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51)죽은 자의 이름으로 영원을 살다 클로이 자오 <햄넷> vs 매기 오패럴 <햄닛>

    입력 : 2026.04.24 10:11:27

  • 클로이 자오의 <헴넷>은 1972년생 아일랜드계 영국인 소설가 매기 오패럴의 장편소설 <햄닛>을 원작 삼은 영화입니다. 발음 표기상의 차이는 있지만 두 작품의 원제는 ‘Hamnet’으로 동일하며, 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곡 <햄릿>의 동의어이기도 합니다(이하 소설 ‘햄닛’은 혼선을 줄이기 위해 ‘햄넷’으로 통일합니다). 2020년 출간과 동시에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햄넷>에 대해, 원작가 오패럴은 소설 집필 동기를 책에서 서술한 바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16세기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역병’이란 단어를 자신의 작품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세계적인 셰익스피어 권위자 스티븐 그린블랫이 한 글에서 “햄닛과 햄릿은 사실 같은 이름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스트랫퍼드의 기록 문서에서는 보통 혼용되었다”(뉴욕 리뷰오브북스, 2024년 10월 21일)라고 썼다. 무엇보다도 셋째, 셰익스피어가 막내 아들 햄넷을 질병으로 떠나보내고 4년 뒤 희곡 <햄릿>을 무대에 올렸다.

    즉, 오패럴은 셰익스피어가 실제로 아들을 잃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를 접목해 소설 <햄넷>을 집필했고 이는 희곡 <햄릿>의 문학적 씨앗이었다는 의미입니다, 클로이 자오가 이 소설을 영화화한 뒤 이 작품으로 올해 개봉한 예술영화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작품으로 도약했습니다. 영화 <헴넷>은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주연 아그네스로 열연한 배우 제시버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냈습니다. ‘애도로서의 창작’을 이야기하는 영화 <햄넷>과 오패럴의 원작 소설을 함께 살펴봤습니다.

    죽은 아들을 되살린 셰익스피어
    사진설명

    아그네스는 자신의 동생들을 가르치는 라틴어 가정교사 윌과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가문은 채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는데, 윌이 아버지의 빚을 ‘몸으로 때우고자’ 아그네스의 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러 온 것이었지요. 윌이 아그네스에게 접근하여 둘은 관계를 맺고 혼인에 이릅니다. 아그네스가 임신한 뒤 가장으로서 돈을 벌어야 했던 윌은 가죽 공방에서 생업을 이어가지만, 언어와 문학에 정통했던 그에게 공방 업무는 적응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윌은 이곳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골몰하고, 아그네스는 책상 위에서 힘겨워하는 윌을 보며 그를 놓아주기로 합니다. 윌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새로 태어난 딸아이를 책임질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가 변방의 농장이 아니라 런던의 무대로 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윌은 둘째를 임신한 아내를 두고 런던의 극단으로 떠납니다.

    그 사이, 아그네스의 두 번째 출산이 임박했습니다. 아이는 하나가 아닌 쌍둥이였고 아그네스는 첫째 딸 수잔나와 쌍둥이이자 둘째 딸인 주디스, 막둥이 햄넷을 홀로 양육 합니다. 어느 날, 주디스가 역병에 걸리며 위기가 찾아옵니다. 윌이 런던에서 서둘러 돌아왔을 때 주디스는 다행히도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아그네스는 넋이 나간 표정이었습니다. 주디스를 살려내는 사이, 아들 햄넷이 전염돼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부가 아들을 묻고 며칠 지나지 않은 시점에, 윌은 아그네스에게 다시 런던에 가야 한다며 집을 나섭니다. 남편을 이해할 수 없던 아그네스는 정신착란에 가까운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게 4년이 흐릅니다. 아그네스가 윌을 여전히 냉대하는 가운데, “윌의 새 희곡이 무대에 상연될 예정”이란 소식이 들려옵니다. 놀랍게도 신작 제목이 <햄넷>이었습니다. 엄마인 자신에게 말도 없이, 죽은 자식의 이름을 작품에 쓴 남편을 원망하며 런던을 찾은 아그네스는,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표정이 바뀝니다. 남편이 죽은 아들 햄넷을 무대 위에 살려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라진 아들을 애도하던 중이었습니다. 아그네스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 윌의 희곡 <햄넷> 위에서 아들을 연기하는 ‘햄넷’을 바라봅니다.

    아버지의 가죽과 아들의 비극

    사진설명

    소설의 중심 인물은 아그네스로, 영화는 원작을 충실하게 뒤따릅니다. 아그네스의 입장에서 딸과 아들의 죽음을 막고자 사투를 벌이고, 떠나버린 남편 윌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리는 등 영화는 원작을 충실하게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원작에선 강조되었으나 영화에는 생략된 몇가지 지점이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데, 우선 ‘가죽’의 문제입니다.

