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15) 울진 유영국 생가 | 한국 추상미술의 산실

    입력 : 2026.09.23 10: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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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국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다. 한국 모더니즘과 추상화의 선구자로 ‘산’을 모티브로 점, 선, 면, 색채로 구성된 비구상적 형태로서의 자연을 탐구했으며, 강렬한 원색과 기하학적 패턴의 면 분할, 구축적이고 절제된 구성을 특징으로 한다. 1930년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유영국은 유럽 모더니즘을 선도한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같은 작가의 기하학적 구성화법을 따랐다. 그 이후 외길로 추상회화를 고집스레 추구했다. 시기별로 화법의 변모가 있지만, 추상 작품들을 보면 산 모양의 삼각형을 주축으로 자연의 이미지를 단순화하려는 의도가 뚜렷하다. 검은 선의 굵은 윤곽을 치기도 하고, 기하학적 색면을 엄격히 재구성하기도 했다. 거친 터치를 살리거나, 초록색· 붉은색·노란색·보라색·파랑색 등의 채색으로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빛을 표현하기도 했다. 유영국은 산, 바다, 나무, 기와지붕, 해와 달, 황혼 등 고향 울진을 비롯한 한국의 산수를 추상으로 담아냈다.

    산 레드(Red), 1994, 캔버스에 유채, 260×200cm.
    산 레드(Red), 1994, 캔버스에 유채, 260×200cm.

    경북 동해안 끝자락, 유영국의 생가
    안채 대청
    안채 대청

    유영국은 강릉 유씨(江陵劉氏)로 증조부 유한열이 1840년대 원주에서 울진으로 이주해 터를 잡았다. 그 후 조부 유재업이 농업과 수산업, 특히 부산 지역과 상거래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였다. 울진 객사 동쪽의 성곽 망루가 있었던 곳을 뜻하는 말루(抹樓) 마을에 강릉의 고택을 이전해 부잣집의 위세를 갖추었다. 부친 유문종(1866~1951년)은 천석꾼에 50t급 어선 2척, 양조장 3개를 운영하면서 ‘울진 유부자’로 불렸다. 유문종은 한학자이면서 의식 있는 애국자로 사재를 털어 의병들에게 독립군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근대 학교인 울진제동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나눔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상생의 경영 방식은 경주 최부잣집과 쌍벽을 이루었다.

    안마당
    안마당

    유영국은 말루의 부잣집에서 유문종의 4남 4녀 중 여섯번째,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읍내와 바닷가 사이 솔밭 언덕 아래 대숲이 우거진 고가로 중부 지역의 전형인 ‘ㅁ’자 평면구조의 기와집이다. 유영국의 맏형 유영준의 아들 ‘유상옥 가옥’으로 등록되어 있다가 울진군에서 구입하여 유영국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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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ㅁ’자집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방들이 ㅁ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고 지붕이 모두 연결된 것으로 경상북도 내륙지방의 대표적인 가옥구조이다. 안쪽 중앙에 대청마루를 배치하고 그 서쪽 옆에 세로로 안방과 부엌이 ㄱ자로 꺾여 놓인다. 마루 동쪽 옆에는 건넌방이 시설되고 그 앞으로 꺾이면서 사랑방과 사랑 부엌이 붙는다. ㅁ자집은 집 가운데 외부로 열린 마당이 있어 높은 사생활 보호 효과와 아늑함을 준다. 특히 우수한 방어와 단열 효과 있다. 외부 창문을 줄이고 안마당 쪽으로 창을 내어 외풍을 막고 외부 시선을 차단할 수 있다. 집 전체가 복도나 마루로 사방이 연결되어 각 방으로 이동하기 쉬운 편리한 동선이 장점이다.

    회화의 바탕이 된 울진 바다와 산

    유영국에게 산과 바다는 과거인 동시에 미래였다. 그가 어린 나이에 산에 오르는 것은 산 너머 더 높은 시선을 통해 먼 곳을 보기 위함이며,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저 바다 너머에 있는 다른 세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울진공립보통학교(현 울진초등학교)를 마치고 1931년에 상경한 유영국은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중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하였다. 제2고보 4학년 때 반장을 맡게 되었는데 일본인 담임 선생이 유영국에게 학생들을 감시한 후 잘못한 학생을 고발하라고 하였다. 매번 그런 학생이 없다고 보고하자 선생은 그를 구타하였고, 억울한 매질에 화가 난 유영국은 졸업을 1년 남겨두고 자퇴를 하였다. 그러나 제2고보를 다니던 중 일본인 미술 교사 사토우 구니오(佐藤九二男)에게 감화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신미술을 가르치며 자유분방한 교사였던 그에게 반한 화가 제자들이 상당하다. 유영국·장욱진·권옥연·임완규·김창억 등으로, 2·9 동인을 결성해 스승을 기렸을 정도다.

    작품(Work), 1976, 캔버스에 유채, 45.5×53cm.
    작품(Work), 1976, 캔버스에 유채, 45.5×53cm.

