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r My Walking] 충북 영동 월류봉 둘레길 | 달이 머물다 간 자리, 이채로운 물윗길
입력 : 2026.06.18 14:27:31
-
둘레길 입구에 서면 길보다 소리가 먼저다. 물 많은 초강천이 굽이쳐 흐르는 소리는 아침 안개가 걷히는 시간의 찬 공기를 천천히 밀어낸다. 절벽 위의 당당한 봉우리가 초강천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면 쨍한 볕이 초여름 녹음에 짙은 색을 더한다. 달도 머물다 간다는 곳,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자리한 월류봉을 찾았다. 한천팔경(寒泉八景)의 으뜸으로 꼽히는 제1경이다.
금강의 지류가 연출한 수려한 산수
월류봉 광장 영동은 오래전부터 길이 지나는 땅이었다. 경부고속도로와 경부선 철도가 나란히 달리는 황간면은 영남과 충청을 잇는 관문이자 금강의 지류인 초강천과 석천의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그 황간의 서북쪽 2㎞ 지점에 월류봉(月留峰)이 솟아 있다. 높이 407m의 이 봉우리는 이름 부터 시적이다. 능선을 따라 달이 물 흐르듯 넘어가는 모습에 ‘달이 흘러 머문다’고 불리게 됐다. 5개의 봉우리가 연출한 절벽이 초강천 상류를 휘두른 지형은 밤이면 수면 위로 이어지며 달을 감싼다. 덕분에 찾는 이들도 많다. 영동군이 관리하는 16개 주요 관광지 중 단연 1등이다.
월류봉 광장에서 둘레길 입구로 나서면 비석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영동 송우암 유허비(충청북도 기념물)’라 새겨진 이 석비는 400여 년 전 주자학을 집대성한 학자이자 사상가 송시열이 서재를 짓고 연구하던 곳을 기린 유허비다. 송시열은 효종이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병자호란 이후 피폐해진 조선이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이론적인 방향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런 이가 한때 월류봉 아래에서 학문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그가 후학을 길렀던 곳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다. 한천팔경이란 이름도 이 정사에서 시작됐다. 월류봉을 제1경으로 사군봉, 산양벽, 용연대, 냉천정, 화헌악, 청학굴, 법존암으로 이어지는 8경은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송시열의 시선이 머문 풍경이 이름으로 남아 수백 년간 객을 모은 셈이다.
세 구간으로 나뉜 소릿길
총 8.4㎞의 월류봉 둘레길은 3개의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소리를 테마로 각각 물소리, 산새소리, 풍경소리길이라 이름 붙여졌는데, 일부러 귀를 기울여 걷다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전 구간에 큰 오르막이 없고 곳곳이 데크로 마무리됐지만 그렇다고 만만히 볼 곳도 아니다. 8㎞면 1만 5000보 이상 되는 거리다. 월류봉 광장에서 출발해 완정교까지 이어지는 1코스 여울소리길(2.7㎞)은 이름처럼 석천과 초강천이 합류하는 여울목의 물소리가 내내 귀에 감긴다. 광장에서 유허비를 지나 원촌리 마을 어귀로 들어서면 발아래로 맑은 물빛이 흐르고 저 멀리 다섯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원촌교를 건너면 석천 위를 걷는 데크 구간이 시작되는데, 이 또한 이채롭다. 목교(木橋)를 따라 걷다 보면 강에서 다슬기를 줍는 이들도 보이는데, 영동에서 올갱이라 부르는 다슬기는 이 지역의 대표 식재료다. 완정교에서 시작해 우매리까지 이어지는 2코스 산새소리길(3.2㎞)은 3개의 구간 중 가장 길고 한적하다. 농촌 마을 풍경과 숲길이 적절히 섞이며 충청도 특유의 조용하고 느긋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백화마을을 지나는 구간에선 마을의 일상이 스며든다. 트레킹이라기보단 동네 산책 코스랄까. 숲길에 들어서면 초강천이 가깝다. 강폭이 넓어지는 구간에선 수면 위로 산그림자가 내려앉는 풍경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숲속으로 들어설수록 또렷해지는 새소리도 2코스의 매력 포인트다.
천년 고찰로 이어지는 둘레길우매리에서 반야사까지 이어지는 3코스 풍경소리길(2.5㎞)은 석천을 가로지르는 징검다리를 건너며 시작된다. 곧바로 이어지는 편백나무 숲은 공기의 질감이 다르다. 잎이 촘촘히 차 있는 나무 아래 초록빛 그늘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숲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는 느낌은 시원하다. 그래서인지 왠지 발걸음도 가볍다. 3코스의 종착지이자 둘레길의 마침표는 반야사(般若寺)다. 백화산 아래 석천이 태극 문양으로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자리에 앉은 천년 고찰이다. 사찰 뒤편 산기슭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300m 길이의 돌너덜이 있는데, 그 형상이 꼬리를 곧추세우고 걸어가는 호랑이를 닮았다 해서 백화산 호랑이라 불린다. 반야사를 찾는 또 다른 이유다.
반야사, 세조의 은혜와 문수보살의 전설
반야사 반야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신라 성덕왕 대(720년경) 의상대사의 제자인 상원화상이 세웠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성주산문을 연 무염국사가 황간 심묘사에 머물 때 사미승을 보내 연못의 악룡을 몰아내고 못을 메워 창건했다는 이야기다. 어느 쪽이 정사(正史)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절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금의 반야사(般若寺)라는 이름은 조선 세조와 연관이 깊다. 세조가 복천암을 찾는 도중 반야사 중창 회향법회에 참석했을 때, 문수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세조를 영천(靈泉)으로 인도해 목욕하게 했고, 그 뒤 오랜 피부병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감응을 받은 세조가 ‘반야(般若)’라는 현판을 친필로 써 내렸고, 이것이 사찰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경내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보물 제 1371호의 삼층석탑이다. 원래 반야사 북쪽 석천계곡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전체 높이 315㎝, 백제와 신라 석탑 양식을 절충해 만든 고려시대 석탑이다. 그 곁에 나란히 선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여름이면 분홍빛 꽃을 100일 동안 피운다. 무학대사가 짚고 다니던 주장자를 이 자리에 꽂아두었더니 두 그루의 배롱나무가 자라났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반야사 경내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문수전(文殊殿)이다. 대웅전을 등지고 오른쪽 요사 뒤편 산길을 따라 20분 남짓 오르면, 100m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앉은 전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보살이 출현한 곳이라 전해지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 월류봉 둘레길
· 1코스 여울소리길 : 월류봉광장→원촌리마을→원촌교→석천물길→완정교(2.7㎞)
· 2코스 산새소리길 : 완정교→목교→백화마을→우매리(3.2㎞)
· 3코스 풍경소리길 : 우매리→반야교→편백숲→반야사(2.5㎞)[글 · 사진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