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태 기자의 ‘영화와 소설 사이’] 마틴 스콜세이지 <셔터 아일랜드> vs 데니스 루헤인 <살인자들의 섬>

    입력 : 2025.06.20 10:44:58

  • 섬 안의 광인, 우리 안의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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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2010년 영화 <셔터 아일랜드>는 심리 스릴러의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후반부에 믿기 어려운 반전을 주며 영화팬들의 마음을 휘저었지요. 이 영화의 원작은 데니스 루헤인의 소설 <Shutter Island>로 한국에선 2004년 <살인자들의 섬>으로 번역 출간된 바 있습니다.

    1954년 9월, 연방 보안관 테디는 ‘셔터’로 불리는 외딴섬에서 수사를 시작합니다. 셔터섬에 위치한 정신병원에서 레이첼이란 여성이 실종됐다는 신고 때문이었습니다. 셔터섬은 누구도 탈출이 불가능한 갇힌 섬이었는데, 레이첼은 단서와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그야말로 ‘증발’했습니다. 그러나 테디가 셔터섬으로 떠난 목적은 단지 레이첼의 행방을 알아내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테디의 아내 돌로레스가 오래전 방화로 사망했는데, 아파트에 불을 지른 범인이 셔터섬 정신병원에 수감돼 있음을 테디가 인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범죄자의 이름은 앤드루 레이디스. 테디는 레이첼을 찾는 한편, 앤드루 레이디스가 있는 비밀 병동에 대한 단서도 함께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15년 전 구작인 만큼 스포일러가 양해되겠지요. 연방 보안관 테디가 찾아내려던 앤드루 레이디스는, 다름 아닌 테디 자신이었습니다. 테디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환자였고 아내를 죽인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 광인으로 전락한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스스로의 기억을 무너뜨리는 앤드루 레이디스를 위해, 정신병원 원장과 의료진들이 그를 위한 ‘역할극’을 수행했다는 반전이 <셔터 아일랜드>의 핵심 서사를 이룹니다.

    <셔터 아일랜드>는 반전이 강한 추리영화로 이해되곤 했지만 원작 <살인자들의 섬>을 읽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살인자들의 섬>은 데니스 루헤인의 천재성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광인(狂人) 돌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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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테디(실은 앤드루 레이디스)의 아내 돌로레스는 정신질환자입니다. 남편 테디가 출근한 사이, 돌로레스는 어린 삼남매를 집앞 호숫가에서 차례대로 익사시켜 사망케 합니다. 영화에선 돌로레스가 정신질환을 앓는 이유를 ‘테디의 무관심과 방치’로만 설명합니다.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돌로레스가 홀로 병을 키울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세 아이를 죽이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다는 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을 살펴보면 돌로레스의 증상은 단지 ‘남편의 무관심과 방치‘로만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돌로레스 병의 원인이 한 평범한 가정이 아닌 미국사회 전체에 내포돼 있음이 반복적으로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위해 <살인자들의 섬>을 되살펴볼까요.

    돌로레스는 ‘헌신’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녀는 집안에 고립됐고 아이들의 양육자로서의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테디는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군인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자신의 사회적 직분인 군인(영화에서는 경찰)으로서의 책무에 몰입했습니다. 돌로레스는 “한 시간만 있다가 가. 당신을 내 몸 안에서 느끼고 싶어”(176쪽)라며 사랑을 갈구하지만, 테디는 PTSD를 푸념의 어조로 이야기 하면서 직분에 충실한 삶을 일순위로 여깁깁니다. “우리나라가 왜 거기서 싸우는지도 모르겠어(한국전쟁을 의미). 나라에서 날 부르면? 갈 수밖에 없을 거야.”(176쪽)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와 소설에 나오는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 초반이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미국사회는 공산주의자 색출을 명분으로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시기였습니다. 반공(反共) 히스테리 때문에 누구나 의심하고 누구든 의심받았습니다. 국가주의 아래서 개인은 소외감과 우울감, 그리고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로레스가 아이 셋을 죽일 만큼 미쳐버리는 건 단지 테디의 무관심만이 아니라 돌로레스와 테디를 그렇게 만든 미국사회 전체에 책임이 있음이 소설에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런 점에서, 테디가 레이첼을 찾기 위해 도착하는 셔터섬은(실제로는 환자인 테디를 위해 역할극이 진행 중인 셔터섬), 그 자체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를 은유 합니다. 섬에 도착한 테디는 ‘레이첼’이라는 이름의 ‘진실’에 가닿고자 모두를 의심하는 여정을 떠나는데, 테디의 이 여정은 냉전 시기 국가가 개인에게 자행했던 감시의 억압을 그대로 재연하고, 역으로 돌려주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셔터섬의 정신병원은, 위험한 진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수감하는 장소이지요. 이는 매카시즘 하에서 진실을 검열하고 구분하고 억압했던 미국사회와 동의어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테디는 살인자가 사회적 광풍에 휩쓸린 희생자인 셈이지요.

