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오리온 | ② 구원투수 허인철 등판

    입력 : 2025.10.10 14:46:47

  • ▶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그 미몽과 혼돈의 긴 터널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시기는 담 회장이 법적 이슈로 경영에 실질적으로 관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리온그룹의 지배구조 변화는 불가피했다. 이때 오리온이 내린 결단은 전문경영인 체제의 도입. 오너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맡길 외부 인재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신세계에서 오랫동안 재무와 전략을 담당했던 허인철 사장이었다. 2014년 7월의 일이었으니 2년 후 나온 <징비록>은 어찌 보면 담철곤에 의해 주문 제작된 허인철을 위한 보고서였다. 그리고 그 보고서의 내용은 사실 허 부회장이 오리온에 와서 파악한 구조적 문제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영입 당시 허인철은 백수였다. 2006년 신세계그룹 전략기획실장으로 임명된 이후 월마트 인수·합병은 물론 신세계와 이마트의 인적 분할, 강남 고속터미널 인수 등 그룹 현안과 신수종사업 조정을 도맡아 해온 신세계그룹의 실력자인 그가 돌연 사표를 던진 건 그해 1월 28일. 사장 타이틀을 달고 있을 때였다. 사표는 1주일 만에 수리됐다. 그룹 총수인 이명희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정용진 부회장(현 회장)이 경영에 본격 참여하기 시작한 2009년부터 힘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 부회장과 묘한 갈등 관계가 잉태됐다. 급기야 2013년 가을 국정감사 발언으로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그러나 평소 신세계에서의 허인철 사장을 유심히 지켜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이화경 부회장이었다. 능력있는 전문경영인을 찾고 있었던 오리온으로서는 허인철 사장의 퇴사야말로 절호의 스카우트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허 부회장은 오리온 입사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신세계를 그만둔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 부회장이 지인을 통해 한번 보자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만나자마자 국감 얘기부터 하더라고요. 제가 발언하는걸 봤는데 왠지 신세계에서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대요. 사표낸 걸 보고 바로 연락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대뜸 오리온이 큰 회사는 아니지만 같이 한번 잘해보자는 제안을 한 겁니다.”

    그는 바로 승낙하지 않았다. 사실 큰 기업을 찾고 있었다. 오리온은 직전 회사인 신세계에 비하면 규모가 10분에 1에 불과한 중견기업이었다. 직장도 많이 옮겨본 터라 어떤 회사라도 자신은 있었다. 삼성물산에서 시작해 현재 하이닉스인 현대전자로, 그리고 도저히 그 기업 문화에서 일할 수 없을 것 같아 친구가 오너로 있는 영창악기에 잠시 근무하다 신세계로 옮겨 사장급으로 7년 경험을 쌓은 그였다. 그래서인지 언론에서는 여러 군데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허 부회장은 당시를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사실 영입 제의는 오리온밖에 없었어요. 신세계 나올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너에 반기 들고 나온 것으로 알려진 저를 다른 기업 오너들이 쉽게 쓰려고 하겠어요. 그래서 저로서는 오리온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지요.”

    허 부회장에 대한 일반 오너들의 리스크를 이 부회장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허 부회장을 영입한 데 대해선 이렇게 해석한다.

    “이 부회장은 알고 보면 배포가 크고 사업에 대한 열정과 집념이 대단한 분입니다. 회사가 잘되면 자신은 어떤 희생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선 저와 케미가 맞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오기 전담 회장이 곤욕을 치른 이유도 전문경영인이 잘못해서 그런 건데 그런 이유로 회사를 책임지고 경영할 사람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는 이 부회장의 영입 제안 후 3, 4차례 더 만났고 오리온에 입사하기 직전엔 담 회장과도 고깃집에서 소주를 기울이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회사를 속이지 말라” 기강을 잡다
    사진설명

