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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보퀀트 쇼크! HBM 낙관론에 균열 일으킨 구글의 논문 한 편
입력 : 2026.03.27 10: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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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과 한국의 메모리 관련주는 한꺼번에 급브레이크가 걸린 모습이다.
3월 26일 미국 증시에서 마이크론(Micron)은 355.46달러로 6.93% 하락했고, 웨스턴디지털(Western Digital)은 7.72%, 시게이트(Seagate)는 8.29%, 샌디스크(Sandisk)는 11.06% 밀렸다.
같은 흐름은 곧바로 서울로 번졌다. 3월 26일 오전 10시 30분까지 한국 증시에서 삼성전자는 4.8%, SK하이닉스는 오전 6.2% 하락했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 충격이 최근 인공지능(AI) 수요 기대에 올랐던 메모리주를 한꺼번에 되돌리는 장면이었다고 전했다.
시장이 놀란 이유는 실적 악화나 갑작스러운 수요 붕괴가 아니었다. 구글 리서치(Google Research)가 3월 24일 공개한 터보퀀트(TurboQuant)라는 압축 기술이 방아쇠가 됐다.
최근까지 시장은 “인공지능이 커질수록 더 많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디램(DRAM)이 필요하다”는 단순한 공식 위에서 메모리주를 평가해 왔다.
그런데 구글은 거대언어모델(LLM)의 작업 메모리 가운데 핵심 병목인 키밸류 캐시(Key-Value Cache)를 훨씬 적은 메모리로 처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주가가 먼저 흔들린 것은 기술의 완성 여부보다, 이 메시지가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서사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메모리 슈퍼사이클에 던져진 한 편의 논문3월의 메모리 시장은 늘어나는 수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장의 시선을 단숨에 바꿔놓은 건 공장 증설 뉴스도, 대형 고객사의 신규 수주도 아니었다.
구글 리서치가 내놓은 한 편의 기술 설명이었다. 이름은 터보퀀트(TurboQuant). 학계에서는 이미 1년 전 공개된 논문이었지만, 이번에는 전혀 다른 무게로 읽혔다.
“인공지능이 메모리를 덜 써도 된다”는 메시지가, 지난 1년간 인공지능 메모리 랠리를 떠받쳐온 투자 논리를 정면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미국 시장의 반응은 빨랐다. 미국에서는 마이크론과 샌디스크, 웨스턴디지털, 시게이트가 줄줄이 급락했고, 충격은 곧바로 아시아로 번져 서울 증시에서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큰 폭으로 밀렸다.
시장은 이 기술이 정말 메모리 수요의 구조를 바꿀 수 있는지, 아니면 과열된 기대 위에 쌓인 가치평가를 잠시 흔든 이벤트인지 가늠하느라 분주해졌다.
최근까지 삼성전자 주가가 연초 고점을 경신하고, SK하이닉스 역시 인공지능 메모리 대표주로 강한 흐름을 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하락은 더 상징적으로 읽힌다.
1년 전 논문이 이제야 시장을 흔든 이유터보퀀트의 원논문은 2025년 4월 에이알카이브(arXiv)에 공개됐다.
이후 이 연구는 국제학습표현학회(ICLR) 2026 발표 논문으로 채택됐다. 당시만 해도 이 기술은 고차원 벡터를 더 효율적으로 압축하는 알고리즘 성과에 가까웠다.
그러나 2026년 3월 24일 구글 리서치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이 기술을 다시 꺼내 들었고, 시장이 즉시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꿔 제시했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대규모언어모델의 키밸류 캐시 메모리를 최소 6배 줄일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엔비디아(NVIDIA) 에이치100(H100) 기준으로 최대 8배 속도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학술 성과가 자본시장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논문은 비로소 시장 뉴스가 됐다.
여기에는 시장의 위치도 크게 작용했다. 최근 메모리주는 인공지능 데이터센터 확장, 고대역폭메모리 공급 부족, 장기 계약 확대 기대를 바탕으로 가파르게 상승해 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주요 업체를 둘러싼 시선 역시 “인공지능이 커질수록 메모리도 더 필요하다”라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구글은 그 병목을 하드웨어 증설이 아니라 알고리즘 개선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충격이 컸던 이유는 기술 자체가 낯설어서가 아니라,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핵심 명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터보퀀트가 건드린 건 메모리 수요의 ‘총량’이 아니라 ‘비효율’이번 기술을 과장해서 읽으면 “메모리 수요가 통째로 줄어든다”는 식의 결론으로 흐르기 쉽다. 하지만 구글이 직접 설명한 적용 범위는 메모리 전체가 아니라 키밸류 캐시와 벡터 검색(Vector Search)의 메모리 병목이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 시스템이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했던 메모리의 일부 비효율을 덜어내는 기술에 가깝다.
