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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 기자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SK하이닉스 HBM| ② “어떤 역할도 마다 않고 직접 뛰겠다”
입력 : 2026.05.11 16:5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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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26일 SK하이닉스 이천 본사에서 공식 출범식이 이뤄졌다. 최태원 SK 회장, 김문수 경기도지사 등 내외빈이 참석했다.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가 공식 출범한 날은 2012년 3월 26일. 하이닉스 반도체를 공식 인수한 기업은 SK텔레콤이었다. 지분 인수 계약이 이뤄진 건 4개월 전인 2011년 11월 10일이었다. 문서보존 기간이 지나 이사회 의사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참석했던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당시 분위기는 진통에 진통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만큼 하이닉스는 바닥까지 추락한 기업이었다. 2002년경엔 마이크론에 팔린 뻔했다. 그걸 지켜내긴 했으나 은행이 관리하는 기업이라 제대로 투자하고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MB) 때 기회가 왔다. 국세청장을 지내고 청와대에 들어간 백용호 비서실장이 MB에게 ‘LG그룹 인수’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LG그룹이 전자 분야를 하고 있었고 과거 반도체와 인연이 있어 인수의 최적임자로 판단한 것이다. 하이닉스는 외환위기 직후 현대전자가 LG반도체를 인수하며 지금의 외형을 갖추게 된 회사. 1983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설립한 현대전자는 1999년 정부의 강력한 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LG반도체를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반도체 경기가 급전직하하고 외환위기 이후 부채가 급증하면서 현대전자는 재무위기를 맞게 된다. 결국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가고 채권단이 공동관리하는 회사로 바뀐다. 이때 회사명이 하이닉스로 바뀐다. 2001년의 일이다. 채권단은 그 후 하이닉스 매각 작업에 착수하는데 미국의 마이크론이 강력한 후보자로 떠오른다. 그러나 국가기간산업을 외국 회사에 넘길 수 없다는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매각은 불발에 그친다. 그 후 공교롭게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면서 회생이 조짐이 보이다가 2008년 금융위기 후 다시 경영악화로 매수자 찾기에 나선다. 백 비서실장이 고(故) 구본무 회장과 은밀하게 접촉한 건 이때였다. 백 실장의 회고.
“제가 아이디어를 내니까 MB가 그럼 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구본무 회장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하루이틀 말미를 달라고 하더군요. 기다렸는데 돌아온 답변은 노(No)였습니다. 구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불확실하고 LG는 안정적 업종을 선호한다. 지금 큰 리스크를 질 때가 아닌 것 같다’며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그 후 효성 등 몇몇 후보가 거론됐으나 마지막에는 SK가 단독 입찰하는 국면까지 갔다. 많은 기업인들이 상황을 비관적으로 봤지만 최태원 SK 회장은 위기 속에서 기회를 본 것이다. 사실 SK 내부에선 반대 기류가 강했다. 그걸 오너인 최 회장이 밀어붙였다. 11월10일, 인수 결정을 내려야 하는 마감일이었다. 얼마나 내부 반대가 심했으면 이사회를 오후 3시에야 열었다. <슈퍼 모멘텀>에 따르면 그는 “지도가 보였고 타이밍이 됐다고 생각했다”라면서 “내가 밀고 가겠다”라는 말로 난상토론의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어쩌면 최 회장의 머리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이오버랩됐을지 모른다. 선경그룹을 창업한 선친 최종현 회장에겐 반도체의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이 그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이 <슈퍼 모멘텀>에 나온다.
