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 1] 증시 어디까지 | 8천피 고지 찍고 급등락 1만피 전망 두고 ‘同床異夢’
입력 : 2026.06.01 17:16:52
-
서울 여의도의 딜링룸에서 숫자는 말보다 빨리 표정을 바꾼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전광판의 주인공은 ‘8000’이었다. 한국 증시가 새 문을 열었다는 흥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세계 AI 공급망의 중심에 섰다는 자신감, “이제는 코스피 1만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런데 5월 19일 오후, 같은 화면에 뜬 숫자는 달랐다. 코스피 7271.66. 하루 낙폭 3.25%. 코스닥 1084.36. 원·달러 환율 1507.8원.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6조2853억원어치를 팔았다. 삼성전자는 1.96% 내린 27만5500원, SK하이닉스는 5.16% 밀린 174만5000원으로 마감했다.
하루 뒤인 5월 20일 오전에도 시장의 긴장은 풀리지 않았다. 코스피는 장중 7053.84까지 밀리며 7100선을 내줬고, 원·달러 환율은 1512.8원까지 올라 한 달 반 만의 고점을 다시 건드렸다. 주식시장에서는 “8천피”라는 단어가 아직 입에 익기도 전에 “7천 선 방어”라는 말이 먼저 돌아왔다.
환호가 너무 빨랐던 시장, 조정은 늦게 오지 않았다이번 조정은 나쁜 뉴스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좋은 뉴스가 너무 많이, 너무 빨리 가격에 들어간 뒤 찾아온 숨 고르기에 가깝다. 코스피는 7000선을 넘어선 지 9일 만에 장중 8000선까지 올라섰다. 6000선에서 7000선까지 70일이 걸렸지만, 7000선에서 8000선까지는 9거래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상승을 이끈 힘은 분명, 반도체였다. AI 서버용 HBM 수요, 범용 D램·낸드 가격 회복,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 추정치 상향이 지수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지수의 폭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5월 14일장 마감 기준 연초 이후 시장수익률을 웃돈 업종은 전기·전자, 건설, 제조, 증권 등 네 개에 그쳤다. 돈은 들어왔지만, 넓게 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강한 업종으로 더 빨리 몰렸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5월 중순 코스피 급락을 두고 “지수 상승 속도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봤다. 7000선에서 8000선 까지 7거래일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반도체와 자동차 정도만 코스피 성과를 웃돌 만큼 쏠림이 심했다는 설명이다.
상승장에서는 이런 쏠림이 시장의 힘처럼 보인다. 투자자는 ‘오르는 종목을 더 사야한다’고 느끼고, 펀드는 벤치마크를 따라가기 위해 비중을 늘린다. 그러나 같은 구조는 하락장에서 약점이 된다.
증권업계 한 전문가는 “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서고 호르무즈 리스크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 외국인들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상승세가 과하다고 느낄 수 있다”라며 “많이 오른 종목일수록 먼저 팔리고, 지수에서 비중이 큰 종목일수록 매도가 지수 전체를 끌어내린다”라고 설명했다.
변심한 외국인의 ‘셀코리아’외국인 매도는 이번 하락의 가장 직접적인 장면이다. 5월 19일 하루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6조2853억원을 순매도했다. 반대로 개인은 5조6297억원, 기관은 5277억원을 사들였다. 외국인의 매물이 시장을 누르고, 개인과 기관이 이를 받아내는 구도가 하루 종일 이어졌다.
하지만 “외국인이 팔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매도가 한국 회피인지, 차익 실현인지, 환율 방어성 리밸런싱인지에 따라 시장의 의미는 달라진다. 5월 초 까지만 해도 외국인은 한국 시장을 밀어올린 주체였다. 코스피가 7000선을 돌파한 직후인 5월 7일부터 14일까지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서 6거래일 연속 26조2867억원을 순매도했지만, 그 사이 개인이 23조2086억원을 순매수하며 지수 상승을 받쳤다. 상승의 주체와 하락의 주체가 날짜별로 엇갈리면서 시장은 더 복잡한 얼굴을 갖게 됐다.
외국인 입장에서 보면 한국 증시는 올해 가장 뜨거운 수익률을 낸 시장 중 하나였다.
증권업계 한 전문가는 “수익이 많이 난 시장은 좋지만, 포트폴리오 안에서는 위험도 커진다”라며 “한국 비중이 커지고, 그 안에서도 반도체 비중이 커지면 글로벌 펀드매니저는 자연스럽게 비중을 조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평가했다.
