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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14) 충남 예산 추사고택 | 학문을 예술처럼, 예술을 학문처럼
입력 : 2026.08.27 10:4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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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사랑채. 예산 추사고택은 추사 김정희의 집이다.
김정희(1786~1856년)는 시·서·화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이자 예술가이다. 학문적으로 경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 성리학의 정도를 걸으면서 실학자로서 금석학과 고증학의 일가를 이루었다. 문학적으로 시와 문장의 대가였으며, 글씨는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창출한 졸박청고(拙樸淸高·필체가 서투른 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였다. 그림은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이처럼 그는 학문을 예술처럼, 예술을 학문처럼 자유로이 그 경계를 넘나들었던 학예주의자이다.
김정희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벌열 가문인 경주 김씨 출신이다. 고조부 김흥경(金興慶)은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며,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가 가장 사랑했던 화순옹주(和順翁主)와 혼인한 부마 월성위(月城尉)이다. 조부 김이주(金頤柱)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이 모두 일찍 죽고 자식이 없자 생부인 김한정(金漢禎)을 떠나 양자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신으로서 대사헌과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아버지는 김노경(金魯敬)은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판서를 비롯하여 이조·공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기계 유씨(杞溪兪氏) 유준주(兪駿柱)의 딸이다. 아우는 김명희(金命喜)와 김상희(金相喜)이다. 김정희는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적되었다. 이처럼 김정희의 경주 김씨 가문은 순조 연간의 세도정치 시절에 안동 김씨, 풍양 조씨, 풍산 홍씨 등과 자웅을 겨루는 가세(家勢)를 자랑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후일 가화(家禍)를 입는 굴레가 되기도 하였다. 김정희는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53세경까지 거의 20년 동안 관료의 이력을 순탄하게 쌓았다. 급제한 후에 대교(待敎),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과 같은 청요직을 받았고, 41세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 51세에는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53세에는 형조참판에 올랐다. 그의 관료 이력 중 충청도 암행어사는 일생에 있어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했다. 암행어사가 되어 충청도 비인의 현감으로 있던 김우명(金遇明)을 파직했는데, 이에 김우명이 앙심을 품었는지 1830년에 김노경을 탄핵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노경은 고금도로 3년의 유배형을 받았고, 1840년에는 윤상도(尹尙道)의 옥사로 인해 김정희 본인이 제주도 대정현(大精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9년 동안의 유배형을 마치고 서울 용산 본가에 머물렀다. 그런데 1851년는 친구 권돈인(權敦仁)의 예론에 동조했다가 유배형을 받아 다시 함경도 북청(北靑)으로 보내졌다. 이듬해에 돌아와 과천에서 만년을 지내다 1856년에 세상을 떠났다.
산수화를 추상적 단계로 끌어올려
추사고택 대문. 김정희는 20대 이전부터 박제가(朴齊家)로부터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북학을 경험하였다. 24세이던 1809년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 군관으로 수행했다. 이 사행에서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비롯하여 당시 청의 학술을 이끌었던 학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학설을 듣고 배울 기회를 얻었다. 이들과의 학술적 인연은 귀국 후에도 이어져 김정희의 학술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김정희는 국내 유적들을 답사하고 자료를 모아 분석하면서 금석학을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실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두 점의 조사와 분석이다. 그리고 그의 경학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에서 김정희는 북경에서 만났던 옹방강과 완원의 학설을 수용하되 자기의 경험과 사유로써 소화하여 자기화하는 데 이르렀다.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학자로서 유가 경전과 함께 불경도 중시했다. 따라서 당대의 선승들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고 학술과 사유를 그들과 공유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초의선사, 백파선사와 같은 선승들이고, 이들과 논쟁하면서도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했다. 서예가 김정희의 서예는 예서가 대종을 이룬다. 제주 유배기를 거치면서 김정희의 자가풍을 잘 보여주는 추사체는 통속적 서예관과 대중의 심미안을 깨뜨린, 파격의 미학이 근간을 이루는 개인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의 편액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작품이다. 화가로서 김정희는 문인화풍의 남종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세한도(歲寒圖)’는 역관 이상적에게 준 그림으로, 고단한 자아가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느낀 감동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산수화를 추상적인 단계로 끌어올린 듯한, 극단적인 생략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김정희의 묵란도는 1834년경에 그린 난초 그림을 모아 엮은 ‘난맹첩(蘭盟帖)’이 대표작이다. 그런데 묵란도의 백미는 북청 유배를 마치고 과천으로 돌아와 지낼 때 ‘유마경’의 사상을 담아낸 ‘불이선란도’다. “그림의 이치가 곧 불교의 선과 통한다”고 했던 김정희는 서화일치의 이상을 넘어 화선일치의 경지를 불현듯 일궈냈다.
