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덕 기자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매일경제신문 | ③ 재정경제원을 해체하라는 액션 어젠다

    입력 : 2026.03.10 10:00:00

  • 드디어 발표날이 됐다. 전날 비전코리아팀은 전원 신라호텔에 투숙했다. 처음 주관하는 매머드급 행사인지라 사전 점검할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새벽까지 몇 차례나 예행연습을 했다. 지금은 이런 행사가 보편화됐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인에게는 낯설기만 했다. 행사 초기에 비디오 상연을 하는 거라든지, 발표를 15~20분 정도로 콤팩트하게 진행하는 거라든지, 발표장에서 파워포인트를 사용하는 거라든지 모든 게 사실상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다.

    무대 세팅에 빈틈은 없는지, 파워포인트 장표는 제대로 넘어가는지, 사회자 큐시트는 제대로 됐는지, 비디오 상영은 문제없이 되는지 등 모든 걸 꼼꼼히 챙겼다. 행사에 초청한 고객들의 참석 여부와 테이블 배치 및 아침 식사 준비 상황까지.

    다이내스티 홀 뒤편에 전체 행사를 조정하는 콘솔이 마련됐는데 온갖 전자장비와 영상시설 들이 있었다. 무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높게 가설한 장소라서 보조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데 사전 연습 도중 강영철 부장이 그 콘솔 박스에서 낙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팀원들은 아찔했다. 강 부장은 사실상 이번 행사의 총감독이었기에 문제라도 생기면 행사 전체를 망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다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우리는 “액땜한 걸로 생각하자”라며 불안감을 애써지워 버렸다.

    오만가지 걱정이 쌓이다 보니 날씨도 문제였다. 때아닌 추위가 찾아왔다. 한국경제의 엄혹함을 예고하는 징조였을까? 10월 말인데도 살짝 눈이 내렸다. 도로에 쌓이지는 않았으나 첫눈은 첫눈이었다. 새벽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혹시 손님들이 제시간에 도착은 할 수 있을지, 오는데 차가 막히지는 않을지, 별의별 생각이 다들었다. 눈을 붙인 게 두 시간 정도는 됐을까? 비전코리아팀은 새벽 4시부터 움직였다. 이제 최종 리허설이었다. 행사는 7시에 시작하니 손님들은 6시 30분이면 도착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6시까지 완벽하게 모든 걸 마무리하고 대기해야 했다. 그러려면 4시 30분에는 집합해야 한다는 계산이 떨어졌다.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잠을 쫓아냈다. 아침 7시가 되자 손님들이 대부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제부터 행사를 시작합니다” 같은 사회자의 멘트 없이 막바로 조명이 어두워지고 영상이 상영되는데 이날도 그랬다. 소위 매일경제신문 국민보고대회 스타일. 영상 제목은 ‘왜 비전코리아인가’였다. 우리가 누누이 강조해 온 실천의 문제. 말만 많고 행동은 하지 않는 대한민국에 경종을 올렸다.

    그리고 이날 행사의 메인 요리 두 개가 이어졌다. 하나는 부즈앨런 해밀턴의 보고서, ‘21세기 한국경제의 재도약’. 발표는 장종현 대표가 맡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메뉴는 ‘비전코리아 매경의 제언- 왜 두뇌강국이어야 하는가.’ 이건 장대환 사장이 직접 설명에 나섰다.

    부즈앨런 보고서는 총 172페이지의 영문 보고서를 30여 장 안팎의 파워포인트로 재구성한 것인데 이 보고서의 실질적인 작성자는 부즈앨런의 아태 지역을 총괄하는 빌 마이클스 선임 파트너와 런던 사무소에 있는 케빈 존스 수석 파트너.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의 주요 골자와 메시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전달하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숙제였다. 그건 부즈앨런 서울 사무소의 염용운 파트너와 비전코리아 추진팀이 담당하고 최종안을 운영위원회에 올려 추인을 받았다.

    실무팀은 우선 국민에게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를 놓고 숙의 작업에 들어갔다. 보는 관점에 따라 이견이 있었는데 신선도와 영향력을 기준으로 키워드를 도출했다. 어차피 보고서에 다 있는 내용이지만 장표를 어떻게 구성할지, 기사를 어떻게 쓸지는 또 다른 영역이었다.

    크게 두 가지 점에서는 이의가 없었다.

    가장 신선한 키워드는 뭐냐? 이건 ‘너트크래커(Nutcracker)’였다. 현재의 한국경제가 마치 호두를 깔 때 사용하는 기계인 너트크래커에 끼인 호두 신세라는 것인데 부즈앨런이 만들어낸 상징적 표현이었다. 흔히들 샌드위치 신세라는 표현을 써 왔는데 상투적이란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새로운 개념의 너트크래커는 왠지 신선하고 적확한 비유로 보였다.

