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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한국의 고택] (7) 증평 연병호 가옥 | 민초로 살다간 독립운동가의 흔적
입력 : 2026.01.16 14: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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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연병호(延秉昊) 가옥은 초가집이다. 연병호의 생가가 있는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일대는 곡산 연씨의 집성촌이다. 황해도 곡산에서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연간에 혼인을 통해서 처가가 있던 도안으로 연정(延侹)이 이주하면서 도안면이 곡산 연씨의 세거지가 되었다. 도안의 곡산 연씨 가문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을 하고 이인좌난을 진압한 공로로 공신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로 오면서 벼슬을 하지 못해 경제적으로 빈농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연병호의 생가는 비록 전형적인 우리나라 민가의 형태인 초가집이지만 연병환(延秉煥), 연병호(延秉昊), 연미당(延薇堂) 등 대를 이어 곡산 연씨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성지이다.
독립운동가 연병호(延秉昊·1894~1963년)는 1894년에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연채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을 했던 형 연병환의 영향으로 고향에서 소학 과정을 마치고 북간도로 건너가중학 과정인 창동학원을 다녔다. 그리고 1915년 서울로 올라가 경성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를 1년 정도 수학하였다. 이때 안재홍과 조소앙을 만나 민족 현실에 대한 깊은 논의를 나누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뜻을 세웠다.
연병호 가옥 벽면 연병호는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청년 외교단의 결성을 통해서 독립운동의 첫 발을 내디뎠다. 청년외교단의 외교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 활동을 위해 ‘외교시보’를 발행해 국내 인사들에게 내외정세의 동향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 2세대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독립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영웅적 사심을 버리고 조국 광복을 위해 온몸을 바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상해로 가서 1922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한인사회의 대동단결을 고취하고 청년운동을 활성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1923년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중국 항일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중연합체인 동서혁명 위원회를 조직하고, 무장투쟁 노선에서 대일항전의 방략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1925년 말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에 참가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국제공산당 조직으로부터 군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아 독립군 양성 계획을 적극 지원했다. 1929년 무렵 선생은 남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혁명당 결성에 참가했다.
증평 연병호 생가 부엌 천장 1932년 의열단, 한국독립당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추진했고,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으로 통합 발전시켰으며, 5개 정당을 통합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는 등 정당의 통합을 통한 독립운동에도 열정을 기울였다. 1933년 9월 충청도의원의 자격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참여했던 선생은 1937년 초 친일파인 상해거류 조선인 회장 저격 사건으로 상해에서 체포되어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30여 년간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 세력의 조직과 통합에 헌신한 삶이었다.
연병호 가옥 사당 광복 후 연병호는 제헌국회와 2대 국회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연병호는 2세대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독립운동의 대중화를 통해 새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따라서 완전한 조국 광복을 위해 조국에 돌아온 연병호는 무소속으로 초대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77.54%라는 전국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국호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1950년 2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다. 선거기간 동안 선거비용을 마련하지 못할 만큼 가난하여 신문지에 붓으로 자신이 직접공약을 적어 방을 붙였으며, 검정고무신에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수 리어카에 확성기를 싣고 순회강연을 하였다.
그는 민중의 모습으로 민족과 민중을 위한 삶을 살다가 자신이 태어난 생가에서 1963년 세상을 떠났다. 연병호가 남긴 재산은 두루마기 한 벌과 검정고무신 한 켤레가 전부였다. 연병호는 평소에도 바지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심지어 찢어진 고무신의 뒤축을 가죽을 대고 기워서 신고 다니기도 하였다. 국회의원이라는 특권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청렴결백만을 신념으로 삼고 일생을 검소한 생활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초가삼간 생가에 걸려 있는 연병호라는 이름의 문패가 구중 궁궐의 같은 기와집의 솟을대문보다 더 높고 깊은 감동을 준다.