산수화를 추상적 단계로 끌어올려
김정희, 필 불이선란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는 20대 이전부터 박제가(朴齊家)로부터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북학을 경험하였다. 24세이던 1809년 친아버지 김노경이 동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 군관으로 수행했다. 이 사행에서 김정희는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비롯하여 당시 청의 학술을 이끌었던 학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학설을 듣고 배울 기회를 얻었다. 이들과의 학술적 인연은 귀국 후에도 이어져 김정희의 학술 형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김정희는 국내 유적들을 답사하고 자료를 모아 분석하면서 금석학을 연구했다. 그 대표적인 결실이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실린 신라 진흥왕 순수비 두 점의 조사와 분석이다. 그리고 그의 경학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저술에서 김정희는 북경에서 만났던 옹방강과 완원의 학설을 수용하되 자기의 경험과 사유로써 소화하여 자기화하는 데 이르렀다.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다. 유학자로서 유가 경전과 함께 불경도 중시했다. 따라서 당대의 선승들과 깊은 교유 관계를 맺고 학술과 사유를 그들과 공유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초의선사, 백파선사와 같은 선승들이고, 이들과 논쟁하면서도 도반(道伴)의 관계를 유지했다. 서예가 김정희의 서예는 예서가 대종을 이룬다. 제주 유배기를 거치면서 김정희의 자가풍을 잘 보여주는 추사체는 통속적 서예관과 대중의 심미안을 깨뜨린, 파격의 미학이 근간을 이루는 개인 서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봉은사 ‘판전(板殿)’의 편액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작품이다. 화가로서 김정희는 문인화풍의 남종화에 일가를 이루었다. ‘세한도(歲寒圖)’는 역관 이상적에게 준 그림으로, 고단한 자아가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느낀 감동을 이미지로 형상화한 걸작이다. 산수화를 추상적인 단계로 끌어올린 듯한, 극단적인 생략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다. 김정희의 묵란도는 1834년경에 그린 난초 그림을 모아 엮은 ‘난맹첩(蘭盟帖)’이 대표작이다. 그런데 묵란도의 백미는 북청 유배를 마치고 과천으로 돌아와 지낼 때 ‘유마경’의 사상을 담아낸 ‘불이선란도’다. “그림의 이치가 곧 불교의 선과 통한다”고 했던 김정희는 서화일치의 이상을 넘어 화선일치의 경지를 불현듯 일궈냈다.
태어나고 떠난 곳…
추사고택 사랑채에서 바라본 전경. 김정희가 살았던 고택은 여러 곳이다. 서울에 있었던 경저(京邸)로는 월성위궁과 용산 본가, 과지초당이 있으며, 지방에 있던 향저(鄕邸)는 예산 추사고택이다. 월성위궁은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가 1732년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한 뒤 궁을 떠난 1734~1735년께 마련됐다. 영조는 자신의 잠저였던 창의궁 곁에 월성위궁을 마련하여 화순옹주 내외가 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양아들 김이주, 양손자인 김노영, 양증손자인 김정희가 80년가량 살았다. 김정희가 큰아버지 김노영에게 양자로 가면서 월성위궁에는 김정희와 생부 김노경 가족이 살았다. 그러나 1830년 김노경이 탄핵을 받아 전라도 고금도로 유배를 가게 되자 월성위궁이 폐궁되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김노경이 내의원제조로 제수되면서 다시 가족들이 월성위궁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마침내 김정희가 1840년 제주로 유배된 뒤 이 집은 몰수됐고, 월성위 부부 사당만 고종 때까지 유지됐다. 월성위궁이 있었던 곳에 건립된 표지석 ‘김정희 본가 터’는 종로구 적선동 8-4번지에 있다. 서울 용산 본가는 김노경이 살았던 본가이다. 이곳은 김노경이 유배 가며 월성위궁이 폐궁되자 용산에 마련한 고택이다. 김정희 가족은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가면서 월성위궁이 몰수되자 용산 본가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김정희는 1849년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예산 추사고택에 며칠 머물다가 용산 본가로 돌아왔다. 그러나 용산 본가에는 동생 김명희와 김상희가 살고 있어 별도로 마포 강변에 집을 마련하였다.
