 명장은 도암과 함께 이천 수광리로 나왔다. 그런데 1965년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한국 도자기와 인삼을 좋아했는데 특히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적어 수요가 넘쳤다.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박 명장은 이천에서 12년을 도암과 함께 도자기를 만들다 1974년 독립했고 이듬해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1974년 동아대에서 가마를 만든다기에 함께 갔는데 마침 문세광 사건이 터졌다. 내친 김에 독립했고 이듬해 왕실도자기의 역사성을 고려해 이곳으로 왔다. 세계 도자기 역사상 왕실 도자기를 가장 오래 만든 곳은 중국 경덕진(징더전)과 한국의 광주 두 곳 뿐이다. 광주는 그만큼 세계적인 곳이다.”

    박부원도 초기엔 청자를 했으나 이후 백자와 분청으로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내 개인의 정서로는 분청이나 백자가 맞다. 청자는 불교적 의미가 담겨 있어서…. 백자나 분청에선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인간미가 느껴진다. 따뜻함이 담긴 자기다. 게다가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고 튼튼하며 조형미가 아름답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달항아리에 빠져들었을까.

    “외국인들은 우리나라를 항아리의 나라라고 한다. 그 많은 항아리 가운데 아름다운 달항아리는 18세기 영·정조 때 분원인 금사리에서 만들었다. 달항아리가 나온 것은 도공들의 의무가 아니라 좋아서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는 도자기 하는 사람들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지배그룹이 하라면 할 때였다. 그런데 정조는 서민의 생활을 잘 알고 예술을 알았다. 그런 정조가 달을 보다가 ‘달처럼 아름다운 그릇을 만들어 봐라’라고 했을 수도 있다. 정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권좌 때문에 쟁투를 했던 아픔을 안고 있던 왕이다. 그 정조가 남산의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도자기로 그런 달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생각했고 사기장이들이 그런 정조의 뜻을 받들었을 것이다. 누구도 자신들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대왕이 인정해주니 그들은 목숨을 다해 그 대왕에게 기쁨을 드리려고 만든 것 같다. 정조가 서거한 후 달항아리는 없어졌다. 반상사회에선 양반이 알아주는 것만도 엄청난데 대왕이 알아주니 그 이상 기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이 달항아리를 낳게 했을 것이다.”

    그는 당시에 잘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지금 전 세계에 15점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며 가치를 설명했다.

    “2005년 고궁박물관에서 연 달항아리전엔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1935년에 수집해 돌아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고 했던 대영박물관 소장 달항아리가 나왔다. 또 일본 도다이지(東大寺)에 있던 것을 도둑이 훔쳐 달아나다가 떨어뜨려 350여 조각으로 깨진 것을 3년여에 걸쳐 복원한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박물관 소유 달항아리도 나왔다.”

    박 명장은 당시 달항아리는 반달 모양의 그릇 두 개를 붙여 만들었다고 한다. 큰 달항아리를 한 번에 만들지 못해 두 개를 맞붙였다는 것. 그래서 지금도 달항아리는 두 쪽으로 붙여야 한다는 이들이 있지만 그는 이를 반박한다.

    “18세기엔 18세기 방법이 있고 지금은 지금의 방법이 있다. 지금은 기술도 발전했으니 하나로 만드는 게 당연하다. 더 좋은 달항아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전통을 따르는 것은 그 시대의 형태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다. 똑같은 것을 만드는 것은 재현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의 정신문화를 21세기에 맞게 발전 계승하는 데 의미가 있다.”

    자신의 작품조차 같아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좋은 작품은 진행형이다. 작업을 하면서 계속 발전해야 한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자기는 태어나는 것이고 일본 도자기는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박부원의 손에서 태어난 달항아리들
    박부원 명장이 아들의 도움을 받아 달항아리를 완성하고 있다.
    박부원 명장이 아들의 도움을 받아 달항아리를 완성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박 명장은 달항아리가 꼭 백자여야 한다는 생각까지 바꿨다. “하얀 백자 달항아리는 깨끗하면서도 무심한 우리 민족의 심성이다. 그러나 달항아리가 꼭 백자여야 하는가. 10여년 전부터 암각화를 담아낼 방법을 찾다가 2011년 울산 현대백화점에서 초대전을 하면서 분청사기에 암각화를 담을 것을 구상했다. 단순히 분청사기에 암각화 문양을 옮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오천년, 육천년 전 우리 조상의 영성까지 담을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수천 년의 시간의 흐름까지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생각했는데 그런 작품이 나왔다.”

