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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형 기자의 트렌드가 된 브랜드] 에르메스 | 에루샤의 꼭짓점이자 조용한 럭셔리의 정점
입력 : 2026.05.27 10: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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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위의 명품이라 불리는 에르메스의 기세가 무섭다. 글로벌 경기침체와 가파른 물가상승으로 소비 심리가 위축된 뉴 노멀 시대에도 에르메스만큼은 예외다. 고가 명품의 상징으로 꼽히는 에루샤(에르메스·루비이통·샤넬) 중 가장 견고한 성벽을 구축하며 한국 시장에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역대급 실적에 회장님도 한국행
버킨 백 소재 지난 3월 31일, 에르메스코리아의 국내 전 매장이 임시 휴업에 나섰다. 이날 롯데·신세계·현대·갤러리아 등 국내 주요 백화점에 입점한 에르메스 매장 18곳이 일제히 문을 닫았다. 에르메스코리아 측은 “당사 내부 일정” 때문이라며 “온라인 스토어 주문 건 역시 배송이 지연될 수 있으며 내달 1일 정상영업이 재개될 것”이라고 공지했다. 업계에는 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의 방한 일정이 맞물렸다고 알려졌다. 그렇다고 해도 명품 브랜드가 전 매장을 동시 휴점하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즈음 업계의 한 관계자가 이런 말을 전해왔다. 그는 “글로벌 1위 럭셔리 브랜드의 회장이 직접 방한하는 건 시장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인데, 그보다 전 매장이 하루 쉰다는 게 더 주목받는 상황”이라며 “기대 이상의 실적이 나온 것 같다”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보기 좋게 적중했다. 지난 4월 13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공개된 감사보고서를 살펴보면, 에르메스코리아는 지난해(2025년 1~12월) 매출 1조1251억원, 영업이익 3055억원을 기록하며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16.7%, 영업이익은 14.5%나 늘었다.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조원을 돌파하며 ‘1조 클럽’에도 합류했다. 명품 수입사의 한 임원은 “온라인 판매율도 있겠지만 단 18개의 매장으로 1조원이 넘는 매출을 달성한 건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며 “초고효율 영업도 비결이겠지만 그보다 사려는 이들이 줄 서 있다는 게 더 큰 이유”라고 전했다. 파는 이가 준비한 제품보다 사려는 이가 원하는 양이 월등히 많다는 설명이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187년의 역사, 말안장에서 명품 왕좌까지
에르메스의 역사는 한 가족과 그들의 가업을 그린 드라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발점은 1837년 프랑스 파리의 작은 공방이었다. 당시 창업자인 티에리 에르메스는 말안장과 마구용품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다. 1880년 그의 아들 샤를 에밀 에르메스가 오늘날 브랜드의 성지로 떠오른 포부르 생토노레 24번가로 공방을 옮긴 후 가업은 마구 제조업으로 확장된다. 1918년 자동차가 출현하자 3대 경영자인 손자 에밀 에르메스는 교통수단의 변화를 예측해 새로운 생활 양식을 구상한다. 그는 말안장을 만들 때 사용하던 독특한 박음질인 ‘새들 스티치’를 고품질의 가죽 제품과 여행 가방에 적용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에르메스 스타일이 탄생한다. 마구 전문점이 패션 하우스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이후 1925년 최초의 남성 의류 골프 재킷, 1937년 첫 번째 실크 스카프가 잇따라 출시됐고, 가죽 마구 기술은 그대로 버킨 백, 켈리 백의 DNA가 됐다. 현재 에르메스는 가죽과 마구 제품, 여성 실크, 남성 실크, 여성·남성 레디 투 웨어, 슈즈, 벨트, 주얼리, 시계, 향수, 뷰티, 가구 및 라이프스타일, 테이블웨어, 쁘띠 아쉬(petit h) 등 16개 메티에(Me… tier·전문 분야)를 거느린 종합 럭셔리 하우스로 성장했다.
