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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프로젝트] 만추의 길, 홍릉수목원
입력 : 2011.11.25 15: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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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왕조의 가을 숲 속으로낙엽송 숲길
그러므로 가을의 색은 풍요롭다.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낙엽의 신음도 바쁜 걸음을 잡아채는 쉼표다. 그러니 마지막 잎새 하나에 깃든 정취도 쉬이 지나칠 수 없다. 느긋한 가을의 산책이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홍릉수목원 일대는 이미 조선시대부터 무성한 숲이었다. 원래는 천장산의 남서쪽으로 조선왕조의 국유림이 있었다. 홍릉이 만들어진 것도 그런 까닭이다. 홍릉은 일제에 의해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능이다.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맞은 후 서인으로 폐위됐다가 1897년에 복호됐다. 그 해 11월 국장을 치렀고 지금의 홍릉수목원에 묻혔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남양주로 이장해 합장했다.
그래서 홍유릉이다. 조선총독부는 그 자리에 임업시험장을 설치했다. 전국 각지의 나무 종자 표본을 수집해 4000여 종의 목초본 식물로 꾸몄다. 1922년의 일이다. 홍릉수목원의 시작이다.
임업시험장은 광복 후에도 국립임업시험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이 불에 탔다. 현재의 홍릉수목원은 1960년대 후반부터 다시금 가꿔온 흔적이다. 그 시간만 해도 족히 반세기가 넘었다. 나무가 자라고 숲을 이루니 조류나 곤충류도 부쩍 늘었다. 현재는 국립산림과학원으로 불린다.
홍릉숲이라고도 하는 홍릉수목원은 그 부속 수목원이다. 나무의 나이테만큼 시간의 퇴적층이 어느새 사람의 발자취를 앞섰다. 서울에 있는 인공의 숲 가운데 자연에 가장 가깝다.
가을의 길을 따라홍릉수목원 생태관찰로
우리나라 산에 가장 풍부한 활엽수가 참나무였던가.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 6종의 참나무가 저마다 다른 개성으로 활엽수림을 물들인다. 짙은 가을의 색이다.
고로쇠나무도 황홀한 가을 풍광을 거든다. 산책로의 반환점인 조경수원도 그 못지않다. 국내 조경회사에서 기증한 나무로 꾸며 ‘조경인의 숲’이라고도 한다. 은행나무, 복자기나무 등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수종이지만 수목원에서 마주하니 감회가 남다르다. 그에 앞서 역사의 흔적도 깃들었다. 고종의 우물터였을 어정을 지나 이제는 자취를 알아보기도 어려운 홍릉터가 나온다. 명성황후가 묻혔던 자리다. 유래를 알리는 표지판만이 위치를 표시한다. 두텁게 내려앉은 낙엽이나마 그 비통한 죽음을 안위하니 다행이다.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위에 쓰인 수목의 기록이다.
그 위로 내는 후대의 걸음이 지난다. 조경수원을 돌아 나오는 길에는 골짜기 사이로 좁은 단풍이 두드러진다. 이 또한 우리네 단풍나무라 더 반갑다.
가을은 눈에서 피어 발에서 지네메타세콰이아 길의 가을
서울 시내 곳곳에 공원이 있고 너른 숲을 조성했다만, 저마다 다른 모양새의 단풍이 든다만, 그 가운데 홍릉수목원이 단연 발군이다.
낙엽을 태울 때 나는 커피향보다 낙엽을 밟을 때 바스락대는 소리의 살가운 정취다. 나무가 주인이다. 11월이 왠지 모를 아쉬움으로 남는 것도, 목적 없이 서성이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홍릉수목원의 가을은 만추(晩秋)의 길이다.
[박상준 여행작가 seepark1@naver.com│사진 = 국립산림과학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4호(2011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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