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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1 럭셔리 브랜드의 새 런웨이
입력 : 2026.10.12 10:5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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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호이어 포뮬러 1 크로노그래프를 착용한 드라이버. <사진 태그호이어> 시속 350㎞로 질주하는 F1 머신이 글로벌 명품의 새 런웨이가 됐다. 2027년부터 알핀(Alpine)의 포뮬러 원(F1) 팀 머신과 유니폼에는 이탈리아 하이엔드 브랜드 구찌의 이름이 새겨진다. 공식 팀 명칭은 ‘구찌 레이싱 알핀 포뮬러 원’ 팀이다. 기존 타이틀 스폰서 BWT의 바통을 이어받는 구찌는 차체 로고를 새기는 수준을 넘어선다. 팀의 타이틀 파트너로서 디지털 콘텐츠와 캡슐 컬렉션, 최상위 VIP를 위한 현장 경험까지 공동 설계할 계획이다. 구찌 측은 정통 럭셔리 패션 하우스가 F1 팀의 타이틀 파트너로 나선 첫 사례라고 설명했다.
8억3000만 팬덤의 영향력명품 패션 브랜드는 그동안 F1에서 영향력을 키워왔다.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2025년부터 10년간 F1을 후원하는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2013년부터 서킷을 지켜온 롤렉스의 빈자리를 꿰찬 셈이다. 루이 비통은 월드 챔피언 트로피를 담는 맞춤형 트렁크를 전면에 내세웠고, 디올과 셀린느를 아우르는 LVMH 산하 브랜드들은 모나코와 벨기에 등 유서 깊은 그랑프리의 간판을 차지했다. 태그호이어는 공식 타임키퍼로 화려하게 복귀했으며, 모엣&샹동은 공식 샴페인 자리를 탈환하며 시상대 샴페인 세리머니를 독점했다. 거친 엔진음이 울리던 경기장이 명품 하우스들의 런웨이가 된 셈이다.
명품 기업들이 F1으로 앞다투어 뛰어드는 이유는 압도적인 플랫폼 규모와 관객층의 변화 때문이다. F1이 2026년 중간 집계에서 공개한 글로벌 팬덤 규모는 8억 3000만 명을 웃돈다. 미국 리버티 미디어가 인수한 직후 첫 온전한 시즌이었던 2018년(약 5억600만 명)과 비교하면 64% 증가했다. 특히 여성 팬들이 대거 유입됐다. 전체 팬의 43%가 35세 미만 청년층이고 42%가 여성이다. 신규 유입 팬 가운데 여성 비중은 무려 75%에 육박한다. 공식 소셜미디어 팔로워는 전년 대비 19% 늘어난 1억2500만 명을 돌파했고, 2026년 상반기에 열린 11개 대회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370만 명의 관중을 끌어모았다.
2010년 스폰서 구성이 다변화되던 시기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F1 경기. <사진 연합뉴스> 3월부터 12월까지 이어지는 그랑프리 일정은 곧 세계 부촌 순회 지도와 같다. 모나코, 싱가포르, 상하이, 마이애미, 라스베이거스, 아부다비 등은 럭셔리 소비재 시장과 초고액 자산가가 집중된 지역이다. 단일 글로벌 계약으로 세계 주요 대륙의 핵심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연중 노출할 수 있는 기회다. 관객들의 반응도 우호적이다. F1과 모터 스포츠 네트워크가 실시한 글로벌 팬 조사에서 응답자의 76%는 스폰서십이 레이스 몰입도를 높인다고 답했다. 3명 중 1명은 공식 파트너 브랜드 제품의 구매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며, Z세대 응답자군에서는 이 비율이 40%까지 치솟았다.
담배 광고판에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으로F1의 초기 스폰서들은 주로 담배회사들이었다. 1950년 영국 실버스톤에서 첫 월드 챔피언십이 막을 올린 뒤 1968년 상업 스폰서십이 허용되자 팀 로터스는 임페리얼 토바코의 ‘골드 리프(Gold Leaf)’ 담뱃갑을 연상시키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머신 전체를 도색했다. 이후 말보로, 카멜, 로스만, 럭키 스트라이크 등이 머신과 드라이버 슈트를 점령했다. TV와 신문에서 담배 광고 규제가 강화되던 시기, 담배회사들은 전 세계를 순회하는 F1을 글로벌 광고판으로 활용했다. 속도와 위험, 모험과 남성성 같은 모터스포츠의 이미지를 브랜드에 덧입히는 전략이었다.