    허 부회장이 오리온에 입사한 날은 2014년 7월 14일. 아침 출근길 한강엔 옅은 안개가 껴있었다. 용산 문배동에 위치한 본사는 일반인 눈에는 잘 안 띄는 고가도로 옆 건물로 오리온의 모태인 옛 풍국제과 빌딩이었다. 오래 전 지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금도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사무실은 6층에 있었다. 그는 한 걸음에 두 계단씩 성큼성큼 올라가 출근 첫 날을 맞았다. 주요 간부들과 상견례를 하고 며칠간 업무보고를 받았다. 그 후 허 부회장을 찾아오는 임직원은 거의 없었다. 타이틀만 부회장이었지 아직 정식 이사로 선임된 건 아니었다. 이사로 정식 등기된 건 다음해 3월 주주총회에서였다.

    “시쳇말로 뭐라 그럴까. 신세계에 있다 와서 뭘 하겠냐. 불만스러우면 나가겠지. 오래 버틸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낙하산으로 온 사람, 선뜻 받아들이겠어요. 배타적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허 부회장은 일단 독학을 시작한다. 물론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고 입사한 터여서 대강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 숫자와 실무를 들여다본 건 아니었기에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회사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업보고서와 결산서부터 펼쳤다.

    “몇 년 치를 꼼꼼히 살피고 메모할 건 메모하고 조사가 필요한 건 실무직원들을 통해 조사시키고 그렇게 일을 시작했습니다. 업력(業歷)이 60년 된 기업입니다. 해외 법인도 3개나 있고요. 그런데 제가 받은 첫인상은 회사 분위기가 냉소적 비판적이고, 기업 문화가 부패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근본 원인은 기업이 성장을 못했기 때문이고, 왜 성장이 안됐냐 하면 업의 본질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 했습니다. 그런 인식 아래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한 것이지요.”

    허 부회장은 사장단 회의부터 신설했다. “한국, 중국, 러시아, 베트남 법인이 따로따로 논다. 이래서는 시너지는 커녕 효율성 측면에서 엄청난 손실이 발생한다. 그래서 일단 사장들이 모여 공감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사장들이 보고를 하는데 알맹이가 없는 겁니다. 회장 지시 사항에 대한 보고, 본인이 관할하는 법인에 대한 자랑. 그야말로 보고를 위한 보고였습니다. 냉정히 말하면 가짜 보고, 거짓말 보고입니다.”

    그는 “무엇이 가짜 보고였냐”는 질문에 숨도 안 쉬고 “매출이 가짜였다”고 말한다. 그는 “매출을 늘리려고 거래처에 물건을 밀어내고 그 물건이 안 팔리니까 반품돼 들어오고, 그것도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기부하고 이런 현상이 만연해 있었다”면서 “거짓말을 하려는 것도 있었겠지만 현장에서 돌아가는 걸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발생하는 오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보다는 해외 법인, 특히 중국이 심했다. 중국 시장은 오리온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곳이었다. 2024년 기준 오리온의 한국에서의 매출은 1조원을 갓 넘겼다. 반면 중국 매출은 1조2602억원으로 한국 시장보다 28% 크다. 그룹 전체로는 41%. 직원 수도 한국의 3배. 중국에는 소위 경소상이라고 하는 기업형 도매상들이 있다. 한국의 식품기업이 중국에 진출할 때 가장 먼저 부닥치는 장애물이다. 그 숫자가 워낙 많고 지역별로 폐쇄적인 유통망을 갖고 있어 할인점, 편의점, 슈퍼마켓 등 기업형 유통회사 위주로 영업을 하는 한국과는 성격이 다르다. 오리온만 해도 거래를 튼 경소상이 1700곳이나 되고 이를 통해 최종 거래하는 점포는 24만 곳이 넘는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실적을 시계열로 살피다 보면 눈에 띄는 특이점이 하나 발견된다. 10년 전 매출이 지금보다도 높은 것이다. 2016년 매출은 1조3459억원. 그러다가 그 다음 해인 2017년 급전직하한다. 외견상 가장 큰 이유는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이른바 사드(THAAD) 배치. 2016년 중국은 한국의 사드 배치를 중국 견제라 보고 크게 반발해 사실상 한한령을 발동한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이 한국 제품 불매에 나서면서 식품, 유통, 화장품, 자동차는 물론 한류를 비롯한 엔터테인먼트, 여행 및 면세업계에도 피해가 속출했다. 그러나 사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건 오리온 내부의 문제였다. 허 부회장의 진단.