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현재 에르메스 가문의 6대손인 악셀 뒤마 회장이 2013년부터 CEO를 맡고 있고, 피에르-알렉시 뒤마 아티스틱 디렉터가 크리에이티브를 총괄하고 있다. 에르메스를 여타 명품 그룹과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가족 경영과 독립성이다. 지난 2010년 초 LVMH가 파생상품을 통해 에르메스 지분 17.1%를 매입하며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했을 때, 에르메스 가문은 지주회사를 신설해 50.2% 지분을 결집하고 악셀 뒤마를 CEO로 내세우며 가업을 사수했다. 4년간의 법정 싸움이 이어졌지만 결국은 LVMH가 손을 들었다. 당시 “아름다운 여성을 유혹하고 싶다면 뒤에서 덮치면 안 된다”는 에르메스 측의 일침은 지금도 업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2025년 글로벌 매출 160억 유로 돌파… 나 홀로 독주에르메스는 지난해 글로벌 연간 매출 160억200만 유로(약 27조4000억원)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9%나 성장했다. 영업이익은 65억6900만 유로로 7% 늘었다. 글로벌 경기침체 우려와 중국 소비 둔화, 미국 관세발 파고 속에서도 성장세엔 흔들림이 없었다. 핵심 메티에인 가죽 제품과 마구 부문은 70억7000만 유로(+9.5%)로 전체 매출의 약44%를 차지하며 성장을 견인했다. 의류와 액세서리가 45억2500만 유로(+2.7%)로 뒤를 이었다. 에르메스의 실적이 돋보이는 건 경쟁사들이 겪는 어려움 때문이다. LVMH의 2025년 매출은 하락세였고 케링그룹은 구찌의 부진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했다. 에르메스만 홀로 우상향한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비롯한 글로벌 명품 시장에서 에르메스의 판매량이 유독 도드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유통 전문가들이 꼽는 첫째 이유는 ‘희소성’이다. “돈 있어도 못 산다”는 버킨 백의 일화가 이를 대변한다.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버킨, 켈리, 콘스탄스 등 프리미엄 가방 라인은 매장에 간다고 해서 살 수 있는 제품이 아니다. 향수, 스카프, 홈웨어 등 여타 메티에의 구매 이력이 충분한 충성 고객에게 우선 구매 기회가 주어진다. 이 과정이 역설적으로 소비자의 구매 욕구를 극대화한다. 둘째는 ‘자산 가치’다. 올 3월 국세청이 서울옥션과 손잡고 진행한 압류 물건 공매에서 에르메스의 켈리35는 450만원에서 시작해 1200만원(낙찰 추정가), 쉐도우 버킨35는 350만원에서 시작해 3000만원(낙찰 추정가)을 기록했다. 사면 오르는 명품이란 인식이 이러한 결과로 이어졌다. 셋째는 수직 통합으로 진행되는 ‘품질 통제’. 에르메스 제품의 74%는 프랑스에서 제작된다. 가죽 제품은 100% 프랑스산이다. 생산되는 전 제품의 55%는 하우스 내부나 독점 공방에서 만들어진다. 단순한 원산지 마케팅이 아니다. 에르메스는 직접 무두질 공장을 소유하고, 최상급의 가죽을 선점하기 위해 타 브랜드의 가방 판매 가격보다 더 높은 원가를 투자한다고 알려졌다. 가죽 가공부터 봉제, 하드웨어 도금까지 전 공정을 직접 통제해 품질의 일관성과 희소성을 동시에 확보한다. 이를 위해 프랑스 9개 지역에 60개의 워크숍과 교육시설을 운영(2025년 기준)하고 있고, 현재 3개를 추가 건설 중이다.
넷째 요소는 아이러니하지만 ‘조용한 마케팅’이다. 에르메스는 그 흔한(?) 브랜드 앰배서더를 두지 않는다. 광고보다 장인정신과 제품으로 승부하는 전략이다. 해마다 선정하는 연간 테마가 전 메티에의 공통 언어가 되고 매장 디스플레이는 예술가들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담는 소형 극장이 된 다. 이 모든 유기적인 관계가 에르메스라는 세계를 구성한다.
한국 진출 29년…
1997년 에르메스코리아를 설립하며 한국에 진출한 에르메스는 2006년 11월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앞에 전 세계 4번째 메종인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를 개장했다. 직접 생산한 가구와 집기 등을 활용해 집처럼 아늑하게 꾸민 이 공간은 현재 판매 공간이자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지하 1층에 현대미술을 위한 전시 공간인 ‘아뜰리에 에르메스’와 ‘카페마당’, 1층부터 3층까진 에르메스 컬렉션을 선보이는 매장으로 구성돼 있다. 설계는 전 세계의 에르메스 메종을 디자인한 고(故) 르나 뒤마가 진행했다.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인 고(故) 장-루이 뒤마 회장의 부인이자 건축가였던 그는 메종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해당 국가와 도시, 거리를 연구했다고 전해진다. 메종 에르메스 도산 파크 역시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됐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현재 에르메스코리아가 가장 주목받는 요인 중 하나는 뛰어난 실적이다. 에르메스코리아가 공개한 감사보고서에는 매출원가율과 영업이익률이 기재돼 있다. 지난해 에르메스코리아의 상품 매출원가는 약 5963억원. 전체 매출의 53.0% 수준이다. 들여온 비용 보다 훨씬 높은 부가가치를 붙여 판매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발생한 매출총이익에서 인건비, 임차료, 광고선전비 등을 제외한 영업이익이 3054억원에 달한다. 영업이익률로 환산하면 약 27.1%나 되는 높은 수치다. 특히 특수관계자 거래가 눈에 띈다. 에르메스코리아는 제품 매입 등을 위해 프랑스 본사와 계열사에 약 5787억원을 지불했다. 이익의 상당 부분이 원재료비와 로열티 성격으로 본사에 귀속됐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2025년 에르메스코리아는 2350억원이라는 대규모 배당을 실시했다”며 “당기순이익이 2408억원인 걸 감안하면 순수익의 97% 이상을 주주(에르메스 본사)에게 돌려준 셈”이라고 전했다. 이에 반해 감사보고서 상 기부금 지출은 6억6487만원에 불과했다. 이 관계자는“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등 한국 미술에 공헌하는 등 사회적 활동에 나서는 점은 분명한 공헌이지만 수천억원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상황에 한국 재투자 등 직접적인 나눔에 인색하다는 비판은 풀어야 할 숙제”라고 설명했다.
[안재형 기자 · 사진 에르메스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