1992년 열린 F1경기에서 말보로 로고를 단 차량. <사진 연합뉴스> 2005년 유럽연합(EU)의 초국경 담배 광고·스폰서십 규제가 본격 시행되고 세계보건기구(WHO) 담배규제기본협약이 발효되면서 담배 로고는 퇴출 수순을 밟았다. 이후 빈자리를 금융과 통신, 에너지, IT 기업 등이 메웠고 2020년대 들어서는 럭셔리와 패션,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들의 존재감이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F1의 상업적 성공을 후원사 라인업이 담배회사에서 명품 브랜드로 바뀐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사이 F1이라는 ‘상품’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F1의 설계자, 버니 에클스턴F1의 토대를 닦은 인물은 영국 사업가 버니 에클스턴(Bernie Ecclestone)이다. 그는 각국의 서킷(경기장)과 팀, 방송사가 얽힌 모터스포츠를 하나의 글로벌 TV 상품으로 묶어냈다. 개최 도시에는 그랑프리를 열 권리를, 방송사에는 중계권을, 기업에는 전 세계 시청자에게 접근할 광고 공간을 판매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확립했다. F1의 역사를 다룬 책 <더 포뮬러(The Formula)>의 저자 조슈아 로빈슨과 조너선 클레그는 에클스턴이 F1을 세계적인 스포츠 비즈니스로 만든 설계자라고 설명했다.
특히 에클스턴은 3가지 영역에서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 번째는 각 팀과 서킷, 즉 대회 주최 측 사이의 관계를 장악한 것이었다. 당시 각 F1 팀은 그랑프리 주최자와 출전료와 상금을 따로 협상했다. 주최자는 경쟁 관계인 팀들을 서로 저울질하며 조건을 정할 수 있었다. 에클스턴은 이를 뒤집었다. 1970년대 참가 팀들의 연합체 FOCA를 이끌며, 하나의 협상단으로 묶고 직접 주최자들과 일괄 협상했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주요 팀 전체가 출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협상력이 생겼다. 팀이 개별 참가자가 아니라 F1이라는 상품의 공동 공급자가 된 순간이었다. 조슈아 로빈슨이 이를 “에클스턴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라고 표현할 정도의 혁명이었다. 또한 에클스턴은 텔레비전을 본격적으로 활용하며, 스폰서의 중요성을 알고 담배산업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그의 목적은 단순 광고비가 아니라, “F1 경기 장면이 TV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방송되면서 스폰서를 유치할 수백 시간의 노출 기회가 창출된다는 점”이었다.
버니 에클스턴. <사진 연합뉴스> 하지만 에클스턴의 전략은 TV 시대에 최적화돼 있었다. 2014년 그는 젊은 소비자는 롤렉스를 살 돈도, UBS에 예치할 돈도 없다며 돈 많은 70대 소비자에게 접근하는 편이 낫다는 취지로 말한 바 있다. SNS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찾기 어렵다는 태도를 보였다. 당시 F1은 강력한 글로벌 방송망을 갖고 있었지만 팬이 경기 밖에서 F1 콘텐츠를 소비할 통로는 제한적이었다.
2017년 미국 미디어 그룹 리버티 미디어가 F1을 약 80억달러(약 11조800억원)가치로 인수하면서, 미디어 전략이 크게 달라졌다. 인수 당시 투자자 자료에 따르면 F1의 디지털 매출은 전체의 1% 미만이었다. 리버티는 이미 각 레이스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방대한 영상과 데이터를 디지털 플랫폼에서 활용하고, 드라이버와 팬의 접점을 늘리고, 게임·상품·이벤트 등으로 프랜차이즈를 확장하겠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레이스 영상은 유튜브와 SNS로 확산됐고 2018년 자체 OTT인 F1 TV가 출범했다. 방송사에 중계권을 판매하는데 그치지 않고 팬에게 직접 콘텐츠를 파는 D2C(Direct-to-Consumer) 미디어 사업자가 된 것이다. 판타지 게임과 e스포츠, 팟캐스트, 라이선싱 사업도 잇따라 확대했다.
