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형 기자의 트렌드가 된 브랜드]한국 진출 20년, 벤틀리모터스코리아 | 속도와 장인정신, 그리고 한국

    입력 : 2026.04.24 15: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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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봄, 서울 청담동의 한 자동차 전시장 앞으로 매끈하게 단장한 세단 한 대가 들어섰다. V8 트윈터보 엔진이 토해내는 묵직한 배기음과 전면부에 장식된 ‘B’ 엠블럼까지, ‘Good Car, Fast Car, Best Car’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벤틀리(Bentley)’가 한국 시장에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이다. 그렇게 20여 년이 흐른 현재, 한국 시장은 벤틀리의 글로벌 핵심 거점으로 떠올랐다. 대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가격에도 관심은 여전하다. ‘플라잉스퍼’는 2023년에 한국 누적 판매 2000대를 돌파했고, 같은해 벤틀리모터스코리아는 총 810대를 판매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과연 영국 체셔주의 소도시 크루(Crewe)에서 시작된 자동차 브랜드가 한국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무엇일까.

    1919년 크루에서 2006년 서울까지
    영국 체셔주의 작은 도시 크루에 자리한 벤틀리 생산 공장.
    영국 체셔주의 작은 도시 크루에 자리한 벤틀리 생산 공장.

    벤틀리의 시작은 1919년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자 월터 오웬 벤틀리가 내세운 슬로건은 ‘빠른 차, 좋은차, 동급 최고의 차’. 그는 이 세 마디 약속을 곱씹으며 장인들이 한땀 한땀 정성스레 완성하는 럭셔리 수공 자동차 제조사를 창업한다.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차에 적용되는 이 단순한 슬로건은 이후 107년간 브랜드의 DNA가됐다.

    벤틀리는 창업 초기부터 24시간 동안 가장 멀리 주행한 팀이 승리하는 르망(Le Mans) 24시간 내구 레이스를 5번(1924년, 1927년, 1928년, 1929년, 1930년)이나 제패하며 상류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직접 벤틀리차를 구입해 대회에 참가하는 이른바 귀족 레이서들은 ‘벤틀리 보이스(Bentley Boys)’라 불리며 트랙과 파티장에서 화제를 흩뿌렸다. 바로 이때부터 빠르고 고급스러운 차, ‘럭셔리+스피드’의 이미지가 각인되며 다시금 벤틀리의 슬로건이 회자된다.

    벤틀리의 생산 공장은 영국 북서부의 작은 도시 크루에 자리했다. 1938년부터 가동된, 영국 럭셔리카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벤틀리의 산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1930년대, 영국 정부는 롤스로이스-벤틀리와 함께 전투기 엔진을 생산할 공장 부지를 물색한다.

    맨체스터 인근에 위치한 크루는 맨체스터와 산업 인프라를 공유하는 데다 철도망이 잘 갖춰져 전쟁 물자를 생산, 운반하기에 적합했다. 여기에 유럽 본토에서 멀리 떨어져 독일군의 폭격을 피할 수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그렇게 1938년 7월, 24만 3000㎡의 감자밭에 전투기 엔진 공장이 설립됐고 12월부터 생산을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곳에선 1만 명 이상의 근로자가 종사하며 약 2만 5000기의 엔진을 생산했다. 전쟁이 끝난 뒤롤스로이스-벤틀리는 항공기 엔진 부문을 기존 더비(Derby) 공장으로 이전하고, 더비 공장의 자동차 생산라인을 크루로 이전하면서 본격적인 크루 시대를 열게 된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첫 모델은 자동차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 이반 에번든이 디자인한 ‘벤틀리 마크 VI’였다. 당시 마크 VI는 엄청난 인기를 모았고, 벤틀리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생산한 차량보다 많은 5200대 이상이 생산됐다. 이후에도 크루에선 벤틀리의 전설적인 모델들이 생산된다. 곡선형 보디로 유명한 ‘R-타입’과 ‘S-타입’, 고풍스러운 ‘T-시리즈’ 등이 모두 크루 공장의 작품이다. 6.25ℓ V8 엔진인 ‘L410’도 1959년부터 크루 공장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1998년 폭스바겐의 일원이 된 벤틀리는 이후 5억 파운드(한화 약 8100억원)를 투자해 크루 공장을 현대화된 공장으로 변신시켰다. 2002년에는 롤스로이스 차량 생산이 완전히 종료됐고, 이후 온전히 벤틀리만을 생산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벤틀리는 지난 2006년 럭셔리 자동차 브랜드 중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했다. 벤틀리모터스코리아는 지난 20년간 국내 파트너사인 벤틀리서울과 함께 서울 강남, 강북, 부산에 3개의 전시장, 2개의 공식 서비스센터를 운영 중이다. 서비스센터에선 영국 크루 본사에서 직접 훈련받은 엔지니어들이 정비를 담당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울 동대문구엔 벤틀리의 전 세계 최대 통합 비즈니스 타워인 ‘벤틀리타워’와 벤틀리 오너들만을 위한 ‘벤틀리 익스피리언스 라운지’가 들어섰고, 2023년 3월에는 기존 벤틀리 서울 강남 전시장을 대체하는 플래그십 리테일 강남전시장 ‘벤틀리 큐브’를 개장했다. 특히 벤틀리 큐브에는 벤틀리의 비스포크 부서 ‘뮬리너’의 세계를 경험해 볼 수 있는 ‘바투르 스튜디오 스위트’와 벤틀리 오너들만을 위한 ‘아주르 라운지’ 등이 마련돼 있다. 2024년에는 한국 시장만을 위한 한정판 ‘컨티넨탈 GT 코리아 리미티드 에디션’이 출시되기도 했다. 수입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한국 소비자, 그중 한국의 부자들은 단순히 비싼 차가 아니라 나만의 개성과 희소성을 중시한다”며 “벤틀리가 그들의 소비 목록에 오른 이유는 바로 그기준을 충족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는 “특히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차를 주문할 수 있는 뮬리너 비스포크 서비스와 벤틀리 큐브, 타워 등 오너들만을 위한 공간은 한국 고객들을 자극하는 필요충분 요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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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들이 포기한 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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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59년 말 안장을 만들던 장인 집안이 있었다. 이들이 1760년대 영국 왕실의 우편 마차를 제작하는 코치 빌더(Coach Builder·다른 회사의 엔진이나 섀시를 기본으로 고객이 특별 주문한 자동차를 설계, 제작하는 회사)로 성장했고, 19세기 말 자동차 시대가 열리자 귀족과 상류층을 위한 최고급 차체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뮬리너(Mulliner)다. 1959년 롤스로이스-벤틀리에 인수된 뮬리너는 1998년 폭스바겐그룹이 벤틀리를 인수하자 벤틀리의 비스포크 전담 부서가 됐다. ‘남들이 포기한 데서 시작한다(We Start Where Others Stop)’는 표어는 뮬리너의 철학이다.