    부즈앨런의 케빈 존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한국경제는 저비용을 무기로 2000년대 세계 3대 경제강국을 꿈꾸는 중국과 고효율 고기술로 무장한 일본이 마치 너트크래커의 양쪽 손잡이를 잡고 한국(호두)을 죄는 형국입니다. 견고하고 알차 보였던 한국경제가 이제 중국과 일본의 협공 앞에 호두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입니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투자 대상국이 아닙니다. 중국은 분명히 한국의 목줄을 죄는 경쟁자로 부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핵심기술은 대부분 일본에 의존합니다. 세계 시장 흐름에 대한 이해도나 기업경영의 노하우도 일본이 분명 우위에 있습니다.”

    사진설명

    그러면서 그는 “한국은 여전히 개혁과 개방을 거부하고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마치 호두껍질처럼 단단하다”며 “평소에는 잘 지켜질지 모르나 너트크래커로 강하게 조여 오면 한순간에 깨진다. 지금 한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 너트크래커가 장표의 첫머리를 장식한 키워드였고 신문에 게재되는 시리즈 1번의 헤드라인이었다.

    그 다음 이견이 없었던 키워드는 바로 재정경제원의 해체였다. 부즈앨런 보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한국경제가 재도약하기 위해서는 재정경제원을 해체해 경제 분야의 자유화를 전담할 자유경제원을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하고 공정거래위원회를 경쟁 촉진 업무를 담당하는 공정경쟁위원회로 개편해야 한다”라고. 이것이 부즈앨런 보고서의 1번 액션 어젠다였다.

    돌이켜 보면 이 같은 액션 어젠다가 어떻게 도출될 수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다. 거의 기적이다. 이유인즉, 이 프로젝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곳이 재정경제원이고, 재정경제원 장관 승인하에 정부 예산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용역을 발주하고 돈을 지원한 곳을 향해 “당신네 조직을 해체하라”고 했으니. 설사 연구 책임자가 그런 결론을 도출했다손 치더라도 운영위원회에서 그 부분을 삭제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이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결국 재정경제원은 차기 김대중 정부에 와서 해체된다.)

    더더욱 이날 보고대회에서 축사까지 했다. 그는 “보고서의 내용은 제3자의 객관적인 시각에서 우리 경제의 실상을 진단하고 경제활력 회복과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라면서 “정부는 물론 기업 등 모든 경제 주체들이 우리 경제의 발전 방향에 대해 겸허한 자세로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경제위기가 뼛속까지 침투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엄습한 이날은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가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부총리는 행사장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 줬다.

    매일경제는 훗날 환란의 주범으로까지 몰린 강 부총리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상협 기자의 회상.

    “강 부총리는 국가에 경영을 접목한 최초의 관료였을 겁니다. 일반 개인이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료와 치료를 받듯이 국가도 그래야 하는데 정부에 그런 기능을 하는 곳이 없지요. 선진국과 한국,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의 지식 격차가 날로 벌어지는데 정부는 안주하고 있어 그가 국가경영을 연구하는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맥킨지나 BCG 같은 컨설팅 업체가 부상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습니다. 경제위기의 먹구름이 다가오는 상황에서도 강 부총리가 매일경제의 비전코리아 행사를 지원하고 끝까지 지켜본 것은 그런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10만원짜리 한국보고서
    한국보고서를 공개한 제1회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한국보고서를 공개한 제1회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한 인사들이 발표 내용을 경청하고 있다.

    부즈앨런의 국가컨설팅 보고서 제목은 ‘21세기를 향한 한국경제의 재도약(Revitalizing the Korean Economy toward the 21st Century)’. 통칭 한국보고서. 총 172쪽의 영문 보고서였다. 한국어 번역본은 147쪽. 이 두 개를 합쳐 A4 용지 크기로 특별 제본했다. 물론 비매품. 그런데 보고대회 이후 내용이 언론에 소개되자 문의가 빗발쳤다. 그 책을 구해 볼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금액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매일경제는 이 책을 시중에 팔기로 결정하고 가격을 책정했는데 10만원으로 했다. 통상 책자의 10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내부 반대가 컸다. 아무리 그래도 보고서를 어떻게 10만원씩 받고 파느냐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고민 끝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부즈앨런 한국보고서는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을 정도로 악화된 한국경제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처방으로 이미 한국인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이 보고서가 탄생하기까지 우리는 국내외 지적 역량을 총동원했고 연구 작업도 방대하게 진행됐다. 그런 점을 고려해 가격을 10만원으로 하자. 더더욱 우리나라는 그동안 지적 자산에 대한 투자에는 값을 쳐 주는 문화가 형성돼 있지 않았는데 이를 계기로 지식의 가치를 안정하는 문화를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

    이런 판단하에 우리는 11월 28일 자 1면에 사고를 내면서 “순수 민간 차원에서는 시도하기 벅찬 21세기 한국 비전을 마련하는 데 동참한다는 생각으로 널리 이해를 구한다”라고 밝혔다. 결론적으로 비싼 것 아니냐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10만원에도 주문은 쇄도했다.

