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ar My Walking] 강원도 철원 소이산, 사계절 모두 절경 나만 알고픈 산책코스

    입력 : 2025.06.20 10: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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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내 공간이 없다는 게 너무 힘들어.”

    오랜만의 술자리. 소주가 서너순배쯤 돌았을 때 다닥다닥 붙어 앉은 옆 테이블에서 푸념이 이어졌다.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투정이야. 갔다 온 사람 긁는 거냐?”

    한참 동안 넌 어땠느니, 그때 만난 누군 뭐하고 있냐느니, 사실 다른 이를 더 좋아했다느니, 다람쥐 챗바퀴 돌듯 비슷한 얘기를 안주 삼아 소주병을 늘리던 중년 서넛이 갑자기 진지해졌다. 고개만 돌리면 얼굴을 마주할 만큼 딱 붙어있는 실비집이라 귀를 쫑긋거리지 않아도 남의 사연이 내 사연이 됐다.

    소이산 모노레일 종착역
    소이산 모노레일 종착역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긴 한데,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애들 보고, 시계 보면 11시가 훌쩍 넘어 있고 출근하려면 자기 바쁘고…. 뭘 해봐야지 하는 게 없는 거야. 10년 가까이 이 패턴이다 보니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데, 거 참 어렵더라고.”

    얼굴이 벌건 한 친구의 말에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암묵적 동의란 게 이런 건가 싶을 때 그 중 새치가 가장 많은 이가 해답 버튼을 눌렀다.

    “그거 말이야. 살짝 번 아웃이 온 걸 수도 있는데, 회사 선배가 그러더라. 난 왜 내 생활이 없는 걸까 고민하다 10년 후딱 간다고. 그 선배 말로는 내 생활 찾는다고 집에 소홀하다 고개 들어보면 애들은 이미 다 커서 끼어들 틈이 없고, 와이프는 당신 생활하라고 일부러 피한다는 거야. 애들이 꼬물대며 아빠 찾던 그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랐다고,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손에 쥔 건 놓으면 안 되는 사람이 가장이라더라.”

    “너도… 그랬었나 보구먼.”

    “그랬지. 그래서 그 생각과 반대되는 취미를 가졌어. 주말만 되면 애 데리고 나서는 거야. 혼자이고 싶을 때도 있는데, 아내랑 셋이 나서면 명치 끝이 찌릿찌릿하거든. 아, 오늘도 내가 잘하고 있구나, 추억을 함께 만들 사람이 있다는 게 바로 행복이구나, 혼자 주문 걸듯 말하곤 내 몸 여기저기를 토닥토닥해준다. 해봐. 이거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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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이 함께 찾는 역사의 길
    소이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철원 평야
    소이산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철원 평야

    서울 도심에서 두어 시간,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인다. 철원 평야가 넓다더니 그 말, 괜한 허풍이 아니다. 모내기를 위해 물을 채운 논에 물결이 일렁이면 시원한 바람이 온몸에 스미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오대미로 유명한 철원 평야는 강원도 쌀 생산량의 20%를 책임진다. 유난히 농사가 잘 되는 이유는 땅 덕분이다. 북한 평강 지역에서 발원한 한탄강 물줄기가 굽이굽이 휘돌아 나가는 철원은 국내 최대 현무암 지대다. 현무암은 흙으로 변할 때 비옥한 땅을 만든다. 또 현무암에서 공급되는 다양한 성분이 벼의 주요 영양분이 되기 때문에 밥맛도 좋다. 비무장지대와 맞닿은 위치도 아이러니하지만 신의 한 수 중 하나. 사람의 발길이 뜸해 말 그대로 청정지역으로 손꼽힌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레이더 기지로 쓰던 막사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레이더 기지로 쓰던 막사

    걷기 위해 나선 길에 서론이 길었다. 목적지는 철원역사문화공원이다. 주차장이 꽤 넓게 조성된 이곳에는 1930년대 철원읍 시가지가 재현돼 있다. 당시 인구 8만 명 이상이 거주하던 강원도 3대 도시의 위용은 철원군청, 철원경찰서, 철원극장, 철원역, 학교, 우체국, 은행, 여관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변사의 목소리가 구슬픈 무성 영화부터 인력거, 느린 우편 등 공원 내의 체험 프로그램을 모두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데, 철원역에서 출발하는 소이산 전망대행 모노레일만은 예외다. 1930년대 금강산 여행을 떠난 이들이 꼭 들러야 했다던 철원역에선 오전 9시부터 6시까지 8인승 모노레일이 운행되고 있다. 왕복 7000원(성인 기준)의 요금을 내면 3000원은 철원사랑상품권으로 돌려준다. 함께 걷는 길이라더니 웬 모노레일? 물론 해발 362.3m의 소이산을 앞에 두고 걸어오를 것이냐 모노레일을 타고 갈 것이냐는 선택사항이다. 여기서 잠깐, 모노레일로 올라간 후 정상의 전망대까진 700여m를 걸어 올라가야 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내에 자리한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이 시작된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내에 자리한 철원역에서 모노레일이 시작된다

    막힘 없이 뻥 뚫린 지역 명산
    민통선 출입통제선
    민통선 출입통제선

    비교적 낮은 소이산이 명산이라 불리게 된 건 산이 앉아있는 방향 때문이다.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없어 정상에 오르면 철원평야의 기운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으로 통하는 길은 한국전쟁 이후 60여 년간 통제돼 왔다. 전쟁 당시 묻어놓은 지뢰가 사람을 내쫓았다. 2012년에 생태숲 녹색길(둘레길)이 조성되며 입산이 허용됐지만 지금도 북쪽 산자락의 둘레길은 ‘지뢰꽃길’이라 불린다. 산은 선명하다. 여름 볕을 받아 쨍하게 물이 오른 생강나무, 갈참나무, 때죽나무 등 토종 나무의 향이 그렇고, 일제 때 심었다는 아까시나무가 그렇다. 굳이 등 산화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르다.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봉수지가 있어 길 이름도 ‘봉수대오름길’이다. 지금도 국군의 진지가 그대로 있어 차가 오를 수 있는 길도 닦아놨다. 탱크가 올라올 수도 있을 만큼 폭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정상 부근에 조성된 포진지를 보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맞은편에 자리한 노동당사
    철원역사문화공원 맞은편에 자리한 노동당사

    정상인 소이산 전망대에 오르면 전쟁으로 사라진 구철원 시가지와 백마고지, 김일성 고지, 제2 땅굴, 원산으로가는 철길까지 더 이상 갈 수 없는 우리 산하가 훤하다. 나무 데크로 넓게 조성된 전망대에 벤치 하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길의 끝에서 만난 풍경은 유명한 해외 명소에 뒤지지 않을 만큼 이채로웠다. 그렇지 이렇게 좋은 곳엔 함께 와야지. 직접 확인해보시길.

    [글 · 사진 안재형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7호 (2025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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