독립운동가 연병호에게 집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아니었다. 민족과 민중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연병호는 초가집에서 태어나 초가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연병호 항일역사공원 정면 3칸의 초가삼간연병호 가옥은 그의 아버지 연채우가 지은 집을 연병호가 증축한 것이다. 연채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연병호는 일제에 의해 식민 지배가 시작되자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현재의 집을 다시 지었다. 아버지 연채우가 거처하던 집은 본채와 바깥채가 있었으나 세월에 허물어졌다.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연병호는 뒷산에 있는 나무를 잘라 와서 기둥을 세우고 손수 흙벽돌을 찍어 벽을 쌓아 본채만을 다시 지었다. 기존에 있었던 바깥채와 야학당은 복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연병호 가옥도 새마을 운동을 피하지 못하였다. 1970년 새마을 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잠시 개조되었다가 1986년 연병호 가옥 성역화 작업을 통해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아울러 당초 집 뒤에 있었던 장독대와 옆에 있었던 옛 화장실을 노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복구하였다.
연병호 가옥은 초가삼간이다. 초가삼간은 우리나라 민가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은 것으로 사람이 살 수 있는 주거의 최소 단위를 나타낸다. 연병호 가옥은 정면 3칸이다. 왼쪽에는 2개의 방이 있고, 오른쪽에 부엌이 달린 단출한 모습이다. 형식과 구조는 토벽 초가집으로 남향했으며 평면 형식은 외통형이다. 19세기 가장 보편적인 민가의 형식과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초가집이다.
연병호 가옥은 토담집이다. 초가집은 거의 대부분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인 흙으로 흙벽을 쌓아 지은 토담집이다. 토방이나 기단, 부엌이나 붕당의 잘 다져진 흙바닥, 아궁이를 설치한 부뚜막이나 온돌바닥 그리고 담벼락까지 철저하게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우리나라 민가는 흙벽을 통해서 추위와 더위에 대응하였다. 추운 겨울철에 흙벽은 우수한 단열효과를 발휘하고, 온돌 난방으로 따뜻해진 실내 기온을 보존했다. 반대로 더운 여름철에는 단열과 방열을 효과적으로 발휘했다. 또한 흙벽은 습도를 조절하고 통풍의 기능도 보유하고 있었다. 실내 온도가 높을 때 흙벽은 적당히 습기를 흡수해 두었다가 건조할 때 다시 적당한 양의 습기를 방출하여 실내 습도를 조절해 주고, 흙벽의 미세한 틈은 창호지의 기능과 같이 환기 기능도 발휘했다. 우리나라 민가에서는 자연 나무를 그대로 재목으로 사용했다. 민가에 사용된 재목은 마을 뒷산에서 쓸 만한 나무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민가에 사용한 나무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란 구부러진 곡선의 나무였다. 휘어지고 뒤틀어진 부재라 할지라도 힘의 작용을 잘 해석하여 교묘하게 용재를 골라 사용했다. 오히려 곡선이 만들어진 초가집은 자연의 공간이었다. 인위적인 직선이 경직된 긴장감을 주는 것과 반대로 초가집 재목의 곡선은 오히려 안정된 평온을 주었다.
연병호 가옥 사당 한편 연병호 생가의 뒤쪽에는 사당인 명덕정사(明德精祠)가 있다. 연병호가 살아서 출입했던 생가의 문은 싸리문인데, 죽어서 드나드는 문은 홍살문이다. 그리고 언덕 너머에는 그의 삶을 역사로 기록한 증평 연병호 항일역사공원이 있다. 초가집에서 소박하고 짧은 삶을 살면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흰 두루마기와 검정 고무신을 남긴 연병호는 죽어서 역사에 기록되는 영원한 삶을 살고 있다.
차장섭 강원대학교 교양학부 명예교수
경북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쳤다. 조선사연구회 회장, 강원대 도서관장, 기획실장, 강원전통문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강원대 자유전공학부 명예교수로 한국사, 미술사 등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