    “사드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정직하지 못하지요. 중국은 춘절, 그러니까 구정 매출이 큽니다. 그래서 연말에 영업력을 총동원해서 밀어내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춘절이 끝나면 반품이 들어온 거고요. 그런데 사드 사태가 발생하니까 고름이 터진 겁니다. 언젠가는 불거질 이슈였는데 드디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지요. 반품 규모가 350억원 정도가 되는 겁니다. 게다가 밀어내기식 납품을 위해 영업사원이 임의로 거래처에 할인 약속을 한 누적 금액이 400억원 정도 달했는데 이 금액을 경소상들이 일시에 청구하는 사태가 터졌습니다. 숨겨진 부실 750억원 정도가 한꺼번에 발생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상황은 단순하다. 법인에서 ①사업 목표를 세운다 ②목표대로 매출이 오르지 않는다 ③무리해서라도 숫자를 맞추라고 지시한다 ④그러다 보니 가짜 매출를 일으키고 허위 보고를 한다 ⑤거짓말은 관행으로 굳어진다 ⑥조직에선 알지만 좋은 게 좋다고 눈감아준다. 이렇게해서 드러난 오리온의 내부적 문제점들이 2016년 ‘징비록’에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허 부회장이 내건 첫 번째 개혁 어젠다는 윤리경영. 단순한 것 같지만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회사를 속이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천명했다. 범죄행위는 엄벌에 처했다. 회사가 고발해 구속시킨 직원도 있었다.

    “처음 와서 부서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니 사장이 감사 팀장을 불러서 감사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덮고 가자는 거죠. 그런 게 다 문제가 되죠. 회사에 리스크로 돌아옵니다. 도덕이 무너진 회사는 절대 살아나지 못합니다.”

    2015년에 발동을 걸어 이제 10주년을 맞았다. 한 번 외치고 그만두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말로는 누구나 다 한다. 그러나 실천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제도화해야 가능하다. 윤리경영 전담조직을 만들고 경영 이념에 맞춰 업무규정을 재정비하는 한편 팀별로 윤리경영을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었다. 법 위반이나 징계 발생 등 눈에 보이는 것 못지않게 법인카드를 규정에 맞지 않게 사용하거나 회계처리를 잘못하거나, 매출을 이월하거나, 재고자산을 부실하게 관리하는 등의 부조리를 없애기 위한 투명경영을 강조했다. 특이한 것은 보고 위반. 사건 사고가 발생한 걸 보고하지 않으면 10점을, 지연 보고하면 5점을 깎는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눈감아주던 온정주의 관행에 쐐기를 박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리온 내부의 불투명한 문화를 걷어내지 않고서는 도약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리경영을 왜 해야 하느냐? 그건 임직원들을 벌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집단이든 상위 10~20%는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합니다. 그리고 하위 10~20%는 비협조적이거나 비판적입니다. 그리고 중간층 60~80%는 조직 문화와 분위기에 따라 상향화될 수도, 하향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위 10~20%는 지속적으로 걸러내고 중간 60~80%는 직원들의 깨끗한 조직 문화를 통해 상향화시키는 것. 그것이 직원들을 보호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윤리경영입니다.”

    아직까지도 윤리경영은 진행 중이다. 그는 “이제 많은 직원들이 윤리경영에 대해 이해하고 있고 윤리경영을 해야 이익이 늘어나고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온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면서도 “점수를 매긴다면 70점 정도 될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