    우리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이를 전 국민 실천 운동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다. 그해 5월 말 실시한 국민걷기운동도 그 일환이었다. 이에 앞서 매일경제는 3월 17일 국민제안대전을 벌여 위기 극복을 위한 전 국민 아이디어를 수집했다. 이 결과물이 국가컨설팅의 기초자료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에 이어 4차례나 걸친 국민여론조사를 단행했고 비전코리아 전용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그리고 가급적 많은 국민을 이 운동에 동참시키기 위해 금융권에 협조를 구해 국민은행이 ‘비전코리아 통장’을, 대한투자신탁이 ‘비전코리아 펀드’를 각각 개설했다. 구조는 간단하다. 비전코리아 통장을 개설하는 고객들에게는 기존 이자를 그대로 주되 은행이 벌어들이는 이자 수입의 일부를 떼 기금으로 적립하는 것이고, 펀드도 마찬가지로 펀드 수수료의 일부를 기금으로 적립하는 구조였다.

    대한투자신탁 김종환 사장과 국민은행 이규증 행장도 국민보고대회 행사에 참여해 21세기를 준비하는 범국민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 뿌듯하다며 남다른 감회를 표시했다. 김 사장은 “비전코리아 펀드가 판매 한달만에 1000억원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며 펀드에서 조성된 기금으로 비전코리아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했으며 이 행장은 “일선 은행 창구에서 비전코리아 가입자 수가 급속히 늘고 있다”고 소개하고 “국민이 모두 1인 1계좌씩 비전코리아 통장을 갖게 된다면 21세기 한국의 미래는 활짝 열릴 것”이라고 희망찬 메시지를 던졌다.

    책 판매 대금도 이 통장 계좌로 받았다. 매일경제가 책 팔아 돈 벌겠다는 생각이면 당연히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책 출간 작업을 진행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부즈앨런 & 해밀턴 한국보고서>다. 이 책은 국민 필독서로 자리 잡으면서 출간과 동시에 주문이 밀려들어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다. 이 보고서의 내용이 도대체 어떤 것이길래 범국민적 호응을 얻게 됐을까?

    앞서 언급한 대로 ‘너트크래커’라는 새로운 개념의 키워드를 던졌다는 점, 그리고 재정경제원의 용역을 받은 보고서가 재정경제원을 해체하라는, 무모할 정도로 용기있는 목소리를 낸 점이 화제이긴 했지만 보고서 한 대목한 대목이 모두 한국경제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점에서 오피니언 리더를 비롯한 많은 국민의 공감을 샀다. 이 보고서는 “한강의 기적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1996년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며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다고 자부하는 정부에 대고 “한국경제의 역동성은 이미 상실됐다”라며 “오히려 정부 주도의 성장 정책이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의 주요 7개 산업-반도체, 가전,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섬유, 의복-을 분석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원인은 앞서 언급한 일련의 구조적 장애, 즉 너트크래커 상황, 그리고 선진 기업들과 비교했을 때 경영지식 및 기술적 격차가 크다는 점. 이 두 가지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분석 못지않게 지적한 게 NATO(No Action Talk Only) 현상이었다. 즉, 말만 많고 행동은 없는 것.

    용역의 책임자였던 부즈앨런의 빌 마이클스 선임 파트너는 보고서를 발간하면서 이런 소회를 밝혔다. 우리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해 보고서 서문에 직접 써 달라고 요구했다. 내용은 이렇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두 가지 중요한 이슈가 등장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안은 우리 연구팀이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둔 분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안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 이슈는 한국경제의 새로운 경제 비전은 정부, 기업, 노동계 모두에게 신사회계약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정부에게 보고서 내용을 받아서 진행하라고 하는 건 무책임하다고 봤습니다. 우리의 비전과 액션플랜에 대한 경제 주체 모두의 합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이슈는 한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많은 의견이 개진됐으나 이를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비전코리아 한국보고서는 단순한 연구보고서가 아니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6호 (2026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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