    뮬리너 비스포크를 통해 구현할 수 있는 벤틀리 차량의 조합은 460억 가지 이상이다. 여기에 코치 빌딩 수준의 원-오프(One-off) 주문(구매자의 요청에 따라 설계, 디자인해 제작되는 단 하나의 특별한 차량)까지 더하면 가능성은 사실상 무한대가 된다.

    뮬리너 서비스는 세 단계로 나뉜다. 1단계에선 많은 고객들이 장인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뮬리너가 제작에 참여하는 ‘뮬리너’ 파생 모델과 ‘by 뮬리너’ 스페셜 옵션이다. 주행 중에도 수평을 유지하는 로테이팅 휠 캡, ‘벤테이가 EWB’의 샴페인 쿨러와 글라스, 독점 컬러 페인트와 내장재 등이 여기 속한다. 비스포크 주문 제작에 해당하는 2단계에선 뮬리너가 디자인 단계부터 직접 참여해 처음부터 끝까지 맞춤형 디자인과 사양을 제공한다. 이렇게 탄생한 뮬리너 비스포크 차량에는 나만의 컬러나 특별한 의미를 담은 로고를 적용할 수 있다. 벤틀리의 ‘뮬리너 콜렉션’ 모델과 국내에 출시된 ‘코리안 리미티드 에디션’ 등이 이 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 3단계에선 기존 모델에 대한 비스포크 서비스를 넘어, 세상에 단 한 대뿐인 원-오프 모델이나 소량 생산되는 주문 제작 모델 등이 전통적인 코치 빌딩 방식으로 제작된다. 영국 왕실 전용 차량인 ‘스테이트 리무진’, 소량 한정 모델 ‘뮬리너 바칼라’와‘뮬리너 바투르’ 등이 이 과정으로 완성된 차량이다.

    전기차 시장 불확실성에 구조조정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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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틀리는 럭셔리와 지속 가능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브랜드 중 하나다. 우선 영국의 크루 공장은 2019년 탄소중립 공장으로 인증받았고, 공장 인근에서 30만 마리의 꿀벌을 양봉하며 생물다양성 보전에도 나서고 있다. 빗물 재활용, 휘발성 유기화합물 절감 등 환경 오염을 최소화하는 노력도 병행 중이다. 파워트레인 전략도 분명하다. ‘신형 컨티넨탈 GT 스피드’ ‘GTC 스피드’ ‘플라잉스퍼’ 등에 탑재된 울트라 퍼포먼스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782마력의 출력에도 불구하고 CO₂ 배출량을 45~48g/㎞ 수준으로 낮췄다. 장기적인 전동화 전환 로드맵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급변하는 세계 정세와 시장 상황, 지주사인 폭스바겐그룹의 수익성 악화 등에 최근 구조조정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벤틀리는 미국 관세 정책과 중국 수요 둔화, 전기차 전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할 거란 우려 등이 작용하며 직원 6% 감원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전체 보직 중 275개, 최대 150명을 감원하고 빈자리는 충원하지 않는 형식이다. 프랭크-슈테펜 월리서 벤틀리 CEO는 내년에 첫 번째 순수 전기차를 출시한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지만 아직 내연기관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소비자들을 설득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며 대규모 감원 계획을 공개했다. 벤틀리는 지난해 영업이익이 2억 1600만 유로(약 3702억원)에 그쳐 전년 대비 42% 급감했다. 벤틀리, 포르쉐, 아우디가 사용하기로 했던 새 전기차 플랫폼 개발을 지주사인 폭스바겐 그룹이 중단한 데 따른 일회성 비용으로 영업이익이 거의 반 토막 났다.

    [안재형 기자 사진 벤틀리모터스코리아]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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