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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계의 돈키호테,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내 예술적 기질 이젠 제대로 팔 생각입니다
입력 : 2012.06.01 17:2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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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회 전 무대 뒤에서 만난 까스텔바작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을 의식(?)했는지 평범한 포즈로 카메라를 맞았다. 하지만 여느 노신사와 별다를 게 없다는 생각은 딱 거기까지.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말머리를 뒤집어 쓴 여성 둘이 옆에 서자 “뿔 없는 유니콘이자 희귀종”이라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마치 ‘내가 이럴 줄 몰랐지? 알았어? 난 지금부터 시작이야!’라고 말하듯 한껏 포즈를 취하더니 이것저것 강연회에 쓸 소품 가방을 분주히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파격은 최근 내한한 21세기의 아이콘 레이디가가의 실험적인 의상에서 방점을 찍었다. 2009년 독일의 한 토크쇼에 입고나온 ‘커밋 더 프로그’ 패션(일명 개구리 패션)이 그의 손을 거쳤고, 이듬해 ‘생고기 드레스’ 또한 그의 머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쯤되면 말머리를 뒤집어 쓴 유니콘 두 마리 쯤은 맛보기에 불과하다. 강연이 시작되고 그의 소개가 끝나자 무대가 암전됐다. 그리고 여섯 개의 촛불을 든 까스텔바작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등장했다. 통역사에게도 최근 컬렉션 의상을 입힌 그는 강연 내내 코미디언처럼 웃음을 유도했고 강약을 조절하며 관객을 리드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좌충우돌한 그의 강연을 인터뷰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장 샤를 드 까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 1949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 중반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며 그곳에 정착했다. 의류업체를 경영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패션 디자이너로 입문한 까스텔바작은 1970년 첫 컬렉션 라인을 출시하고 1980년에 남성복 라인을 선보였다. 만화 캐릭터 프린트와 군복 위장 패턴을 처음으로 패션에 접목한 그의 작업은 이후 수많은 셀리브리티의 지지를 받으며 승승장구한다. 1997년 ‘세계 기독 청년의 날’ 행사에 예술 감독을 맡으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성직자 5500명의 의상을 디자인했고, 2006년 런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주체로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팝 문화적이고 트렌드에 좌우하지 않는 디자인 덕분에 종종 안티 패션의 기수라 불리는 그는 ‘유행을 타지 않는 영속적인 옷’을 지향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까스텔바작 브랜드의 상표권은 지난해 국내 패션브랜드 ‘EXR’이 인수했다.
1975년 스포트막스(SPORTMAX) 론칭을 위해 막스마라(MAX MARA)의 아킬레 마라모티(Achille Maramotti)와 협업 시작.
1978년 본인 소유의 회사 ‘SOCIETE JEAN-CHARLES de CASTELBAJAC SARL’ 설립.
1993년 앙드레 쿠레주(Andre Courreges)의 1994 SS 시즌 컬렉션을 공동 작업해 주목받음. UNICEF 인형 의상을 디자인.
1994년 프랑스 예술 문화 훈장 수여로 작위를 받음.
2006년 일본 고베 이진칸 지역에 단독 플래그십 스토어 오픈.
런던 콘딧(Conduit) 거리에 플래그십 숍 오픈.
2009년 파리에서 개최된 MAISON & OBJET에 작품 전시. 런던에서 ‘JEAN-CHARLES de CASTELBAJAC TAKES’ 전시회 개최.
아이디어와 재능은 환경과 상관없다 6개의 촛불을 들고 등장했다. 꽤나 드라마틱하다. 어떤 의도인가. 한 가지 행동은 그 행동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과 연결돼 있다. 난 오토바이를 즐기는데 선조들이 말을 타고 전쟁터에 나서듯 용사가 된 기분으로 타고 나선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행동에는 용감함이 묻어난다. 그런 작은 순간, 비효율적이라고 생각되는 순간이라도 그걸 신선한 순간으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여섯 명(여섯 개의 초)의 친구들과 함께 등장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 중요하다? 그렇지. 거대한 디지털 세계에선 복잡한 구조를 추구하는데, 덕분에 이렇게 작지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간단한 것들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초를 들었다. 아, 사족하나. 18세기에는 여성들이 오로지 촛불에만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조명발이 없었다. 당연히 지금보다 예쁠 수도 없었고.(웃음)
당신의 작업은 파격이란 단어를 동반한다. 언제부터 그런 상상이 시작된 건가. 음… 처음부터 다른 걸 추구했다. 기숙학교에 있을 때부터 상상력을 발휘했지. 머릿속에 작은 회사 하나를 차렸다. 생각을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회사였는데 수많은 고통 속에서도 아이디어나 재능을 표현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여자 하나 없는 기숙학교에 오래도록 갇혀있던 고통,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기숙학교에 갇혀있던 고통, 아무것도 누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억울함…. 그래서 기숙학교에 있는 동안 그 모든 걸 표현하기 위해 다재다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재다능? 구체적으로 어떤 재능인가. 그곳에서 작은 와인의 코르크 마개, 성냥 케이스 하나도 보물이 될 수 있단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곳을 나와선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졌다.
디자이너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기숙사에서 나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직업을 찾았다.(웃음) 할머니가 방직공장을 운영했고 어머니가 디자이너셨다. 어머니가 그러셨지. 용돈을 줄 테니 디자인을 해보라고. 자연스럽게 입문했고 그때부터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머리에 상상력과 창의성 두 단어를 새겨라 어린 시절이 평범하지 않은데, 그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은 무엇인가.
상상력과 창의성? 너무 뜬구름 잡는 식인데.
그렇다면 경계가 모호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오늘날 세계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늘 창조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확실한 건 단 한 가지뿐이다. 창조해야 한다는 것.
지난해 한국의 EXR과 손을 잡았다. 예술가가 되고 싶어 실험적인 옷을 만들었고 대중성 사이를 줄타기해왔다. 이젠 내 예술적 기질을 제대로 팔아줄 파트너가 필요하다. EXR에 늘 감사하고 있다.(웃음)
까스텔바작 ·까스텔바작 리니에(Castelbajac Lignee)
·까스텔바작 골프(Castelbajac Golf) 여유를 표현한 고감도 감성의 스포츠 캐릭터 캐주얼이다.
1996년 국내에 소개됐다. 기존 골프웨어의 한계성을 벗어나 일상생활의 여유를 표현한 고감도 감성의 스포츠 캐릭터 캐주얼이다.
·까스텔바작 JCC(Castelbajac JCC) 클래식한 디자인에 좀 더 집중하는 프리미엄 라인이다. 케이티 페리나, 레이디 가가 등 젊은 뮤지션과 팬들이 열광하는 대중성, 예술성이 접목됐다. 국내에 직수입되는 까스텔바작 JCC는 단순한 파격보다 인공적이고 변형적인 요소의 수용을 통해 패션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1호(2012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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