5월 20일 원·달러 환율이 장 초반 1510원 선을 돌파했다.<사진 연합뉴스> 여기에 환율이 붙으면 계산은 더 날카로워진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를 넘어서면 외국인 투자자는 주가 손익뿐 아니라 환손익까지 함께 본다. 주식을 팔면 원화가 약해지고, 원화가 약해지면 다시 주식을 줄이고 싶은 압력이 커진다. 이 순환이 반복되면 시장은 실적보다 먼저 환율에 반응한다. 5월의 한국 증시가 그랬다. 기업의 이익 전망이 단번에 무너진 것은 아니었지만, 환율과 외국인 매도가 동시에 움직이자 시장은 먼저 몸을 낮췄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외국인이 9거래일 연속 순매도한 뒤 삼성전자 노사 협상 기대감에 낙폭을 일부 회복했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중동 지정학 리스크가 여전히 잔존한다고 봤다. 즉 이날 장세는 단순한 차익실현이 아니라 외국인 수급, 삼성전자 개별 이슈, 유가와 지정학 리스크가 겹친 결과였다.
한국 증시 할인율 높인 주범 ‘금리와 유가’반도체 랠리의 논리는 이익이다. AI 서버가 늘고, HBM 수요가 커지고, 범용 메모리 가격까지 살아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은 이전 사이클보다 더 오래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 논리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국내외 증권사들은 메모리 이익 사이클이 예상보다 길어질 가능성을 반영해 코스피 전망치를 끌어올렸다.
다만 주식의 가격표는 이익만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할인율도 가격표에 들어간다. 미국 장기금리가 오르면 미래 이익의 현재 가치는 낮아진다. 특히 AI 반도체처럼 먼 미래의 성장 기대가 현재 주가에 크게 반영된 업종일수록 금리 변화에 민감하다. 5월 20일 오전 미국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4.668%로 2025년 1월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국내 증시는 장중 3% 이상 밀렸다.
민경원 우리은행 연구원은 “장기금리 상승이 이어지는 가운데 위험자산 리밸런싱으로 원·달러 환율이 1510원 저항선을 시험할 수 있다”라고 봤다. 그는 미국 반도체주 하락은 진정됐지만 장기 국채금리 상승이 계속되면서 성장주와 신흥국 주식시장 밸류에이션 부담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진단했다.
호르무즈해협 내 한국 선박 26척 중 1척이 5월 20일 해협을 빠져나온 것으로 확인했다. 미국·이란 전쟁 발발 이후 88일 만이다.<사진 연합뉴스> 유가도 같은 방향으로 시장을 압박한다. 중동 리스크가 길어지면 유가는 물가를 자극하고, 물가는 금리인하 기대를 늦춘다. 금리인하가 늦어지면 성장주의 밸류에이션은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결국 반도체 이익은 위를 보고 있는데, 할인율은 아래를 누르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시장이 흔들리는 이유는 이 두 힘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3월의 급락 경험은 배경으로 남아 있다. 시장은 이미 한 차례 지정학, 환율, 외국인 매도의 조합을 겪었다. 5월 조정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재가 새로워서가 아니라, 투자자들이 그 악재의 작동 방식을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같은 뉴스라도 고점권 시장에서는 더 크게 들린다. 호황의 전광판은 밝지만, 밝은 화면일수록 작은 균열도 선명하게 보인다.
하반기 한국 증시 전망 ‘동상이몽’
지금 한국 증시의 전망표에는 6000, 9000, 1만, 1만2000이 함께 적혀 있다. 같은 시장을 보면서도 숫자가 이렇게 멀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반기 코스피를 바라보는 투자자들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는 메모리 이익을 보고, 누구는 금리를 본다. 누구는 밸류업과 외국인 접근성 개선을 보고, 누구는 환율과 지정학을 본다.
JP모건은 코스피 목표치를 기본 시나리오 9000, 강세장 시나리오 1만, 약세장 시나리오 6000으로 제시했다. 골드만삭스와 NH투자증권은 코스피 전망치를 9000으로 봤고, 현대차증권은 연말 목표치를 9750으로 상향하면서 최대 1만2000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모건스탠리의 시각은 보다 넓은 밴드에 가깝다. 모건스탠리는 연말 코스피 밴드를 6500~9500으로 제시했고, 하반기 강세장에서는 1만도 가능하다고 봤다. 약세장에서는 6000까지 열어뒀다. 흥미로운 점은 낙관의 근거가 반도체 하나에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모건스탠리는 IT 뿐 아니라 에너지 안보, 방산, 건설, 자동차, 로봇 등 산업 사이클이 다년간 이어질 수 있다고 봤다.
