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비블리오필리] 인간은 과연 진보했는가

    입력 : 2011.05.27 16: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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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뉴욕의 평균 마차 주행속도는 시속 17.7㎞였다. 그러나 1980년 뉴욕의 평균 자동차 주행속도는 시속 9.6㎞로 오히려 느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인류가 진보하고 있다고 맹신한다. 뉴욕의 주행속도 변화에서 알 수 있듯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오히려 뉴욕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영국 웨일스의 스완시대학 정치학 교수인 클라이브 폰팅 박사는 진보의 세기로만 알고 있는 20세기는 퇴보된 야만의 세기였다고 평가한다. 그는 자신의 책 <진보와 야만(Progress & Barbarism)>에서 사람들이 중단 없는 전진의 시기였다고 굳게 믿고 있는 20세기에 관해 새로운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는 보통 20세기를 모든 것이 진보하고 평등과 민주주의가 정착된 시기였다고 믿는다. 정말 그랬을까. 슬프게도 몇 나라를 제외하고 20세기 대다수 국가들의 가장 보편적인 통치 형태는 독재였다. 무력을 가진 집단이 돈을 가진 집단과 결탁해 권력을 독점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인 정치구조였다는 이야기다.

    중국공산당은 20세기 동안 자국민 5000만 명을 죽였고, 구소련은 1700만 명을, 기타 아시아 독재정권들은 400만 명의 자국민을 죽였다. 20세기 내내 자국 정부에 의해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최소로 추산해도 1억 명이 넘는다는 것이 폰팅 박사의 주장이다.

    평등이라는 측면도 20세기 내내 봉건시대와 다름없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폰팅의 주장이다. 물론 20세기 들어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예제나 인종차별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러나 자본이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고 그것은 귀족제도와 다름없이 세습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영국의 통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가 고급공무원인 아이가 아버지처럼 고급공무원이 될 확률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73배나 높다. 부모가 전문직 종사자일 때 자식 중 40%가 전문직을 갖는 반면 부모가 육체노동자인 경우 단 7%만이 전문직 종사자가 된다. 여기에 20세기 내내 국가 간 불평등은 오히려 더욱 심화됐다. 몇몇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들이 빈국의 처지를 벗어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선진국 대부분은 이미 19세기부터 선진국이었던 나라들이다. 부자 나라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나라는 더 가난해지는 현상은 오히려 20세기 말 더욱 심화됐다. 1990년대 중반 89개국의 생활수준이 1980년대보다 더 나빠졌고, 43개국은 1970년대보다도 더 가난해졌다.

    21세기는 퇴보의 시대 예측
    오귀스트 프레오의 학살
    오귀스트 프레오의 학살
    20세기에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몇몇 초국가적 기업들이 탄생했다. 이들은 세계 경제를 움켜쥐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난한 나라들을 피폐한 소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들의 상품을 소비하면서 그들을 섬겨야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는 환경문제, 핵무기 개발, 테러 등의 문제까지 20세기는 축복이 아닌 재앙으로 얼룩진 시기였다고 폰팅은 말한다. 그는 역사를 진보라고 보는 건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 학자들만의 시각이라고 못 박는다. 지구촌 대부분 사람들이 야만을 경험하고 있는데 몇몇 혜택받은 자들이 자신들만의 시각으로 현대사를 재단한다는 지적이다. 폰팅 박사는 21세기 역시 낙관하지 않는다. 그가 21세기 역시 퇴보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유는 지구 에너지의 고갈 때문이다. 눈앞으로 다가온 에너지 고갈은 인류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지속적인 환경파괴와 계급간 갈등은 지금의 시스템으로는 제어가 불가능한 거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현실이 아무리 암울하다 해도 인간은 더 낳은 세상을 꿈꾸었기에 멸망하지 않고 존재해 왔다. 수많은 한계 속에서도 과거를 돌아보고 내일을 꿈꾸어야 할 의무가 인간에게는 있다. 20세기라는 독특했던 한 시대의 연대기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영국의 사학자 E.H.카(Edward Hallet Carr)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역사학자와 역사적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필자는 이 명언도 좋아하지만 “역사에서 절대자는 과거나 현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쪽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는 미래에 있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 왠지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허연 / 매일경제 문화부 차장·시인·문학박사 praha@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6호(2011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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