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3] 지역 상생 | 호텔이 바꾸는 지역관광 모델

    입력 : 2026.08.19 17:45:23

  • 지방 호텔은 어떻게 ‘가야 할 이유’를 만드는가

    지방 호텔들이 지역의 사람과 문화를 엮어내는 로컬 콘텐츠 편집자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여행 트렌드는 단순한 장소 방문에서 테마와 여정 중심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유명 관광지를 구경하는 것보다 떠나는 순간부터 돌아오는 순간까지의 경험 전체가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느냐가 여행의 만족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 역시 한국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과 K-컬처, K-뷰티, 의료 서비스 등을 향유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이에 발맞춰 서울 시내 주요 호텔들은 다채로운 문화 콘텐츠 연계 상품이나 차별화된 웰니스 프로그램을 잇달아 시도하는 분위기다.

    문제는 지방이다. 매력적인 여정을 설계하려면 볼거리와 체험, 그리고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국내 지방 여행은 오랫동안 강원·제주·부산 등 특정 지역의 맛집 탐방 위주로 소비되어왔다. 이로 인해 지역 관광지의 높은 물가 문제와 함께 볼거리 및 체험 콘텐츠의 부족이라는 한계가 반복적으로 도마 위에 올랐다.

    라이프스타일 북스토어&카페 ‘전주산책’ 전경.
    라이프스타일 북스토어&카페 ‘전주산책’ 전경.

    이 공백을 메우기 시작한 주체가 바로 지방의 호텔들이다. 이들은 지역의 사람과 창작물, 숨은 이야기를 호텔이라는 플랫폼 안으로 끌어들여 독창적으로 편집하기 시작했다. 투숙객에게 공간을 넘어선 고유의 여정을 제안하며 이른바 ‘지역 콘텐츠의 편집자’로 거듭난 셈이다. 로컬의 가치를 자산화하며 이 흐름을 선도하는 맨 앞자리에 라한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지방에서 태어난 브랜드
    코너 스위트. <사진 라한호텔 포항>
    코너 스위트. <사진 라한호텔 포항>

    라한호텔은 사모펀드 운용사 한앤컴퍼니가 2017년 HD현대중공업으로부터 호텔현대를 인수한 뒤 새롭게 선보인 토종 호텔 브랜드다. 2018년 호텔 현대 바이 라한 울산을 리뉴얼했고, 2019년 라한호텔 포항을 그랜드 오픈했으며, 2020년에는 라한셀렉트 경주를 리뉴얼하고 라한호텔 전주를 새로 열었다. 불과 3년 사이 라한은 동해와 서남해를 잇는 5개 거점 호텔 체인으로 자리 잡았다. 라한은 ‘지역별 최적화’와 ‘브랜드 통일성’의 공존을 내세웠다. 다섯 호텔은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경주에서는 천년 고도의 자연과 유적을, 전주에서는 한옥마을 의 정취를, 목포에서는 다도해의 풍광을, 울산에서는 도심 속 올인클루시브의 편의를, 포항에서는 동해 일출의 서정을 전한다. 지역을 배경으로 소비하기보다, 콘텐츠로 끌어들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라한셀렉트 경주 전경.
    라한셀렉트 경주 전경.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라한셀렉트 경주다. ‘셀렉트’는 일반적인 것과 구별되는 라한의 최상위 브랜드를 뜻한다. 보문호수를 끼고 선 이 5성급 호텔은 430실, 9가지 객실 타입을 갖췄다. 그러나 라한셀렉트 경주를 단순한 대형 리조트로 부르기는 어렵다. 부대시설 하나하나가 ‘경주에 가야 할 이유’로 설계돼 있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 북스토어&카페 ‘경주산책’. <사진 라한셀렉트 경주>
    라이프스타일 북스토어&카페 ‘경주산책’. <사진 라한셀렉트 경주>