추사고택 사당. 과천에 있는 과지초당은 김정희가 생을 마감한 곳이다. 과지초당(瓜地草堂)은 1824년 생부인 김노경이 과천에 산과 밭을 구입하여 선영(先塋)으로 삼고 별서(別墅)로 지은 것이다. 청계산 옥녀봉 아래 돌무께(주암동)에 있는 과지초당은 경관이 빼어난 정원과 숲, 그리고 아름다운 연못을 갖추어 추사 가문의 절정을 상징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제주도 유배로 가세가 기울면서 김정희 일가는 용산 본가를 떠나 과천 과지초당에 머물렀다. 과지초당은 김정희가 1852년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856년 서거하기까지 말년 4년여간을 지내며 마지막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다. 과천 주암동에는 추사로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2013년 6월 3일 개관한 추사박물관이 추사로 78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추사가 말년 4년간 머물렀던 과지초당과 직접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다는 독우물이 복원되어 있다.
예산 추사고택은 월성위 김한신의 향저(鄕邸)이다. 영조는 김한신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충청도 예산 용궁리 일대의 토지를 하사하고 충청도 53개 군현마다 한 칸씩 건립 비용을 분담케 하여 53칸짜리 집을 짓게 했다. 예산 추사 고택은 중부와 영남 지방에 분포한 전형적인 대갓집형 가옥이다. 이후 오랫동안 후손들이 거주하였다가 1968년 다른 사람에게 매도된 것을 1976년 4월 충청남도에서 매수하여 24칸으로 복원하였다. 추사고택 근처에 김정희의 묘가 있으며, 김정희가 고조부 김한신의 묘 입구에 심었다는 백송도 있다. 추사고택은 야트막한 용산(74.3m) 발치 비탈에 영당, 안채, 사랑채, 솟을대문 순으로 동서로 길게 자리한다. 앞으로는 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 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 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사당은 추사 김정희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고택 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전체적인 지맥의 생기가 안채로 이어지도록 배치되어 있다. 사당에는 김정희의 절친한 벗인 권돈인(權敦仁)이 직접 쓴 ‘추사영실(秋史影室)’ 현판이 걸려 있으며, 영정은 제자인 이한철이 그렸다. 고택의 대문은 일반 사대부 집의 형식을 따라 건축되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리고 가운데 칸인 문은 좌우 칸보다 높게 한 솟을대문으로 하여 평문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사랑채 앞마당에 세워져 있는 돌기둥은 해시계로, 김정희가 직접 제작하였으며 앞면의 글자는 김정희의 아들 김상우가 ‘석년(石年)’을 추사체로 쓴 것이다. 한편 예산 추사고택은 김정희가 탄생한 생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조가 지극히 사랑한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김한신(金漢藎)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왕실의 내척(內戚)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경축 분위기에 싸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비스러운 탄생 설화도 갖고 있다. 아버지 김노경(金魯 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兪氏) 사이의 장남으로 24개월 만에 출생했는데, 그가 태어난 생가 뒤뜰에 있는 우물물이 말라버리고 뒷산인 오석산의 원맥 팔봉산의 초목이 모두 시들었다가 그가 태어나자 샘물이 다시 솟고 초목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김정희가 탄생한 곳은 서울에 있던 외가였다.
추사 김정희 묘. <사진 예산군청> 예산 추사고택은 김정희가 영면한 곳이다. 추사고택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김정희의 묘가 있다. 구릉을 2단으로 정지한 후에 안치하였다. 김정희의 묘 앞에는 상석이 놓여 있으며, 오른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