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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열의 스테이블코인 돌아보기] (11) ‘뉴리치’의 새로운 노블레스 오블리주 국내 가상자산 기부의 명과 암
입력 : 2026.08.25 11: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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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가상자산 투자자가 1000만 명을 넘어선 2026년 현재, 가상자산은 단순한 투기 수단을 넘어 제도권 자산의 하나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과거 부동산이나 전통적인 주식 시장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세대와 달리, 디지털 자산의 성장과 궤를 같이하며 막대한 부를 이룬 이른바 ‘뉴리치(New Rich)’ 고액자산가들 사이에서 가상자산은 이미 핵심 포트폴리오로 편입된 지 오래다.
지난달 본 칼럼에서는 규제 사각지대를 이용해 해외 비영리단체로 자산을 우회 이전하려는 일부의 시도가 지닌 법적 위험성을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 고액자산가들 사이에서는 이와 반대로,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국내 비영리단체에 코인을 직접 기부하는 ‘가상자산 기부’가 새로운 트렌드로 강력하게 대두되고 있다.
고액자산가가 가상자산 기부에 주목하는 3가지 이유고액자산가들이 보유한 가상자산을 굳이 현금화하지 않고 코인 자체로 비영리단체에 직접 이전하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자산 관리의 효율성과 재무적 이점이 크기 때문이다.
첫째, 거래 비용의 혁신적인 절감이다. 가상자산을 기부하기 위해 거래소에서 매도하여 원화로 현금화하는 과정을 거치면, 필연적으로 매매 수수료와 거래 과정에서 발생하는 슬리피지(Slippage, 기대했던 가격과 실제 체결된 가격의 차이) 비용을 기부자가 부담해야 한다. 하지만 비영리단체의 지갑으로 코인을 직접 전송할 경우 이러한 불필요한 부대 비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 기부의 효용성이 극대화된다.
둘째, 전략적인 세제 혜택이다. 특히 2027년 가상자산 과세 시행을 앞두고, 세금 이슈에 민감한 고액자산가들에게 포트폴리오 재편과 합법적인 절세는 가장 중요한 화두다. 가상자산으로 기부하더라도 현금 기부와 동일하게 법정기부금 또는 지정기부금으로서 연말 세액공제 혜택이 적용된다.
셋째, 기부금 영수증 가액 산정 시의 유리함이다. 현행법상 개인이나 사업자가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받을 때, 장부가액(취득원가)과 시가(기부 시점의 시장가치) 중 더 큰 금액을 기준으로 기부액이 산정된다. 가상자산의 가치가 상승한 상태에서 기부할 경우, 높은 시가를 기준으로 공제 혜택을 받을 수 있어 세무 및 자산 운용 측면에서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2025년 규제 완화: 비영리법인의 가상자산 현금화 시대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가상자산 기부 문화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가장 큰 원인은 구조적 제약에 있었다. 과거에는 법인 명의의 가상자산 거래소 원화 계좌 발급이 사실상 막혀 있어, 비영리단체가 기부자의 뜻을 받아 코인을 수령하더라도 이를 매도하여 현금화할 방법이 없었다. 기부를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는 절름발이 구조였던 셈이다.
그러나 2025년 2분기를 기점으로 금융위원회 등 정책 당국의 규제 완화 조치가 시행되며, 공익법인의 가상자산 현금화가 합법화되는 결정적 전환점을 맞이했다. 정부는 투명한 자산 이동과 기부금 시장의 건전성 유지를 위해 매우 촘촘하고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우선, 5년 이상의 업력을 갖추고 정기적인 외부 회계감사를 받는 신뢰도 높은 ‘외감법인’만이 가상자산 기부를 받을 수 있도록 수령 단체의 자격을 제한했다. 또한 단체 내부에 기부의 적정성과 구체적인 현금화 계획을 검토할 ‘기부금 심의위원회’를 의무적으로 구성하여 사전 심의를 통과해야만 한다. 기부 가능한 자산 역시 시장 질서 교란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원화 거래소 3곳 이상에서 거래가 지원되는 우량하고 검증된 가상자산으로만 한정된다. 무엇보다 비영리법인은 수령 즉시 해당 가상자산을 매도하여 공익목적사업 전용계좌로 원화 출금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준수해야 한다.
현실의 장벽: 아직은 복잡한 ‘기부의 길’비영리단체의 현금화 루트가 열리며 제도적 기틀은 훌륭하게 마련되었지만, 일선 현장에서 기부자들이 체감하는 장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신용카드 결제나 은행 계좌이체 등 전통적인 기부 방식과 비교할 때, 절차가 지나치게 번거롭고 경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가상자산을 기부하려면 무려 6단계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기부자가 모금 기관에 전화를 걸어 기부 의사를 밝히고, 복잡한 기부개요서를 별도로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이후 단체 내부 심의위원회의 검토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뒤, 통과 승인이 나야만 비로소 법인의 지갑 주소를 공유 받아 송금을 진행할 수 있다. 수량 기반의 약정 방식도 기부자에게는 상당한 심리적, 실무적 부담이다. 기부자는 ‘1억원 어치’와 같은 가치 기준이 아니라 ‘1 비트코인’, ‘10 이더리움’ 등 코인의 절대적인 개수를 기준으로 약정해야 한다. 가상자산 특유의 가격 변동성 때문에 약정 시점과 실제 전송 시점의 시세가 크게 달라질 수 있음에도, 한 번 수량을 정하면 이를 임의로 수정하기 어려운 경직된 구조다.
대중화를 위한 해법 : 전용 인프라와 원 클릭 시스템의 구축진정한 의미의 가상자산 기부 대중화를 위해서는 제도의 안착을 넘어선 기술적 뒷받침이 절실히 요구된다. 사전 심사 서류를 대폭 간소화하고, 거래소 앱이나 별도의 플랫폼 내에서 ‘원 클릭’으로 기부할 수 있는 핀테크적 시스템 도입이 필수적이다. 고무적인 사실은, 현재 필자를 포함한 학계 및 금융업계의 많은 전문가와 관계자들이 이 문제에 깊이 공감하며 적극적으로 지혜를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머지않아 비영리단체를 위한 가상자산 기부 전용 시스템이 새롭게 설계 및 구축되어 시장에 공개될 예정이다.
이 시스템이 도입되면 기부자는 복잡한 오프라인 서류 작업 없이 온라인상에서 직관적으로 기부를 약정할 수 있게 된다. 거래소와 비영리단체의 시스템을 API로 연동하여, 기부된 가상자산이 단체의 지갑으로 전송됨과 동시에 시장에서 즉각 매도 및 현금화가 이루어지도록 자동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기부자는 시세 변동 리스크에서 벗어나 본인이 의도한 ‘가치’만큼 정확히 기부할 수 있으며, 비영리단체는 복잡한 행정 및 관리 부담을 덜고 투명하게 공익 기금을 운용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지열 한양대 교수
한국자금세탁방지연구소 소장이자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자금세탁방지(AML)와 금융범죄예방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 연구와 함께 금융당국, 국제기구, 민간 금융기관 등에 자문을 하며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