    1층의 라이프스타일 북스토어 겸 카페 ‘경주산책’이 대표적이다.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테마 서가에 1만여 권의 큐레이션 도서를 갖췄고, 로컬 디자이너의 소품과 굿즈가 공간을 채운다. 힙한 브랜드와의 공동 마케팅으로 팝업스토어와 북토크, 아트워크 협업 전시가 이어진다. 여기서 호텔은 잠을 파는 곳이 아니라 ‘북캉스’라는 체류 경험을 파는 곳이 된다. 로컬 푸드 편집숍 ‘경주상점’은 경주 로컬 맥주와 지역 쌀로 만든 조청 바른 유과를 팔고, 유럽 마켓 콘셉트의 셀렉트 다이닝 ‘마켓338’은 미쉐린 가이드와 방송에 소개된 셰프 브랜드를 한데 모았다. 라한셀렉트 경주는 ‘호텔 안에서 완성되는 경주 여행’을 지향한다.

    라한셀렉트 경주 이색 먹거리 편집숍 ‘경주상점’.
    라한셀렉트 경주 이색 먹거리 편집숍 ‘경주상점’.

    라한호텔의 야심찬 실험은 ‘로컬상생 프로젝트’다.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대형 호텔이 지방에 들어서면 관광객은 늘지만, 그 소비가 반드시 지역 경제로 흐르지는 않는다. 호텔이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할수록 골목 상권과 지역 창작자는 오히려 소외될 수 있다. 라한은 이 딜레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호텔을 ‘지역의 매력을 유통하는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길을 택했다. 로컬 청년 창업가 및 지역 예술가와 협업해 지역의 개성이 담긴 콘텐츠를 선보임으로써, 방문객에게는 로컬의 숨겨진 매력을 알리고 지역에는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경주는 이 프로젝트의 모범 사례다. 라한셀렉트 경주는 2024년 4월 30일 경주시 청년감성상점과 ‘청년 로컬 상품 판로 지원 및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경주시가 로컬 예술가를 발굴하고 지역 정착을 돕기 위해 운영하는 청년감성상점의 상품을, 호텔 내 북스토어 ‘경주산책’에 별도 매대를 마련해 전시·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첨성대와 다보탑을 젊은 감각으로 재해석한 책갈피, 눈금자, 연화문 단청 키링 같은 굿즈가 경주 여행을 기념할 이색 제품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협약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3년 연속으로 이어졌으며, 호텔이 매년 3000만원 이상의 상품을 직접 매입해 청년 창작자의 지속적인 활동을 돕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대형 상업 자본과 지역 청년 창작자가 연대해 청년 인구의 유출을 막고 지역 상권의 체질을 바꾸는, 작지만 분명한 실험이 경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지방 호텔이 콘텐츠에 사활을 거는 이유

    지방 호텔들의 이 같은 실험은 낭만이 아니라 생존의 문법이다. 서울 일부 도심 호텔만 호황이기 때문이다.

    자본시장이 지방 호텔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이유가 선명해진다. 알스퀘어 리서치센터에 따르면 2025년 서울·부산·제주 관광호텔 거래금액은 1조8000억원 수준으로 전년 대비 약 4500억원 줄었는데, 이 축소된 시장 안에서도 거래는 압도적으로 서울에 쏠렸다. 부산과 제주의 거래량은 전년과 유사하거나 오히려 적었다.

    글로벌 호텔 체인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국제 브랜드가 요구하는 수요 규모와 항공 접근성, 브랜드 스탠더드를 충족할 개발 여건이 서울에 집중돼 있는 탓에, 글로벌 체인들은 사업 전개를 서울에 몰아넣고 부산·제주에서는 일부 브랜드를 제외하면 존재감이 미미하다.

    서울의 호텔이 입지와 자본, 글로벌 브랜드의 후광 위에서 경쟁한다면, 지방의 호텔은 스스로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야 했다. 호스피탈리티 전문가들은 “지역 콘텐츠라는 토대 없이 호텔 하드웨어만 지방에 이식하는 개발은 성공하기 어렵다”라고 지적한다. 지역 콘텐츠와 매력적인 여정을 설계하지 못하면 호텔 준공과 동시에 수요 공백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지방 호텔들의 상생·재생 지형도
    차롱(제주 해녀들의 전통 도시락). <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차롱(제주 해녀들의 전통 도시락). <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여정의 콘텐츠가 부족한 지방에서, 서로 다른 성격의 호텔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역을 콘텐츠로 바꾸고 있다. 그 방식의 차이를 들여다보면 ‘지방 호텔 상생’의 지형도가 그려진다.

