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삭공구로 세계평정 한국의 ‘히든 챔피언’

    입력 : 2012.06.01 17:2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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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호근 와이지-원(YG-1) 대표(60)는 출장 준비로 바빴다. 그의 사무실에는 늘 출장가방이 준비돼 있다. 이번 출장은 독일 고객과 함께 중국 칭다오 공장을 방문하는 일정이다.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도 그는 한 달에 4번 이상 해외 출장을 나간다. 연간으로 따지면 150~200일 정도를 해외에 머문다. 고객을 데리고 나가기도 하고 혼자서 현지 생산기지를 방문하기도 한다. 앉아서 지시하기보다 현장으로 달려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 탓이다.

    출장이 잦지만 메일과 전자결제 시스템으로 그는 밤을 낮같이 보내며 일한다. 지난 번 업무용으로 갤럭시탭을 샀더니 부인이 “그동안 3등이었는데, 이제 4등 되겠네”라며 눈을 흘겼단다. 와이지-원, 노트북에 이어 자신이 3등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태블릿에 밀려 4등으로 처질 것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것이다. 와이지-원의 송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서른 살 되던 해 창업한 이 회사는 이제 정밀 절삭공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히든 챔피언’으로 성장했다. 절삭공구(Cutting Tool)란 공작기계 부품, 금형, 각종 전자기기 부품 등을 자르고 성형할 때 필요한 소모성 공구를 말한다. 기계 산업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제품이다. 분당 최고 5만 번 회전하며 자동차나 항공기의 동체를 깎는 데 쓰이는 엔드밀을 비롯해 탭, 드릴 등이 이 회사의 주력 생산품이다. 엔드밀은 세계 1위, 탭은 세계 4위, 드릴은 세계 6위 수준의 자리에 올라와 있다.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나와 남들이 주목하지 않은 ‘굴뚝 산업’ 분야 창업에 성공해 세계 일류로 올라선 보기 드문 인물이다. 처음에 그는 말표 고무신으로 유명했던 태화의 자회사 ‘태화기계’에 입사했다.

    여기에서 그는 엔드밀을 국산화해보겠다고 달려들었다가, 기술 제휴선이 기술제공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그 꿈은 실패하고 말았다. “회사가 조금만 더 지원했더라면…”. 너무 안타까웠다. 그는 누구에게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이 분야에서 성공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독립을 결심했다. 1982년 10월 직원 14명과 함께 인천 부평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사명이 ‘양지원공구’였다. 송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직접 수출에 주력하며 회사를 키웠다. 그는 미국 시장을 타깃으로 삼아 처음부터 세계 최고의 품질시장과 경쟁해서 이겨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미국, 독일, 일본 등 선진 공구 시장의 표준 규격을 능가하는 자체 검사기준을 마련해 놓고 이를 엄격히 준수했다. 다른 중소기업들이 대기업 납품에 의존하며 사이즈를 늘려가고 있을 때 그는 이처럼 자체 생산력과 품질 경쟁력을 키우는 한편 전 세계 바이어를 일일이 만나가면서 영업망을 확충했다.

    20년 기술 배웠던 日기업 아예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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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대표는 “절삭공구라는 게 국내 시장에서 승부를 걸 만한 아이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처음부터 100% 수출을 하면서 해외시장으로 나갔다”고 말했다. 현재 와이지-원은 인천 본사를 비롯해 안산, 충주, 광주 등 국내에 7곳, 해외에는 미국, 중국, 인도, 독일, 캐나다, 일본 등 6개국에 9개 공장을 가동하며 전 세계 75개국에 수출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와이지-원은 매출액 2560억원에 영업이익 350억원을 벌었다. 전년과 비교하면 매출액은 57%, 영업이익은 무려 250%나 급증했다. 이 가운데 75%를 수출로 벌어들였다. 연간 수출액만 2억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기계산업의 본고장 독일에도 연간 3000만달러 이상을 수출한다. 와이지-원은 불황의 위기 속에서도 성장을 질주하는 제조업의 위력을 보여준다.

    송 대표는 종종 ‘나폴레옹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적의 허를 찌르기 위해 ‘알프스 산맥’이라는 불가능을 뛰어 넘은 나폴레옹처럼 과감한 투자로 경쟁자를 완전히 압도하는 ‘기적’을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기적은 현실이 된다. 와이지-원은 지난해 말 일본 절삭공구 전문업체인 ‘산쿄공구(三協工具)’를 인수했다. 산쿄는 지난 1946년 설립돼 60여 년 동안 절삭공구 한 우물만 판 일본의 대표적인 강소기업이다.

    일본 오사카 남서쪽 가가와현에 위치한 산쿄는 일본 경제가 세계를 리드할 무렵인 198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 절삭공구 시장에서 강자로 활약했던 기업이다. 특히 차량과 항공기 동체를 깎는 데 사용하는 엔드밀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 미쓰비시, 쿄세라 등 일본 대기업들 공세에 밀려 그 위상이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국내 공구상들에게 ‘산쿄 정품’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공구로 통한다.

    와이지-원과 산쿄와의 인연은 198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와이지-원은 선진 절삭공구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도움을 받아 매년 2명의 직원을 산쿄에 파견했다. 지금 우리나라 기업에 산업연수생을 파견하는 후진국 업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20여 년 후 입장이 뒤바뀌어 기술전수를 해줬던 업체를 인수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산쿄 인수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산쿄 측이 과거 기술을 가르쳐준 기업에 회사가 팔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 대표는 “일본 측에서는 돈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 문제로 와이지-원에 인수되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고 말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을 무렵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독일의 세계적인 공구업체 호프만에서 부사장을 지냈던 이가 와이지-원 독일판매법인 대표로 자리를 옮긴 후 산쿄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선 게 먹혀들었다.