“1970년대 반도체는 진공관을 대체하는 트랜지스터 자체였습니다.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집적회로 수준이었지만 최종현 선대 회장께서는 그 중요성을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1981년 해산될 때 당시 회사(선경반도체)는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 뛰어들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을 하며 더 확실한 기회인 에너지 산업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선경은 ‘섬유에서 석유까지’라는 수직통합 전략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선경반도체의 짧은 실험이 있어서 ‘언젠가 다시 반도체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습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출범식이 있었던 날은 제법 쌀쌀했다. 아침엔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졌다. 이천 본사에서 오렌지색 바탕에 ‘SK하이닉스 출범식’이라고 쓰인 밋밋한 행사용 현수막을 앞에 놓고 주요 임직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 회장은 감회가 새로운 듯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설립하고 반도체 산업 진출을 모색하다가 석유파동으로 꿈을 접었던 SK가 30년이 지난 오늘 메모리 반도체 세계 2위 하이닉스를 새 가족으로 맞았다”라며 “이는 SK역사에 한 획을 긋는 중대한 발걸음”이라고 처음으로 포부를 밝혔다.
“앞으로 SK는 책임감을 갖고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면서 더 크게 하이닉스를 키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저부터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습니다. 저는 SK이노베이션과 SK텔레콤 이상으로 도약하는 SK하이닉스를 꿈꾸고 있습니다. 세계 일류 반도체 기업으로 거듭나서 국가경제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행복을 나누는 SK하이닉스를 만들어 가겠습니다.”
최 회장의 이 발언을 귀담아들은 임직원은 아마도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당시 SK하이닉스가 오늘 같은 모습으로 변할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지금 다시 들으면 전율이 느껴지는 취임 일성이었다.
첫날 밤은 이천 공장 숙소에서
최태원 회장은 SK하이닉스의 공식 출범식이 치러진 2012년 3월 26일 치맥 파티에 직접 참석했다.그날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천에 있는 영비관에서 묵는다. <사진: SK하이닉스> 출범식을 마치고 그는 직원들과 어울렸다. 이천 본사 근처 호프에서 열린 행사에 검은색 점퍼 차림으로 들러 치맥 파티를 했다. 거기서 최 회장이 직원들에게 전달한 키워드는 ‘행복’. 이날 행사명이 ‘Happy Talk Open Event’였다.
“여러분을 만나서 정말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보다 내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이 자리에서 여러분을 만나면서 생겼다. 앞으로 행복을 키워가자. 하이닉스가 행복할 때까지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라는 이 말을 이날 두 번이나 반복했다. 500cc 잔에 맥주를 가득 채워 테이블을 돌면서 직원들과 건배를 했다.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그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천에 있는 영빈관에서 하루를 묵는다. 정주영 명예회장, 그리고 고(故)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가끔 묵었던 숙소였다.
호프 행사가 있기 직전 최 회장은 SK 식구가 된 하이닉스 임원진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박 사장의 회고.
“SK그룹 사장단들과 하이닉스 부문장들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최 회장은 별로 말씀을 많이 하시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메모지를 꺼내 적은 대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자료를 프린트해 줬으면 했는데 그런 건 안 하시고 정돈된 발언만 하셨습니다. 그게 SK그룹에서 늘 하던 ‘투비(To-Be) 모델’이었습니다.
SK가 인수한 하이닉스에 투비 모델을 이식시키는 융합 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를 실행하는 핵심 책임자가 송현종 미래전략실장(현 SK하이닉스 사장)이었다. 그는 2011년 4월까지 SK텔레콤 경영지원실장을 맡아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중용된 인물. SK텔레콤이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시점에 그는 하이닉스 미래전략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송 사장은 당시 최 회장이 던진 메시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회장이 던진 화두는 ‘EVA+’였어요. 그러니까 경제적 부가가치(EVA; Economic Value Added)가 플러스가 돼야 한다는 얘기죠. 하이닉스는 생존 자체가 문제 였던 회사이고 ‘EVA+’ 달성을 지속 생존의 최소 조건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는 모든 SK 계열사들이 중장기 전략의 근간으로 투비 모델을 수립하던 때라서 당연히 하이닉스에도 투비 모델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반도체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재정의했다. 지금 당장은 생존이지만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는 해야 한다. 빠른 추격자에서 시장 선도자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TSV 1등 개발이 퍼스트무버가 되겠다는 SK하이닉스의 첫 핵심 전략이 된 배경이다. 2012년 첫 번째 투비 모델이 제시한 19개 실행 전략 중 첫 번째가 D램 1등 개발이었다. 특히 하이닉스는 메모리 미세화 기술이 곧 한계에 부닥칠 것이며 이후 메모리 시장은 칩에 미세한 구멍을 뚫고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실리콘관통전극(TSV) 기술이 선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훗날 HBM의 핵심 기술이 되는 이 TSV 기술을 세세계 최초로 개발해 D램 시장의 기술 리더십을 확고히 하는 것. 이것이 퍼스트무버가 되겠다는 2012년 하이닉스의 핵심 전략이었다.