    부산 기장의 아난티 코브는 ‘목적지 창출형’이다. 해운대와 광안리에 가려 관광 지도의 변방에 머물던 기장은, 아난티 코브가 들어서면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지역으로 바뀌었다. 호텔이 기존 상권에 올라탄 것이 아니라, 없던 목적지를 새로 만들어낸 것이다. 리조트 내 서점 ‘이터널 저니’는 베스트셀러 중심의 진열을 걷어내고 수십 가지 테마로 서가를 짜고, 내부 전시와 심야책방, 북토크 같은 프로그램을 운영해 ‘북캉스’라는 체류형 문화 소비를 창출했다. 이제 아난티 코브는 단순한 리조트를 넘어 지역 사회·문화 활성화의 거점으로 평가받는다. 소비를 문화로, 문화를 다시 지역의 자산으로 전환한 사례다.

    야외 풀<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야외 풀<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제주 서귀포의 JW 메리어트 제주 리조트&스파는 ‘로컬 문화 큐레이션형’이다. 세계적 리조트 디자이너 빌 벤슬리가 인테리어를 맡은 국내 첫 호텔로 2023년 문을 연 이 리조트는, 제주의 자연과 정서를 공간 언어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제주의 삶을 프로그램으로 큐레이션한다. 해녀의 삶과 제주 식문화를 소개하는 ‘차롱: 해녀의 여우물 밥상’, 셰프와 함께 제주 향토 떡을 빚는 ‘제주 오메기떡 맹글기’, 로컬 다원 및 로스터리와 협업해 만든 시그니처 블렌드 커피, 그리고 제주올레 7코스 산책까지. 럭셔리 리조트가 제주라는 섬의 문화적 결을 투숙객의 여정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스파. <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스파. <사진 JW 메리어트 제주>

    충주 수안보의 유원재는 ‘지역 재생형’이다. 수안보는 고려부터 조선까지 임금이 탕치를 위해 찾던 ‘왕의 온천’이자 1970~80년대 신혼여행지로 호황을 누린 온천 마을이었지만, 이후 오랜 침체에 빠져 있었다. 유원재는 바로 그 침체한 수안보 한복판에 등장해, 잊힌 한국의 온천 문화를 되살리는 한국형 프리미엄 온천 호텔을 제시했다. 건축가 양진석은 한옥과 서원의 배치에서 영감을 얻어 객실마다 개별 정원과 온천을 갖춘 단층 구조로 공간을 설계했고, ‘건축이 지역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한 건축주와 오랜 고민을 거쳤다. 판교에서 KTX로 이어지는 접근성까지 더해지면서, 쇠락하던 온천 도시는 다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유원재 객실 노천탕 <사진 박영채>
    유원재 객실 노천탕 <사진 박영채>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이 향하는 지점은 하나다. 콘텐츠가 부족한 지방에, 호텔이 여정의 재료를 공급하는 것이다. 백상석 라한호텔 부사장은 “호텔은 지역관광을 설계하는 플랫폼”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앞으로 지방 호텔이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은 객실의 화려함이 아니라 지역 관광지와 맛집, 체험 정보를 얼마나 깊이 있게 연결하고 큐레이션하느냐에 달려 있다. 호텔이 지역이라는 콘텐츠의 편집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왜 지방 호텔들이 부대시설과 상생 프로젝트에 그토록 공을 들이는지 보여준다. 경주산책의 청년 굿즈 매대, 목포의 청년 기획 여행, 전주의 서학동 투어, 제주의 해녀 밥상, 수안보의 온천 문화 복원은 모두 ‘호텔 안에서 시작해 지역 전체로 확장되는 여정’을 설계하는 장치다. 투숙객은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는 것이 아니라, 호텔이 편집한 도시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호텔이 지역을 채우고, 지역이 호텔을 완성하는 이 선순환이야말로, 콘텐츠가 부족한 지방에서 여정의 시대를 여는 가장 현실적인 답이다.

    [박수빈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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