    윌의 아버지 존은 ‘가죽 장갑 장인’으로 소설에 묘사됩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사슴 가죽, 새끼염소 가죽, 다람쥐 가죽, 수퇘지 가죽이 걸려 있었습니다. 존은 아들 윌과 성격이 정반대로, 라틴어와 문학에 심취해 몽상을 즐기는 아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죽은 영화에선 ‘윌의 아버지의 직업’ 정도로 묘사되는 반면, 원작에서 가죽 문제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존의 가죽 사업은 아들 윌의 비극과 정확히 대조를 이룹니다.

    우선 존의 가죽 사업과 윌의 비극 집필은 둘 다 ‘죽음’을 소재로 삼습니다. 짐승이 죽어야만 가죽을 얻을 수 있기에 가죽은 생멸을 조건으로 삼는데, 이 과정에서 사라진 생명에 대한 존중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존은 이 분야에서 한때 유명했던 최고 전문가였고, 지금은 사업이 하락기에 접어들어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고자 고집스럽게 분투합니다. 반면, 윌의 비극은 죽음을 그저 물리적으로 처리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소멸 이후에도 정신적인 애도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이 희곡 무대이니까요. 더구나 존은 ‘죽음의 껍질’, 즉 표면을 다루는 반면, 윌은 ‘죽음의 심연’에 다가서고자 합니다. 환언하면, 아버지가 만드는 가죽 장갑의 세계는 ‘죽음 이후의 물질적인 처리’이지만 아들이 쓰는 희곡은 ‘죽음 이후의 정신적인 애도’에 가깝습니다.

    어린 아들을 병으로 허망하게 잃은 이후, 윌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들을 무대에 살려냈습니다. 아들은 세상을 떠나 땅에 묻혔고 이제 만날 수 없지만, 아버지는 떠난 아들을 연기하는 ‘배우’를 비극 속에 담아냄으로써 수백 년간 무대 위에서 숨을 쉬고, 손발을 움직이고, 말할 수 있도록 영원의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었지요.

    죽은 자의 이름으로 살다

    사진설명

    영화에서 생략된 또 다른 부분은, 윌의 동생에 관한 대목입니다. 윌에게는 여러 동생이 있었고, 몇몇 동생은 어린 시절 이미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윌의 아내 아그네스는 남편의 어린 동생 일라이자로부터 ‘죽은 두 언니’가 있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라이자는 이 세상에 없는 한 언니의 이름을 대신 쓰고 있었습니다. 이름을 ‘물려받은’ 것이었지요. 일라이자는 자신의 언니가 자신의 이름을 ‘돌려달라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합니다.

    “자기 이름을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른대요. 내가 자기 이름을 가져가서 화가 났을 거래요.”(160쪽) 그러나 어린 일라이자의 말을 들은 아그네스는 “너희 언니는 네가 자기 이름으로 살아줘서 기뻐해”(161쪽)라고 위로해줍니다.

    훗날 윌이 아들 햄넷의 이름을 무대 위에 되살리는 결말의 복선인 이 장면은 의미심장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은 단순한 호칭만이 아닙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 이름은 ‘부재’를 감각하게 하는 하나의 기호가 됩니다. 오패럴의 소설에서는 떠난 사람의 이름을 다음 세대에게 남기는 두 모습(일라이자와 햄넷)을 병치함으로써, 죽은자의 이름을 산 자에게 건네 그를 삶 속에 되살리는 애도의 방식을 보여줍니다. 남겨진 자들이 떠난 이의 이름을 계속해서 부른다면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기억과 추억 속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죽음은 그의 육체적인 소멸이 아니라 그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 시작된다는 말을 개인적으로 아낍니다. 우리는 모두 소멸하는 존재이지만 누군가가 망자를 기억하며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은 부재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영화에는 숨을 거둔 어린 햄넷이 어느 외딴 집에서 방황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아무런 죄 없이 세상에서 떠난 아이는 어디로 가는가’란 사유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 장면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주 느리게, 마치 얇은 막 건너의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이 장면은, 원작에선 엄마 아그네스의 차분한 절규에서도 묻어납니다.

    “그애가 어디에 있는지 늘 궁금해. 얘가 어디로 갔을까.

    머릿속에서 바퀴 하나가 쉴 새 없이 도는 느낌이야. 무슨일을 하던 중이든, 어디에 있든, 생각하는 거야. 어디에 있지, 어디에 있지? 그냥 사라져버릴 수는 없으니까. 어딘가에 있어야 하잖아.”(424~425쪽) 아그네스는 4년간 죽은 아들을 ‘찾아다녔고’, 결국 남편 윌이 창조한 무대 위의 세계 속에서 아들의 이름과 존재를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들의 형상은, 실은 남편의 깃펜 위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영화와 소설 <햄넷>은 ‘끝’이 정해져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영원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떠난 누군가를 추념하고 애도하는 방법은 도대체 있는지를 질문합니다. 정답은 모두에게 각각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상실을 이겨내는 가장 강력한 힘은 ‘기억’이라는 점일 겁니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육신의 고통과 육신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문학은, 예술은 기억을 유형의 형체로 만들어냅니다.

    예술이 절망 속의 인간 곁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도 그 실루엣을 바라보기 위한 마음 때문은 아닐까요.(‘영화와 소설 사이’ 연재를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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