    이 말을 하는 박 명장의 얼굴은 밝아졌다. 가마에서 자신이 뜻한 작품을 꺼냈을 때 희열에 들뜬 것처럼….

    “돌이 수천 년 겪은 것을 불은 한 순간에 표현했다. 불이 시간을 앞당겼다”며 박 명장은 도자에서 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300도에서 구워내는데 할 때마다 또 들어간 자리마다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것. 요변 현상으로 수백 개가 나오면 수백 개가 모두 다르다고 했다.

    그에게 좋아하는 작품이 어느 것인지를 물었다.

    “갯벌 색을 좋아했는데… 어린 시절 망둥이 낚시를 하면서 지내던 곳, 태고의 갯벌색이 나왔다.” 박 명장은 은은한 회색의 찻사발을 들었다. 백두산 천지를 연상케 하는 작품이었다.

    애착이 가는 것은 암각화를 새긴 분청 달항아리라고 했다. 달항아리엔 수천 년의 시간이 나타나고 넉넉한 형태가 모든 것을 담아낼 것 같다는 것. 붉은 매화꽃이 피어난 분청 달항아리는 생각의 여지를 많이 남긴다고 했다. 거기선 땀에 젖은 삼베의 색상이 살아났다.

    “매화꽃은 인내력이 강한 우리 민족성을 생각하게 한다. 한국의 정서를 담아냈다. 물방울(분화구)도 돌연변이다. 일부러 만든 게 아니다. 그러기에 도자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최선을 다한 뒤 좋은 작품이 나오길 기다릴 뿐이다.”

    이번 전시의 콘셉트를 ‘50년의 설레임’으로 잡은 것도 그래서다.

    “늘 똑같은 그릇이 나오면 설렘도 없다. 그러나 가마에서 꺼낼 때마다 다른 게 나오기에 늘 궁금하고 설렌다. 달항아리가 식기 전 가마를 열면 깨지는데 지금도 궁금증을 참지 못할 정도다. 그 설렘이 있기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 설렘이 있기에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50년의 설렘은 그를 달관케 한 것 같다.

    “일생이 설렘이다. 늘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기대와 설렘이 있기에 생각을 바꿨고 생각을 바꾸면 또 모든 게 바뀐다. 그런데 그렇게 나온 작품은 영원히 간다. 우리는 오래 살면 인생을 하직하지만 도자기는 깨지지만 않으면 수천 년을 간다. 바다 속에서건 땅 속에서건 그대로 간다. 오래되면 세월의 흔적이 느껴져 오히려 더 매력적이다.”

    그래서 그는 흙을 인생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 같다.

    “흙 작업은 인간의 심성을 순화시킨다. 너무나 문명화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흙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생명을 공급해주는 젖줄이다. 그 흙으로 만든 작품이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신적 젖줄 아니겠나. 그런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든다.”

    “예술 문화는 하늘이 준 좋은 직업”이라는 박 명장은 아들과 딸이 함께 도자를 하는 것을 뿌듯해 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힘들어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일본에서 전시할 때 아들만 보냈는데 오픈하자마자 내가 만든 것은 다 팔았다. 그 뒤 아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큰 딸은 도자를 제대로 공부했다. 고대에서 도자사학을 배웠다.”

    작은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으나 큰 달항아리는 셋이서 마무리한다고 했다. 물레를 서서히 손으로 돌려야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면서 빨리 물려주고 싶지만 불 때문에 아직은 때가 안됐다고 했다. “불은 학문이 아니다. 여름과 가을·겨울이 다르다. 여름엔 불이 맑지 않아도 잘 나오고 봄·가을엔 불이 맑다. 달항아리는 기능과 예술과 불의 합작품이다. 불이 안 되면 안 된다. 10년이 지나도 불이 안 되는 사람도 있다.”

    박 명장은 아직도 30~40대 못지않은 열정을 유지하고 있다. 매일 줄넘기를 하고 동네 축구도 한다고 했다.

    “나는 행복하다. 뭔가 남기지 않는가. 다른 짓 했다면 경로당에 다니고 있을 텐데 지금도 시간을 쪼개 쓰고 있다. 일도 젊은 사람보다 빨리 하고. 무슨 운동이든 좋아한다.” [정진건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2호(2012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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