유안타증권은 더 적극적이다. 유안타증권은 올해 하반기 코스피 밴드를 7600~1만으로 제시했다. 김용구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매크로 순항, AI CAPEX 슈퍼 사이클, 반도체 업황·수출·실적 호조가 이어지는 한 한국이 2028년까지 글로벌 및 이머징마켓에서 비중 확대 1위 시장으로 군림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낙관론의 공통분모는 세 가지다. 첫째, 메모리 이익이 과거 사이클보다 오래간다는 믿음이다. 둘째, 한국 기업의 밸류에이션이 여전히 글로벌 경쟁사 대비 낮다는 판단이다. 셋째, 밸류업 정책과 외국인 접근성 개선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일 수 있다는 기대다. 이 관점에서 보면 5월의 조정은 강세장 종료가 아니라 과속 이후의 정비 시간이다. 차가 멈춘 것이 아니라, 너무 빨리 달린 엔진이 잠시 열을 식히는 장면이다.
반대로 신중론은 네 가지를 본다.
첫째,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에서 안정되지 못하면 외국인의 환헤지 비용과 심리 부담이 커진다. 둘째, 미국 장기금리가 4%대 중후반에서 더 올라가면 성장주 밸류에이션은 다시 압박받는다. 셋째, 중동 리스크가 유가와 물가를 자극하면 금리인하 기대는 뒤로 밀린다. 넷째, 상승 업종이 반도체와 일부 산업재에 머물면 지수는 높아져도 시장의 체력은 약해질 수 있다.
결국 하반기 전망의 차이는 ‘코스피가 어디까지 갈까’보다 ‘무엇이 먼저 꺾일까’의 문제다. 낙관론은 이익 추정치가 금리와 환율 부담을 이길 수 있다고 본다. 신중론은 할인율과 수급이 이익 전망보다 먼저 가격을 흔들 수 있다고 본다. 같은 1만피 전망이라도, 어떤 하우스는 반도체 이익의 장기화를 근거로 들고, 어떤 하우스는 밸류업과 산업재 확산을 함께 본다. 같은 6000선 하단이라도, 어떤 전망은 지정학 리스크를, 어떤 전망은 외국인 포지션 축소와 환율을 더 크게 보고 있다.
“엔비디아 사듯 삼전 산다”외국인 통합계좌가 바꾼 K-주식의 문턱
외국인 통합계좌는 해외 투자자가 국내 증권사 계좌를 직접 만들지 않고도 해외 증권사 명의 계좌를 통해 한국 주식을 일괄 매매·결제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삼성증권과 하나증권이 이미 서비스를 운영중이고, 유안타·메리츠·미래에셋·신한투자·NH투자·KB증권 등도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핵심은 한국 증시의 수급 체질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이다. 윤유동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외국인 통합계좌가 한국도 글로벌 표준에 한발 가까워지는 계기”라고 평가하며 “외국인 개인투자자 기반이 다변화되면서 국내 증시의 글로벌 유동성 확대에 기여할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자금 유입 기대도 있다. 권순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주요 브로커리지 예탁자산 일부에 접근성이 열리고 미국 가계의 해외주식 비중 가운데 일부가 국내로 유입된다고 가정하면, 중기적으로 약 30조원 규모의 신규 자금 유입 여지가 있다”라고 분석했다.
다만 문턱이 낮아진 시장은 장점만 갖지 않는다. 해외 개인투자자의 주문이 글로벌 브로커 앱을 통해 들어오면 한국 주식의 투자자 저변은 넓어진다. 동시에 수급의 반응 속도도 빨라질 수 있다. AI 반도체 기대가 커질 때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 자금이 빠르게 몰릴 수 있지만, 환율과 금리, 지정학 리스크가 커질 때는 같은 통로로 빠르게 식을 수도 있다. 한국 증시가 글로벌 개인투자자의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한국 증시의 호흡도 글로벌 SNS와 브로커 앱의 속도를 닮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외국인 통합계좌는 장기적으로는 유동성 확대의 통로지만, 단기적으로는 변동성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특히 한국 증시가 반도체 대형주에 쏠린 상태라면 새로 들어오는 해외 개인 자금 역시 처음에는 익숙한 이름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 접근성 개선이 시장 전체의 저변 확대로 이어지려면, 반도체 밖에서도 외국인 투자자가 이해할 만한 성장 스토리와 거래 유동성이 함께 커져야 한다.
[박지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