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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활성화 전략의 뉴패러다임 : 신야간경제 (2)
입력 : 2025.09.18 10: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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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규모의 신야간경제
아일랜드에서 답을 찾다무더위와 경기 침체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방도시 경제는 더욱 위축되고 있다. 청년 일자리는 줄어들고 시민의 삶은 지쳐간다. 이제는 단순한 회복 전략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성장의 돌파구, 신야간경제(NTE:Night-Time Economy)가 필요한 시점이다.
가치 있는 도시, 활기 넘치는 도시, 일자리가 넘치는 도시로 변화할 수 있는 전략. 이는 문화와 복지를 통한 시민의 활력 회복, 외부 관광객 유치에 따른 소비 확대, 그리고 경제·문화·고용·복지 네 마리 토끼를 잡는 방법이다. 그 해답은 낮이 아닌 밤에 숨겨져 있다.
세계축제협회 아시아지부 회장으로 활동하는 정강환 배재대학교 관광축제한류대학원장은 소멸에 위험에 직면한 국내 지방도시들에 ‘신야간경제’ 전략을 적용하면 도시 활성화에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주창한다. 정 회장의 분석을 통해 ‘신야간경제’가 지역활성화의 법이 될 수 있을지 시리즈로 진단한다.도시 경쟁력, 밤에서 완성되다“잠들지 않는 도시”는 더 이상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도시가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활력을 갖추어야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선진 도시의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영국 런던, 맨체스터, 브리스톨,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등은 도시 차원에서 ‘야간경제(New Night-time Economy, NTE)’를 적극 추진하며 성공 모델로 주목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이 흐름을 국가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새로운 성과를 낸 곳이 있다는 사실이다. 3년 전 영국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할 곳은 아일랜드이다. 그들은 도시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밤의 경제를 설계해 혁신을 이루고 있다.”
아일랜드, 국가전략으로 ‘밤’을 키우다지난 2023년 기준 아일랜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약 11만5600달러로 유럽에서 1인당 GDP 2위를 기록했다. 유럽의 경제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아일랜드가 도시 활력 제고를 위해 ‘신야간경제(Night-Time Economy)’ 정책을 적극 도입 중이다. 높은 GDP를 기록한 아일랜드조차 도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신야간경제를 제도화한 점은 야간경제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도시 발전의 핵심 전략이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정부는 2020년 중앙정부 주도로 국가 야간경제 태스크포스를 출범시켰다. 이 조직은 문화·예술·스포츠부를 중심으로 법무부, 주택부, 교통부, 고용부까지 참여하는 범정부 협력 체계였다. 이는 야간경제가 단일 부처의 업무가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범정부 차원의 접근 없이는 안전, 교통, 법·제도, 문화콘텐츠가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못한다는 판단이었다.
더블린 템플바 구역에 위치한 밀레니엄 다리(Millennium Bridge) 주변에서는 매년 더블린의 문화유산과 랜드마크에 조명·미디어 파사드를 설치하고 시즌형 축제 ‘윈터라이트’가 펼쳐진다. 특히 아일랜드는 야간경제를 단순한 관광이나 축제 차원이 아닌, 국가 성장전략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보인다. 지난 2021년 태스크포스는 규제 완화, 교통·안전 강화, 야간활동 다양화 등을 담은 36개 권고안을 제시했다. 이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총 1100만 유로(약 170억 원)를 투입했다. 더블린, 코르크, 골웨이, 슬라이고 등 9개 도시에는 야간시장에 해당하는 ‘야간경제 자문위원(NTE Advisor)’을 파견해 지역 맞춤형 전략을 마련토록 했다. 이는 대도시에만 집중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국 차원에서 균형 발전을 추구하는 접근이었다. 아일랜드 수도인 더블린의 관광지뿐만 아니라 지방 소도시에도 ‘밤의 기회’를 열어준 것이다.
슬라이고, ‘작은 도시의 큰 실험’그중에서도 눈길을 많이 끈 곳은 아일랜드 서북부의 소도시 슬라이고(Sligo)이다. 인구가 2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는 대표적인 ‘밤의 혁신’ 사례로 손꼽힌다. 흔히 야간경제라 하면 대도시의 클럽 문화나 쇼핑 거리를 떠올리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소도시에도 밤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슬라이고의 퀸 메이브 거리는 사용되지 않는 주차장을 공연을 포함한 연례축제 개최지로 만들어 사람들이 모여 즐길 수 있는 핫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슬라이고에 파견된 자문위원은 주민, 상인, 예술가와 함께 밤의 정체성을 새롭게 디자인했다. 박물관과 갤러리를 심야에도 개장하고, 거리 공연과 마켓을 확대했다.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어울리는 밤의 거리는 단순한 소비 확장이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슬라이고의 성공은 야간경제가 대도시 전용 정책이 아님을 입증했고, 군 단위 도시나 지방 소도시도 충분히 기회를 잡을 수 있음을 전해줬다.
