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지열의 스테이블코인 돌아보기] (9) 외환 감시망에 들어온 스테이블코인 ‘국경 없는 부의 이동’에 제동 걸리나

    입력 : 2026.06.17 17: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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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금융과 외환 역사에 획을 긋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지난 2026년 5월 7일, 가상자산의 국경 간 이전을 외국환 규제 체계 안으로 직접 편입시킨 ‘외국 환거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는 단순히 법 조항 몇 개를 고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1999년 외환위기의 파고 속에서 제정되어 오로지 법정통화와 제도권 금융기관(SWIFT)만을 상정하고 설계되었던 낡은 규제의 틀이, 비로소 블록체인이라는 국경 없는 신기술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본격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선언이다. 그간 가상자산, 특히 달러 등 법정화폐와 가치가 연동되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은 외환당국에 있어 가장 곤혹스러운 사각지대였다. 은행망을 거치지 않고 단 몇 분 만에 수백억원의 자금을 지구 반대편으로 보낼 수 있는 스테이블코인은 가상자산 시장의 기축통화 역할을 하며 급성장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스테이블코인은 ‘외국환’이나 ‘대외지급수단’으로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고, 이를 포착할 법적 근거가 부재한 상태로 사실상 방치되어왔다.

    580억원의 경고등: 테더(USDT) 환치기 사건이 남긴 숙제

    이번 법 개정의 결정적 트리거(Trigger)가 된 사건은 최근 관세청 서울본부세관에 의해 적발된 4200만 달러(약 580억원) 규모의 한·러 불법 자금 밀반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전말은 충격적이다. 러시아 국적의 불법 환전상 일당은 국내 거주자들로부터 편의점 무통장 송금 등 핀테크 서비스를 통해 자금을 끌어모았다. 이후 이 자금으로 대표적인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를 매수하여 러시아 현지로 전송하거나, 고객의 해외 가상자산 지갑으로 직접 꽂아주는 이른바 ‘신종 환치기’ 수법을 동원했다.

    전통적인 은행 송금이라면 엄격한 증빙 서류와 자금출처 조사를 거쳐야 했을 거액이 스테이블코인이라는 ‘디지털 골목길’을 통해 감시의 눈을 피해 빠져나간 것이다.

    ‘가상자산 이전업무’의 명문화와 ‘쇠몽둥이’가 된 형사처벌

    개정된 외국환거래법의 핵심 골자는 매도, 매수, 교환 등을 통해 가상자산을 대한민국과 외국 간에 이전하는 행위를 ‘가상자산 이전업무’로 명확히 정의한 데 있다. 이제 해외 송금을 지원하거나 국경 간 자산 이동을 매개하는 가상자산 거래소와 수탁(Custody) 업체 등 관련 사업자는 의무적으로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등록을 마쳐야 한다. 외환당국은 이들 등록 사업자로부터 실시간 혹은 주기적으로 거래 데이터를 보고받으며, 스테이블코인의 국경간 흐름을 은행 송금 수준으로 촘촘히 들여다보게 된다. 특히 이번 개정안에서 고액 자산가들이 가장 유념해야 할 대목은 제재 수위의 근본적인 변화다. 그동안의 낡은 규제 아래에서는 국경 간 송금 규정을 위반하더라도 5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는 이른바 ‘행정처분’에 그쳤다. 이 때문에 시장 일각에서는 위반 행위를 단순히 경제적 비용으로 인식하고 과태료로 무마할 수 있다는 안일한 인식이 존재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부당하게 재산상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불법적인 자금 이동을 주도한 자에게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이라는 무거운 형사처벌이 내려진다.

    이제 정부는 자금세탁과 자본 유출을 단순한 행정 위반이 아닌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중범죄로 보고 있다. 벌금만 내면 그만이던 ‘솜방망이’ 처벌 대신 감옥에 갈 수 있는 ‘징역형’을 도입한 것은, 법의 빈틈을 노려 사익을 챙기던 낡은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강력한 경고이다.

    고액 자산가들의 ‘조용한 우회로’는 완벽히 차단되었다. 이러한 규제의 변화가 고액 자산가들의 포트폴리오 관리에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무겁고도 명확하다. 더 이상 스테이블코인을 통한 ‘조용한 자산의 해외 이동’은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일부 자산가들은 여전히 개인 지갑(Non-custodial wallet)이나 개인 간(P2P) 거래를 활용하면 추적을 피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현재 자산가들을 포위하고 있는 감시망은 다층적이다. 첫째, 2026년부터 본격 가동된 OECD 주도의 ‘암호화 자산 자동정보교환체계(CARF)’에 의해 전 세계 48개국 주요 거래소에 보유한 자산 현황이 국세청에 자동 보고된다. 즉, 자산의 ‘보유 현황’이 이미 투명하게 노출되어 있다. 여기에 이번 외국환거래법 개정으로 자산의 ‘이동 경로’마저 외환당국의 현미경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특히 주의해야 할 지점은 향후 닥쳐올 세무 리스크다. 합법적인 등록사업자를 거치지 않고 증빙 없이 해외 지갑으로 이체된 코인은 향후 2027년 가상자산 과세 시 취득가액을 입증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만약 국세청이 해당 자산의 취득 경위를 불분명하다고 판단할 경우, 취득가액을 ‘0원’으로 산정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매도 금액 전체가 양도차익으로 간주되어 징벌적인 세금 폭탄을 맞게 된다.

    규제는 억압이 아닌 ‘신뢰의 인프라’다

    물론 시장 참여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규제가 혁신을 저해하고 막대한 컴플라이언스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국경 간 코인 유출입의 제도화는 대한민국 디지털 금융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다.

    외환 안정성은 국가경제의 최후 보루다. 모니터링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는 것은 국가 경제에 시한폭탄을 안기는 것과 같다.

    반면, 합법적인 감시망 속에서 투명하게 운영된다면 스테이블코인은 기존의 무겁고 느린 결제 구조를 단순화하고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는 최고의 대외지급수단으로 진화할 수 있다. 이번 외국환거래법 개정은 자산가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최후통첩이다. 이제 진정한 자산가의 품격과 지혜는 자산을 ‘숨기는 기술’이 아니라, ‘합법적이고 투명한 질서 위에서 자산을 당당하게 운용하는 정공법’에서 나온다.

    2027년 본격적인 과세와 이미 촘촘해진 글로벌 정보 공유 체계 속에서, 자신의 포트폴리오가 투명한 법적 테두리 안에 있는지 점검하는 것만이 부를 지키는 유일한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정지열 한양대 교수

    한국자금세탁방지연구소 소장이자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자금세탁방지(AML)와 금융범죄예방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 연구와 함께 금융당국, 국제기구, 민간 금융기관 등에 자문을 하며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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