    여기서 그는 유럽의 추상미술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다. 일본 군국주의 체제 아래 청년 미술인들은 다각형으로 쪼갠 화면의 입체파 큐비즘이나 거친 변형의 야수파 포비즘을 비롯해 표현주의·초현실주의·추상주의 등 유럽에서 불어온 1910~1920년대 전위적 예술형식에 열광했다. 청년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공했던, 즉 이들을 주축으로 ‘자유미술가협회(自由美術家協會)’라는 단체가 창립되었다. 유영국은 1930년대 중반 재학시절 부터 두터운 종이나 목판 릴리프로 기하학적 도형을 시도하며 추상(抽象)의 세계를 맛보았다. 1937년에는 김환기, 이중섭 등과 함께 제1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2회전 때 받은 자유미술가협회상이 유영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작가의 길과 화업(畵業)을 추상미술로 고정한 계기였다.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파노라마

    유영국은 1943년 태평양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울진에 머물렀다. 해방될 때까지 특고경찰의 감시를 피해 다니며 큰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 1948년 김환기의 배려로 서울대학교 미술부 교수가 되었고, ‘신사실파(新寫實派)’에 참여하면서부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신사실파는 유영국, 김환기, 이규상 세 명의 젊은 화가가 결성해 1948년 첫 전시 이후 세 번의 전람회로 마무리되었다. 해방 후 국내에서 처음으로 구성된 순수 화가들의 동인이자, 추상 미술의 효시인 단체전이었다. 추상적인 선과 점, 그리고 색채로 한국적인 모더니즘(Modernism)을 구축한 이들은 마음으로 느낀 대로 표현하는 것이 새로운 사실, 즉 ‘신사실’이라 표방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사실’과 다른 새로운 개념으로, 김환기가 지은 명칭이다. 한국전쟁 기간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고 울진 죽변에 터를 잡은 유영국은 어업과 양조장 사업을 벌였다. 집안 선대의 피를 이어받아 사업 감각이 좋았던 듯, ‘망향소주’로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이후 죽변항구에 인접한 읍내 번화가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 당시 낙향했을 때에도 이중섭, 장욱진 등을 포함해 부산에서 1953년에 연 제3회 신사실파 전시에 동참하였다. 1, 2회 때와 달리 3회 출품작들의 제목은 ‘산맥’ ‘나무’ ‘해변에서 A’ ‘해변에서 B’ 등이어서 주목된다. 이들은 구상적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화면에 산이 등장하기 시작한 점 때문이다. 이 시절부터 산은 유영국 회화의 브랜드가 되었다.

    작품(Work), 1987,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작품(Work), 1987,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1955년에 다시 상경해 김환기를 따라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잠시 역임했다. 서울 북쪽 산세와 한강을 굽어보는 약수동, 우장산 아래 화곡동 등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동시에 서울과 울진을 오가며 사업도 계속하면서 화가로서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영국은 한국 화단에서 추상과 전위를 표방하는 젊은 세대 화가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존재로 떠올랐다. 현대미술가연합 대표를 맡으며, 1962년 신상회(新像會)를 조직하는 등 현대미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64년 돌연 그룹 활동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선언하고, 15점의 신작으로 첫 개인전을 개최하여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64년 첫 개인전 이후 유영국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어 마치 노동을 하듯 꾸준히 작품 제작에만 몰두하였다. 그는 60세가 될 때까지 스스로 ‘60세까지는 기초를 공부했다’고 할 만큼 끊임없는 조형 실험을 계속하였다. 이처럼 유영국은 스스로 60세까지 기초공부를 하고 이후 자연에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가겠다고 생각해왔는데 공교롭게도 그러한 전환이 이루어질 무렵 극도의 병고(病苦)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61세가 되던 해인 1977년 심장박동기를 달고 살기 시작하여 2002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타계할 때까지 8번의 뇌출혈, 37번의 병원 생활을 계속했다. 그런 와중에도 자연으로 좀 더 부드럽게 돌아간 평화롭고 아름다운 그림은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자 뿌리

    유영국은 산, 바다, 나무, 기와지붕, 해와 달, 황혼 등 고향 울진의 산수를 추상으로 담아냈다. ‘산의 화가’로 불리는 유영국은 “산에는 뭐든지 있다.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 그리고 다채로운 색”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산은 고향 울진의 산임을 고백하였다. 1960년에 발표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산 고장에서 자란 탓일 게다. 내가 자란 마을에서 평탄한 길을 걸러 산모랭이 하나를 돌아가면 끝없는 바다였다. 바다를 둘러싸고 첩첩이 헐벗은 산과 옷 입은 산들이 보였다. 바다를 옆에 끼고 돌아다보는 산줄기들은 또 달랐다. 아침저녁 봄여름가을겨울 무수히 변했었다. 지금도 가끔 내 시골로 간다. 늘 보아온 고향의 산과 바다지만 그것을 한바퀴 돌아오면 생활에서 지친 울적했던 마음도 사라진다. 내가 그림에 산이라는 화제를 자주 쓰는 것도 이런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영국은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라고 하였다. 유영국은 스스로 산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유영국의 자연을 바탕으로 한 기하학적 추상화에는 장대한 자연의 숭고미가 응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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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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