최태원의 원려심모(遠慮深謀)… 엔지니어를 사장으로2012년 말. 통상 연말이면 SK그룹 사장단 인사가 발표된다. 대부분 계열사들 인사가 났는데 유독 하이닉스 만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들 현 사장인 권오철 체제로 간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그러다가 해를 넘겨 2013년 2월에야 SK하이닉스 사장 인사가 난다. 새로운 사령탑을 맡은 사람은 SK하이닉스 연구개발 부문을 총괄한 박성욱 부사장. 울산대학교 재료공학과를 나와 카이스트에서 같은 분야로 석·박사를 한 그는 전형적인 엔지니어다. 미국 생산법인에 근무했던 것을 제외하면 거의 연구소에 몸담았다. 개발과 제조에 관한 디테일을 꿰뚫고 있는 인물. 미국 법인에 근무할 때도 주로 엔지니어링을 총괄했다. 현대전자가 설립된 게 1983년인데 박 사장은 그 이듬해인 1984년에 입사해 현대에서 채권단으로, 또 채권단에서 SK로 넘어오면서 주인이 바뀌는 와중에도 묵묵하게 개발과 제조 부문의 연구 파트를 지켰던 인물이다.
최 회장과 개인적 인연도 거의 없었다. 박 사장은 “SK가 하이닉스를 인수하기로 최종 결정하기까지는 만난 적이 거의 없다”라면서 “당시 나는 개발과 기술 총괄이었고 그룹과의 소통은 권 사장이 맡았다”라고 한다. 그냥 연구만 한 엔지니어다.
그는 2010년, 그러니까 채권단 관리 시절 CEO 후보군에 올라간 적이 있다. 기술 부문 전체를 총괄하고 있을 때인데 박 사장은 그 당시 “CEO 경선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푸시해 후보가 됐다”라면서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기술이고 기술 이외에 신경쓰고 싶었던 것이 없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인사가 나기 1주일 전쯤 내정 통보를 받았다”라며 “최 회장님이 무슨 말을 한 적은 없고 그냥 인사가 미루어진 걸 봐서는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는 짐작만 할 뿐”이라고 당시 상황을 전한다.
“최 회장님은 본인이 지시하기보다는 많이 듣는 편이었습니다. 저한테 이래라 저래라 한 적이 없습니다. 사장에 취임했을 때는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인데 주기적으로 면회를 가면 기껏해야 몇 분 정도 얘기를 나눌 뿐이었습니다. 격려하고 얼굴 보고 확인하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다른 통로로 보고는 받으셨습니다. 당시 수펙스추구협의회를 맡은 분이 김창근 의장이었는데 그래도 김 의장에게 회사 현황이나 주요 결정 사항에 대해 보고를 올리면 나한테 하지 말고 회장님에게 직접 얘기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입니다만 최 회장님이 하이닉스에 대해선 일정 관여하지 말라, 그냥 맡겨놓으라고 지시했다는 겁니다. 비서실에서 챙기는 것도 없었고, 리포트를 제출한 적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통 큰 위임이었다. 최 회장은 이 인사가 나기 직전인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에서 취재팀장으로 출장 간 기자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세계경제포럼(WEF)에 주관하는 영향투자 세션에 패널로 참가했었다. 사회적 기업에 진심이었다. 이때 한 발언이 “내게 사회적 기업은 물고 늘어져야 할 평생 과업”이었다. 사실 인터뷰를 할 당시 그는 총수의 결정 권한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말했다.