    송 대표는 “우리가 뭐라 할 때는 잘 들으려 하지 않더니 독일사람 말에는 귀를 기울이더라”고 했다. 결국 2008년 시작한 인수협상은 3년이 지난 지난해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인수금액은 약 42억원. 산쿄 측이 무리하게 협상을 끄는 바람에 가격도 처음과 비교하면 오히려 6분의 1 정도로 줄었다. 현재 산쿄는 과거 전성기와 비교하면 그 위상이 많이 축소돼 있는 게 사실이다. 한때 100여 명에 달했던 임직원 수는 30여 명으로 줄었고, 연간 매출액도 70억원 정도에 불과하다.

    송 대표는 산쿄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일본 내수시장 공략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이다. 그는 “일본 시장은 무척 특이해서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외국 브랜드가 좀처럼 점유율을 늘리기가 쉽지 않다”면서 “현지 브랜드로 일본 공구시장에서 큰 일 한번 내겠다”고 말했다. 와이지-원은 산쿄 인수 후 사명을 신산쿄공구(New Sankyo Tool)로 바꾸고 설비투자도 과감하게 하고 있다. 일본 내수시장 공략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내면 산쿄를 와이지-원 해외시장 개척의 교두보로 삼을 계획이다. 송 대표는 “현재는 신기계 도입 등 소규모 투자를 했지만 공장이 안정화되면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다”면서 “한국 업체의 ‘메이드 인 재팬’ 상품으로 세계 시장도 본격적으로 공략하겠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제영토를 넓혀주는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와이지-원의 질주는 앞으로 더욱 가속도를 낼 것으로 기대된다. 송 대표는 “지난해 하반기 발효된 한·유럽연합(EU) FTA가 회사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줬다”고 말했다. 그만큼 수출이 늘었다는 얘기인가? 그렇지는 않다. 절삭공구 분야 유럽시장 관세는 1.5% 정도로 이번 FTA로 수출이 당장 엄청나게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FTA는 윈윈게임… 사업기회 많아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FTA 효과란 무엇일까. 송 대표는 “물론 1.5% 정도 관세 철폐도 작은 부분은 아니다”면서도 “그러나 FTA 경쟁력은 다른 곳에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처럼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원료나 기계·설비 등 자본재 투입에 적극적인 기업들에게 FTA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다. 무슨 얘기일까. 바로 설비 투자에서 발생하는 FTA 효과다. 절삭공구 제작을 위한 기계 수입 관세 혜택을 통해 확보하는 원가경쟁력이 기대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고 송 대표는 강조했다.

    와이지-원은 급증하는 주문에 대응하기 위해 오는 2015년까지 꾸준히 공장을 증설할 계획이다. 충주 공장은 2공장에 이어 올 상반기 3공장을 완공할 예정이며, 인천 본사 건물에도 생산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전체 수출에서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국 시장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 칭다오 공장 투자도 대폭 늘릴 예정이다. 또 아직까지는 판매법인 정도인 브라질 지사의 매출이 일정 정도에 도달하면, 생산설비를 갖추고 남미 시장 공략도 본격화할 계획이다.

    송 대표는 “절삭공구 제작의 필수 설비인 CNC그라인더는 대당 가격만 25만달러나 하는 고가 장비”라면서 “6대만 사도 150만달러나 하는데 이 기기의 수입 관세인 8%가 사라진다고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는 “설비를 값싸게 들여오면서 원가경쟁력을 높였다”며 “일본 경쟁사들과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물론 그동안 콧대 높던 일본 기기업체들이 한·EU FTA 발효 후에는 장비 가격을 깎아주겠다고 하는 등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발효된 한·미 FTA는 그 이상이라고 했다. 미국 시장에서 관세 혜택은 6% 정도. 이 정도면 어느 정도 효과가 날까. 송 대표는 “미국 시장은 저가의 중국 제품과 경쟁이 심해 단 1달러 차이로도 수주 여부가 결정된다”며 “6%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미국 시장에는 연간 3000만달러 이상을 수출하고 있는데, FTA 발효로 수출 관세가 사라지면 연간 180만달러 규모 원가경쟁력을 확보한다”면서 “경쟁사들에게 이는 엄청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송 대표는 “세계적인 브랜드와 품질 경쟁력을 갖고 있는 만큼 사라진 관세 장벽을 활용해 제품 가격을 3~4% 정도 인상하는 것도 고려 중”이라며 “그래도 FTA 발효로 경쟁사보다 2~3% 정도 제품은 싸게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고객과 윈윈(win-win)할 수 있을 전망”이라고 말했다.

    FTA 확대에 힘입어 와이지-원은 올해 매출액이 전년보다 약 25% 증가한 3200억원, 영업이익은 43% 정도 증가한 5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경제불황에도 불구하고 중국, 인도 등 신흥경제권에서 자동차와 IT산업이 성장세를 유지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이를 생산하기 위한 절삭공구 수요도 큰 폭으로 늘어날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와이지-원은 오는 2020년 절삭공구 분야 세계 1위 기업으로 도약해 매출 2조원을 달성하는 게 목표다.

    [최용성 매일경제 중소기업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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