2019년부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F1: 본능의 질주>로 인해 F1의 대중적 인기가 크게 올랐다. 복잡한 공기역학이나 타이어 전략보다 드라이버의 성격과 라이벌 관계, 계약과 이적, 팀 내부 갈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을 따라가게 만든 것이다. 로빈슨과 클레그는 이 변화를 F1 성공의 ‘매직 소스’를 찾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우승을 다투지 않는 하위권 팀과 드라이버조차 개인적 갈등과 생존 경쟁을 통해 콘텐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대회 공간도 달라졌다. 마이애미와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레이스가 콘서트와 호텔, 카지노, 파티, 셀럽 문화와 결합한다. 패독 클럽(Paddock Club)은 피트 바로 위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고가 좌석을 넘어 글로벌 기업과 VIP 고객이 식사와 네트워킹, 브랜드 이벤트를 함께 경험하는 호스피탈리티 상품이 됐다. F1은 더 이상 일요일 두 시간 동안만 소비되는 자동차 경주가 아니라, 레이스 사이의 SNS와 다큐멘터리, 게임, 패션, 여행과 이벤트까지 연결되는 연중 미디어 IP가 됐다.
F1, 스포츠 비즈니스의 정수F1의 성장은 콘텐츠 흥행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스포츠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F1은 하나의 경기에서 여러 종류의 희소한 권리를 반복해서 판매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개최 도시는 그랑프리를 열 권리를 사고, 방송사는 중계권을 산다. 기업은 글로벌 파트너·대회 타이틀·트랙 광고를 사고, 부유층과 기업 고객은 패독 클럽과 VIP 경험을 구매한다. 같은 레이스가 서로 다른 상품으로 여러 번 수익화되는 셈이다. 여기에 F1 특유의 희소성이 더해진다. 참가할 수 있는 팀과 드라이버 좌석은 극히 제한돼 있고, 그랑프리 개최 일정 역시 한 시즌 20여 개로 한정된다. 경기 하나하나가 매주 수백 경기씩 쏟아지는 일반 리그와 다른 프리미엄 이벤트가 된다. 동시에 유럽에서 아시아, 중동, 미주로 이동하는 월드 투어 형식이어서 하나의 스폰서십으로 서로 다른 주요 소비시장을 반복해서 공략할 수 있다. F1의 ‘글로벌 파트너’ 자리가 단순 스포츠 광고보다 글로벌 마케팅 패키지에 가까운 이유다.
<F1:본능의 질주> 속 샤를 르클레르 우승 장면. <사진 넷플릭스> 리버티는 이 희소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소비할 수 있는 F1의 표면적을 넓혔다. 과거 팬이 소비할 수 있던 핵심 상품이 그랑프리 중계였다면 이제는 드라이버의 SNS,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F1 TV, e스포츠와 게임, 영화, 굿즈, 패션 협업, 팝업과 도심 이벤트까지 모두 F1 세계관의 입구가 된다. 반드시 일요일 레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시청하지 않더라도 드라이버를 팔로우하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팀 굿즈를 구매하는 방식으로 F1 팬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F1 본체의 수익 구조도 확장됐다. 리버티 미디어 인수 직전인 2016년 18억 달러 수준이던 F1 매출은 2025년 38억7300만 달러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2025년 전체 매출 가운데 미디어 권리가 31.3%, 개최권이 26.7%, 스폰서십이 21.7%를 차지했다. 나머지 20.3%에는 패독 클럽과 라스베이거스의 호스피탈리티, 라이선싱, 물류 등 부가사업이 포함됐다. 특히 스폰서십 비중은 2023년 18.0%에서 2025년 21.7%로 커졌다.