“원맨쇼를 너무 오래 할 순 없다. 균형과 견제가 중요하다. 내가 늘 옳은 판단을 하고, 최종 판단은 오너가 해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동안 시어머니 노릇, 친정 엄마 노릇을 했는데 반드시 기업에 좋다고만 볼 수 없다. 계 모임을 하는데 계주가 바뀔 수 있지 않은가. 계주가 계원들을 데리고 잘 해나갈 것으로 본다.”
그 새 계주가 김창근 수펙스추구위원회 의장이었다. 사실 이때부터 SK의 그룹 운영과 의사결정은 한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방식으로 변모한다. 김창근 의장의 증언.
“최 회장은 하이닉스를 인수해 출범시킨 2012년 한 해 내내 경영에 대한 큰 고민을 합니다. 그것은 최 회장 표현대로라면 ‘As is(현재)’와 짧은 미래의 일, 그리고 긴 미래의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임기가 있는 계열사 사장들은 코앞에 닥친 현안과 임기 중에 생길 수 있는 일에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너인 회장은 10년, 20년 뒤를 생각해야 하는 거죠. 사장들은 현안과 짧은 미래의 일로 회장을 계속 끌어들입니다. 보고를 하고 결정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회장은 미래 구상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해 10월에 저를 부르더니 수펙스추구협의회를 맡아달라고 하더군요. 그게 일종의 이사회인 거죠. 회장은 뭘 할 거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미래전략가, 투자전략가를 해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되물었죠. 대한민국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 것 같냐고. 청와대에서 재벌 오너들 부르면 제가 갑니까, 회장님이 갑니까? 대통령 주재 회의에 지각이라도 하면 그룹이 불이익을 받아 휘청거리는 게 현실인데 제가 가면 회장은 어디 있는데 월급쟁이가 왔어, 이러지 않겠습니까. 괘씸죄에 걸립니다.”
그래도 최 회장의 의지는 단호했다. 대한민국 주요 그룹 중 가장 말랑말랑하고 유연한 지배구조 체계가 확립된 것은 이때였다. 이어지는 김 의장의 증언.
“그럼 최 회장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 그룹의 포트폴리오를 짜는 건 전적으로 회장 몫입니다. 이런 부분은 사장단과 마찰을 빚기 마련입니다. 현재 상황을 봐서는 대부분 반대인데 미래를 봐서는 투자를 해야 한다는 것이죠. 선경이 직물에서 화섬으로 나갈 때 직물 쪽에서 반대가 극심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부채비율이 1000%가 되거든요. 그리고 SK텔레콤(당시 한국이동통신)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주위에선 특혜라고 하지만 내부에서 핵심 참모들이 목을 내놓고 반대했습니다. ‘10년 동안 영업해 가입자가 45만 명밖에 안 되는 기업을 4000억원을 주고 사! 그 돈이면 석유화학 공장 하나 더 짓지.’ 이런 식인 거지요. 하이닉스 인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를 봐서는 절대 사서는 안 되는 기업이었습니다. 하이닉스는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최 회장의 결단입니다.”
그는 반도체 산업의 속성을 꿰뚫고 있었다. 반도체 대표는 ‘기술 CEO’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기술을 모르면 현재와 짧은 미래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 기술을 모르는데 어떻게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할 수 있겠는가. 이게 최 회장의 뇌리에 박힌 생각이었다.
개발과 연구만 하던 엔지니어를 CEO에 앉힌 걸 두고 ‘신의 한 수’라 얘기들 하지만 최 회장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1등 제품을 만들어 보자는 의지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이 SK하이닉스의 미래였던 것이다.
박성욱 사장은 “그때 HBM을 안 하고 다른 걸 했다면 돈을 더 많이 벌었을지도 모른다”라면서 “그래도 임원들과 회사의 3년 후, 5년 후를 두고 회의를 할 때마다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엔지니어가 아니라면 이런 생각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 회장의 SK하이닉스 인사는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미래를 내다본 결단, 원려심모(遠慮深謀)였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