    말러에서 테디로

    <살인자들의 섬>에서 테디는, 셔터섬 정신병원 원장인 콜리와 체코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1860~1911)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콜리 원장의 방에서 말러의 음악이 재생됐기 때문입니다.

    <셔터 아일랜드>에선 이 장면이 좀 더 구체화됩니다. 우선 극중 흐르는 말러의 음악은 말러의 1976년작 <피아노 4중주 가단조(Piano Quartet in A minor)>입니다. 이 곡은 그저 테디의 정서적 분위기를 압축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실제 생애와, 극중 테디(앤드루 레이디스)의 삶의 궤적이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말러의 <피아노 4중주 가단조>는 확신하지 못하는 선율로

    이뤄져 있습니다. 슬픔을 울부짖는 듯한 정조 대신 극도로 Premium Monthly Business Magazine 절제된 선율이 매력이지요. 이것만으로도 이 곡은 테디의 삶을 응축하는데, 말러가 이 곡을 쓸 당시 그는 수많은 가족을 잃은 적이 있었습니다. 말러는 14남매 중 둘째였는데 그중 8명이 유아일 때 사망했다고 역사는 기록합니다.

    동생들의 죽음은, 고작 16세에 불과했던 말러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고, 그 감정이 <피아노 4중주 가단조>로 이어졌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말러는 유대인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소외된 이방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셔터섬의 환자 테디 역시 스스로의 기억을 무너뜨린 자리에서, 셔터섬의 만인으로부터 ‘이방인’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확신감 없는 곡의 전개(진실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족을 잃은 극도의 슬픔(여덟 동생의 병사(病死)와 세 아이의 살해), 이방인이라는 본질적인 정체성이란 세 공통분모가 말러와 테디의 삶 기저에 도도히 흐르고 있습니다.

    <셔터 아일랜드>와 <살인자들의 섬>에는 이처럼 은폐된 상징과 은유가 한둘이 아닙니다.

    특히 특히 테디가 그토록 찾아내려는 실종자 레이첼이, 실은 테디가 앤드루 레이디스였던 시절에 그토록 아꼈던 외동딸의 이름이란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살인자들의 섬>에서만 거론되는 또 다른 상징적인 장치 하나도 더 곱씹어 봅니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서, 맨발로 실종됐던 레이첼은, 상처 하나 생기지 않은 몸으로 테디 앞에 멀쩡히 나타납니다(레이첼의 실종은 테디의 치료를 위한 가짜 연극이므로). 둘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의심의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생전의 히치콕이 가장 아꼈다고 전해지는 영화로 1943년 작품입니다(원제 <Shadow Of A Doubt>). 유튜브에도 무료 공개돼 있는 이 영화는, 찰리라는 이름의 젊은 여성에게서 시작됩니다. 찰리는 가장 사랑하는 외삼촌이 자신의 집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합니다. 그러나 신문기사, 그리고 친절한 삼촌의 수상한 행동을 마주하면서 삼촌이 연쇄살인범일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실제로 삼촌이 범인이 맞습니다.)

    히치콕의 <의심의 그림자>처럼 <셔터 아일랜드>도 무엇이 진실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삶의 불분명성을 은유해 냅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상이 그 신뢰를 가장 먼저 배반할 수 있다’는 <의심의 그림자>의 주제와, ‘비밀과 암시를 해독하면서 진실에 다가서고자 하는 당사자가 바로 비밀 그 자체였다’는 <셔터 아일랜드>의 역설은 서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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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끔찍한 진실, 그 너머에

    영화 <셔터 아일랜드>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대사가 하나 나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괴물로 살아가는 것과 좋은 사람으로 죽는 것, 어느 쪽이 더 끔찍할까(Which would be worse: to live as a monster, or to die as a good man?)”

    셔터섬 정신병원에서의 역할극 이후 완벽히 치료됐다고 생각된 테디는 주변의 기대와 달리 다시 광인을 전락합니다. 그는 위 마지막 대사를 통해 ‘현실에서 정신병자로 살아가기보다는, 차라리 약물을 투여받고 정신적인 사망선고를 받기를 바라는 상황’임을 암시합니다. 원작 소설에는 없는, 영화만의 놀라운 엔딩입니다.

    인간은 고통이 깊을수록 자꾸만 그 기억을 부인하려 드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함으로써 얻는 평온과, 진실을 추구함으로써 마주치는 고통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영화 <셔터 아일랜드>와 소설 <살인자들의 섬>은 인간의 풀리지 않는 저 숙제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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