슬라이고의 신야간경제를 이끄는 리더들. 왼쪽부터 슬라이고 도시활성화재단 게일 매기본 CEO, 도시활성화재단 핀바 필란 의장, 슬라이고 정부파견 에델 도란 야간시장, 정강환 원장, 로잘린 오그레이디 슬라이고 전 시장. 더블린, ‘안전한 밤’의 재탄생더블린의 변화도 확연하다. 한때 우범지대로 악명 높던 템플 바(Temple Bar)와 데임 스트리트 일대는 이제 정책 실행과 함께 안전·청결하고 문화적 다양성이 존재하며 야간교통이 원활한 신야간경제 구역으로 탈바꿈했다. 신야간경제 인증은 ‘퍼플 플래그(Purple Flag)’ 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영국에서 시작된 야간 시간대의 안전·문화적 다양성을 평가·인증해주는 제도다.
아일랜드 더블린 템플바(Temple Bar)에서 신야간경제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더블린은 야간문화 프로그램도 적극 개발했다. 미디어 파사드와 조명을 활용한 윈터 라이트 페스티벌(Winter Lights Festival), 동물원 야간 개장 프로그램인 와일드 라이트(Wild Lights)는 겨울철 관광객을 크게 늘렸다. 오래도록 방치된 낡은 교회 건물을 레스토랑과 공연장으로 재탄생시킨 컬처 바(Church & Bar)는 문화유산 활용의 혁신적 사례로 손꼽힌다.
무엇보다도 더블린 시민들의 생활 패턴을 변화시킨 것은 심야 교통시스템이다. 자정 이후에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보행자 전용 거리와 심야버스 ‘나이트링크(Nitelink)’는 더블린 시민들이 야간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한국에 던지는 시사점슬라이고와 더블린의 사례는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서울 등 일부 대도시를 빼고 한국의 지방도시들은 야간경제가 대도시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겨 밤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는데 소홀해왔다. 그러다 보니 지방 도시의 관광과 지역축제는 대부분 주간에만 집중됐다. 하지만 밤을 활용하지 못하는 지역은 절반의 경쟁력만 가진 도시일 뿐이다.
인구 2만명의 소도시 슬라이고의 신야간경제 구축 성공 사례는 인구소멸 위기에 직면한 지방 소도시에 희망을 주는 문화경제적 메시지다. 야간경제를 통해 지방 도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길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도 전국 곳곳의 군 단위 도시를 비롯한 중소도시에서 ‘밤’을 새로운 기회로 삼아야 한다.
한국에서도 일부 지방도시들이 구도심에 신야간경제를 적용해 도시재생과 지역 활성화 가능성을 보여준 곳이 없지 않다. 대표적인 도시로 꼽을만한 진주는 진주성이 단순한 문화유산을 넘어 ‘밤의 도시 경제’를 움직이는 새로운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 신야간경제구역 관점에서 진주성 일원에 진주남강유등축제•국가유산야행•미디어아트 등 다양한 시도를 펼치며 도시 활성화의 새로운 모델을 모색 중이다.
익산은 익산역 앞 중앙동 구도심을 중심으로 KTX익산역 복합환승센터와 도시재생을 연계한 신야간경제 모델을 수립하였으며, 군산 월명동 일대의 근대역사문화 공간도 문화유산활용을 통한 신야간경제에 대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전의 문화예술구역, 한밭수목원과 유성의 쇼핑과 음식을 연결한 구역, 광주의 충장로·금남로, 예술의 거리에 자리한 7080 콘텐츠 구역, 인천의 개항장과 송도를 타임머신형으로 연결한 공간도 신야간경제를 적용할 만한 곳이다. 그런 곳에 야간 프로그램을 더 확장시킨다면 체류형 관광객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강릉의 커피 거리, 전주의 한옥마을, 목포의 근대역사문화 공간 등에도 신야간경제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 교통과 안전 문제를 지방정부와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고, 소규모 도시에도 맞춤형 자문 체계를 둔다면 아일랜드 못지않은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실험은 지방소멸 위기에 직면한 한국 사회에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밤은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경제와 문화가 태어나는 시간이다.”
▶ 정강환 세계축제협회 아시아지부 회장
미국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1993년 배재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국내 유일 축제경영대학원인 배재대학교 관광축제한류대학원을 이끌고 있다. 한국 축제학 개척자로 꼽히며 100여 명의 석·박사 졸업생을 배출해 국내외 축제 리더를 양성해왔다. 50여 개 나라가 활동하는 세계축제협회의 아시아·한국지부 회장으로 활동하며 주민화합 중심에서 지역개발형 축제로 전환을 이끈 ‘축제계몽운동’을 30여 년간 진행해 축제산업 패러다임을 바꿨다. 보령머드축제, 추억의 충장축제, 서구아트페스티벌 등 대표적 지역개발형 축제를 기획•개발했다. 정동야행, 진주남강유등축제 등을 통해 한국 도시의 야간 경쟁력 강화를 주창하고, 지방소멸 위기 해법으로 야간형 축제와 신(新)야간경제를 제시해 주목받고 있다. 영국 첼시 플라워쇼, 스페인 토마토축제, 캐나다 윈터루드 등 세계적 축제와 교류도 확대해 K-축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오는 9월 중순 세계 축제계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세계축제협회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70년 만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헌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