레이스가 런웨이가 되다… 명품이 F1에서 사는 것결국 리버티가 만들어낸 F1의 성장 공식은 경기를 더 많이 보여주는 데 있지 않았다. 스포츠의 희소성은 유지하면서 팬이 유입되는 경로를 늘리고, 하나의 IP에서 판매할 수 있는 권리와 경험을 세분화했다. 레이스를 보지 않던 사람도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와 SNS, 게임과 영화를 통해 팬덤으로 끌어들이고, 팬은 시청자에서 구독자와 관광객, 굿즈 구매자와 브랜드 고객으로 확장됐다.
이 같은 구조는 럭셔리 브랜드에 특히 매력적이다. 과거 스포츠 스폰서십이 머신과 트랙에 로고를 노출하는 데 집중됐다면 지금의 F1에서는 대회 타이틀 파트너십부터 패독 클럽의 VIP 호스피탈리티, 팝업스토어, 한정판 제품, 드라이버 협업, 디지털 콘텐츠까지 서로 다른 고객 접점을 설계할 수 있다. 하나의 글로벌 파트너십을 기반으로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미디어 노출과 콘텐츠 제작, VIP 고객 경험을 동시에 만들 수 있는 셈이다. 루이 비통이 제작한 트로피 트렁크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한 트로피 보관함을 넘어 시상식이라는 F1의 상징적인 순간에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콘텐츠가 된다.
2025년부터 F1 공식 타임키퍼로 복귀한 태그호이어는 속도와 시간, 정밀성이라는 F1의 핵심 가치와 고급 시계 브랜드의 정체성을 연결한다. 태그호이어는 과거 모터스포츠에서 1000분의 1초까지 측정할 수 있는 계측 기술을 개발해온 역사를 갖고 있다. 루이스 해밀턴을 비롯한 스타 드라이버들의 패독 출근길 역시 패션 매체와 SNS가 앞다퉈 다루는 콘텐츠가 됐다. F1 경기장 자체가 자동차와 스포츠뿐 아니라 패션과 음악, 셀럽 문화가 교차하는 공간으로 변한 것이다.
그랑프리 없는 한국에도 팬 500만이 같은 F1의 미디어 전략은 한국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는 그랑프리도, 한국인 F1 드라이버도 없지만 F1이 추산하는 국내 팬은 500만 명을 넘어섰다. 2025년 개봉한 브래드 피트 주연의 <F1 더 무비>에는 국내에서 약 521만 명이 관람했고, 한국은 중국에 이어 이 영화의 두 번째로 큰 해외시장이 됐다.
국내에서 F1과 팬을 잇는 주요 미디어 창구는 쿠팡플레이다. 쿠팡플레이는 2022년부터 F1을 한국어로 중계했고, 2023년부터 프랙티스와 퀄리파잉, 본 레이스까지 그랑프리 전 과정을 제공하는 중계를 본격화했다. 2026년에는 전 세션을 4K로 제공하고 해외 현장 제작도 확대했다. 올해 10월 싱가포르 그랑프리까지 누적 9개국에서 16차례 현장 리포팅과 중계를 진행하게 된다.
2025 영국 그랑프리 현장. <사진 쿠팡플레이> 단순 경기 송출을 넘어 자체 콘텐츠도 늘리고 있다. 실버스톤 트랙 워크와 핫랩 체험, F1 관계자와 드라이버 인터뷰를 제작하고, 그랑프리 공백기에는 미공개 인터뷰와 경기 분석, 시즌 규정 해설, 실시간 Q&A를 묶은 별도 콘텐츠를 선보였다.
쿠팡플레이 관계자는 “F1은 이제 막 국내에서 ‘마이너’를 넘어 하나의 ‘트렌디한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며 “과거에는 규칙과 기술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스포츠였다면 이제는 인물과 이야기를 따라가며 입문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됐다”고 설명했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전남 영암에서 한국 그랑프리가 열렸던 당시에는 대회 개최가 팬덤 형성보다 앞섰다. 지금은 순서가 반대다. OTT와 영화, SNS가 먼저 팬을 만들고 미디어가 시장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자동차 경주였던 F1이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IP로 변했다는 사실을 한국 시장도 보여주고 있다.
[박수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