원 논문 역시 터보퀀트의 강점을 평균제곱오차(MSE)와 내적 왜곡을 동시에 줄이는 온라인 벡터 양자화(Online Vector Quantization) 방식, 그리고 키밸류 캐시 양자화 효율에 두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장의 해석은 갈린다. 약세론은 메모리 가격을 떠받친 핵심 병목이 줄어들면 고대역폭메모리와 디램의 가격 결정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본다.
반면 강세론은 효율 향상이 오히려 인공지능 서비스의 확산을 앞당겨 장기 총수요를 늘릴 수 있다고 말한다.
메모리를 덜 쓰게 되면 토큰(Token)당 비용이 내려가고, 비용이 내려가면 더 많은 서비스와 더 많은 사용량이 새로 생길 수 있다는 논리다. 아직 어느 해석이 맞는지 단정하긴 이르다.
다만 이번 쇼크가 메모리 수요의 종말 선언이라기보다, 메모리 사용 구조를 다시 계산하라는 신호라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미국 메모리주의 급락, 기술 쇼크만은 아니었다표면적으로는 터보퀀트가 촉발한 매도였지만, 실제로는 이미 예민해져 있던 시장에 마지막 자극이 더해진 성격이 강하다.
마이크론은 3월 19일 로이터(Reuters) 보도 기준으로 강한 인공지능 수요에 힘입은 실적을 내놓았지만, 동시에 2026 회계연도 자본적지출(CAPEX)을 크게 늘리겠다는 계획이 부담으로 작용해 주가가 먼저 흔들린 바 있다.
즉, 이번 급락은 기술 뉴스 하나만의 결과라기보다, 높은 밸류에이션과 공격적인 투자 확대, 향후 공급 증가 우려가 겹친 상태에서 나온 반응에 가깝다.
여기에 SK하이닉스의 대규모 설비 투자와 미국 상장 검토도 겹쳤다.
3월 24일 SK하이닉스가 ASML 장비에 약 80억달러 규모를 투입해 차세대 메모리 생산 역량을 끌어올릴 계획이라고 전했고, 같은 주에는 미국 증시 상장 추진계획도 공론화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인공지능 메모리 호황에 대응하는 투자이지만, 시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읽었다. 수요가 강한 만큼 공급 확대도 빨라질 수 있고, 그만큼 지금의 프리미엄이 오래 유지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다.
결국 터보퀀트는 이미 팽팽해진 줄을 끊은 촉매였을 뿐, 매도 논리 전체를 혼자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충격의 강도는 같아도 의미는 다르다서울 증시에서도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최근 한국 증시는 중동 변수와 원화 약세 등 대외 리스크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메모리 관련주가 특히 더 강하게 맞았다.
다만 중장기 의미는 두 회사에 똑같이 적용되기 어렵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고대역폭메모리 선두 기업으로 평가받는 만큼, 인공지능 메모리 프리미엄이 흔들릴 때 주가 민감도가 더 크다.
반면 삼성전자는 메모리 외에도 파운드리(Foundry), 모바일(Mobile), 소비자가전(CE) 등 사업 포트폴리오가 넓어 단기 충격을 흡수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크다. 그렇다고 삼성전자가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메모리 가격 둔화 우려가 커지면 전사 실적 기대도 함께 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둘 다 충격권 안에 있지만, SK하이닉스가 더 직접적으로 흔들리고 삼성전자는 더 넓은 사업구조 속에서 부담을 나눠 받는 구도에 가깝다.
그럼에도 기업들의 공식 시각은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2월과 3월 공개 발언을 통해 2026년과 2027년까지 메모리 수요가 강할 것으로 봤고, 주요 고객과 3~5년 장기 계약 전환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 역시 대규모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 계획을 이어가고 있다. 기업들은 여전히 공급 부족과 구조적 수요 강세에 무게를 두고 있는 셈이다. 지금 주가가 흔들린다고 해서 영업 현장의 판단까지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다.
이번 쇼크의 본질, 메모리 시대의 종말이 아니라 ‘재평가’이번 사건을 한 줄로 줄이면 이렇다. 시장은 지금까지 “인공지능 확산은 곧 더 많은 메모리, 더 높은 가격”이라는 단순한 공식으로 메모리주를 평가해 왔다.
터보퀀트는 그 사이에 빠져 있던 변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더 똑똑한 알고리즘이 메모리 사용량을 줄일 수도 있다는 변수다. 이 한 줄이, 고점 부담이 커진 메모리주의 가격을 흔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곧바로 메모리 시대의 종말을 말하는 건 성급하다.
구글이 제시한 적용 대상은 메모리 전체가 아니라 특정 병목 구간이고, 삼성전자와 에스케이하이닉스, 마이크론은 여전히 인공지능 수요의 구조적 강세를 말하고 있다. 지금 시장이 다시 계산해야 하는 것은 메모리 수요의 소멸이 아니라 메모리 수요의 구성과 가격 결정력이다.
주가가 먼저 흔들렸다고 해서 산업의 방향까지 하루아침에 뒤집혔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번 조정은 인공지능 메모리 시대가 더 단순한 낙관에서, 훨씬 더 정교한 질문의 단계로 넘어가는 첫 장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