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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中 공세 맞선 日 제조업 ‘연합작전’으로 돌파구
입력 : 2026.06.17 09: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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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토요타자동차와 독일 다임러 트럭 지주회사는 양사의 일본 내 트럭 자회사를 하나의 지주회사로 합병하기로 합의했다. 최근 일본 산업계의 흐름 가운데 하나가 동종 업체 간 합병과 통합이다. 한때 세계시장을 주름잡았던 일본 기업들이 이제는 경쟁사와 손을 잡고 ‘덩치 키우기’에 나서는 모습이다. 자동차 부품부터 반도체, 정밀소재 등 그동안 일본이 경쟁력을 유지해온 핵심 산업 전반에서 재편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중국 기업들의 거센 추격과 전기차(EV)와 인공지능(AI) 시대의 산업 구조 변화가 자리잡고 있다.
연합해 베어링 ‘세계 1위’최근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일본정공(NSK)과 NTN의 경영통합이다. 양 사는 2027년 10월 통합을 목표로 기본적인 내용에 합의했다. 양 사가 힘을 합치게 되면 시장점유율로 세계 1위가 된다. 베어링은 자동차와 산업기계, 로봇 등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으로 ‘기계산업의 쌀’로 불린다. 두 회사는 100년 가까이 경쟁해온 라이벌이지만, 이제는 경쟁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최대 고객인 일본 자동차 산업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토요타자동차를 제외한 일본 완성차 업체들의 글로벌 생산은 정체 또는 감소세다. 여기에 EV 전환으로 엔진 관련 부품 수요까지 줄어들고 있다.
결정타는 중국 업체들이다. 중국 베어링 기업들은 저가 제품을 앞세워 중저가 시장을 잠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력을 끌어올리며 중·고급 시장까지 넘보고 있다. 특히 세계 최대 EV 시장인 중국을 기반으로 성장하면서 규모의 경제까지 확보하고 있다. 일본정공과 NTN은 통합 이후 생산거점 재편과 공동조달, 인력 효율화 등을 통해 비용을 줄이고 연구개발(R&D) 투자 여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규모의 경제’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겠다는 계산이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다른 자동차 엔진 부품인 피스톤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본피스톤링(NPR)과 리켄은 2023년 경영통합을 결정했다. 양사는 자동차 엔진 핵심 부품인 피스톤링 분야에서 세계 점유율 약 30%를 확보하게 된다. 여기에도 EV 전환이라는 산업 변화가 작용했다. 일본 기업들은 단독 생존보다 통합을 통한 비용 절감과 신사업 투자 확대를 선택했다.
파워반도체 분야의 삼각 합병반도체 분야에서는 더욱 거대한 재편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반도체 기업 롬(ROHM)은 도시바·미쓰비시 전기와 함께 파워반도체 사업 통합 협의에 들어갔다. 당초 덴소가 약 1조3000억 엔 규모로 롬 인수를 추진했지만, 롬은 이를 거절하고 3사 통합을 택했다. 파워반도체는 전기차와 데이터센터, 전력 인프라에 필수적인 차세대 핵심 부품이다. 특히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시장 확대가 예상된다. 하지만 이 시장 역시 미국과 유럽, 중국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하다. 독일 인피니언과 미국 온세미가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중국 기업들은 저가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일본 업체들의 고민은 명확하다. 기술력은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개별 기업 규모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밀릴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본 파워반도체 기업들의 세계 점유율은 대부분 5% 미만이다. 결국 일본은 ‘연합 전략’을 통해 규모의 경제 확보에 나섰다. 과거에는 같은 일본 기업끼리 경쟁하며 시장을 키웠다면, 이제는 국내 경쟁을 줄이고 글로벌 경쟁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산업 전략이 바뀌고 있는 셈이다.
완성차 업계서도 경영 통합상용차 업계에서도 최근 대형 경영 통합 사례가 나왔다. 일본의 대표 트럭 업체인 히노자동차와 미쓰비시후소는 2026년 통합을 목표로 최종 합의했다. 토요타와 독일 다임러트럭까지 참여하는 사실상 ‘일본·독일 연합’ 구조다. 배경은 명확하다. 전기트럭·수소트럭·자율주행 상용차 개발에는 막대한 투자 비용이 들어간다. 과거처럼 엔진과 조립 기술만으로 경쟁하던 시대가 끝났다는 의미다. 트럭 업계조차 “혼자서는 미래차 투자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통합에 나선 것이다. 새 통합 회사는 직원 수만 4만 명을 넘는 대형 그룹으로 재편된다. 완성차 업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혼다와 닛산은 한때 경영통합 협상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협상은 결렬됐지만, 이 논의 자체가 일본 자동차 산업의 위기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혼다·닛산·미쓰비시차 연합이 현실화됐다면 세계 3위권 자동차 그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핵심 이유 역시 중국 EV 업체와 테슬라의 공세였다. 특히 BYD 같은 중국 업체들이 배터리·반도체·소프트웨어를 수직계열화하면서 가격과 속도 경쟁에서 일본 업체들을 압박하고 있다는 점이 컸다. 반도체 소재 분야에서도 재편이 이어지고 있다. 현재 일본 반도체 소재 업계에서는 “국가대표 기업 만들기” 흐름이 강하다. 대표 사례가 레조낙(Resonac)이다. 쇼와덴코가 히타치케미컬을 인수하며 탄생한 회사인데, 최근에는 추가 인수·합병(M&A) 가능성까지 공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이런 흐름을 사실상 지원하고 있다. 반도체 소재 기업 JSR은 정부계 펀드 산하로 들어가 비상장화됐고, 향후 업계 재편 중심축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성공 여부는 미지수실제로 일본 제조업 내부에서는 “혼자 살아남는 시대는 끝났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AI·EV·로봇 시대로 산업 구조가 급변하면서 필요한 투자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첨단 공장과 반도체 생산라인 구축에는 수조 엔 단위 자금이 필요하다. 단독 기업 차원에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여기에 일본 특유의 인구 감소와 내수 축소도 부담이다. 결국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생산 규모 확대와 비용 절감, 공급망 통합이 필수라는 계산이 나온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 기업들의 재편 방식이 한국과 다르다는 점이다. 한국은 대기업 그룹 중심 수직계열화가 강하지만, 일본은 서로 다른 기업들이 연합 형태로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이 배경에는 일본 제조업 특유의 문화도 있다. 일본 기업들은 독립성과 기업 역사, 조직 문화를 중시해 완전 흡수합병보다는 지주회사 방식이나 ‘대등 통합’을 선호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과거보다 훨씬 강도 높은 재편 논의가 늘고 있다.
다만 일본식 ‘연합 전략’이 성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일본 기업들은 전통적으로 의사결정 속도가 느리고 조직 문화 차이도 크다. 실제로 과거 일본 기업 간 통합은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기업 간 이해관계 조정과 주도권 다툼이 길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승훈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