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연 기자의 ‘영화로 보는 茶 이야기`] “사황자님은 태평후괴, 팔황자님은 일주설아, 구황자님은 어전용정”

    입력 : 2022.07.05 14:32:32

  • 이준기, 아이유, 강하늘 주연으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는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이 원작이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한 팩션(fact+fiction) <보보경심>은 중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한국에서도 ‘<보보경심> 때문에 중드를 보기 시작했다’는 이들이 많을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보보경심> 성공에 힘입어 속편 격인 <보보경정>까지 찍은 후 주인공 오기륭과 류시시가 17세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현대의 한 여성이 어느 날 사고로 정신을 잃었는데 눈을 떠보니 타임슬립이 되어있고 자신은 귀족 여인이 되어있는 게 스토리의 시작이다. <보보경심>에서 주인공 장효는 귀족 여인 ‘마이태 약희’가 되고 강희제의 아들 열네 명 중 4황자, 8황자, 14황자와 깊은 인연의 끈으로 묶인다. 이 중 4황자는 훗날 옹정제가 된다. 한국 드라마 <달의 연인>에서는 고려 시대로 타임슬립해 ‘해수’라는 아가씨로 눈을 뜬 여주인공이 태조 왕건의 4황자로 훗날 광종이 되는 왕소와 ‘달의 연인’이 된다는 내용이다.
    사진설명
    <보보경심>에는 유난히 차와 관련된 장면이 많이 나온다. 당시 중국 사람들이 차를 일상적으로 즐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인공 약희가 하는 일이 궁에서 차 시중을 드는 일이었기에 자연스레 차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자주 등장한다. 능력을 인정받아 차 시중을 총괄하게 된 약희는 “앞으로 기호에 따라 차를 올리라”라고 명한다. “사황자님은 태평후괴, 팔황자님은 일주설아, 구황자님은 어전용정.”

    이 때 이 얘기가 나온다. 태평후괴는 무엇이고 일주설아는 무엇이고 어전용정은 또 무엇인가.

    차의 종주국이면서 한 때 차로 전세계를 쥐락펴락했던 중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차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그 엄청 비싸다는 보이차?”하는 사람이 많지만, 땡~ 답은 녹차다. 2020년 기준 중국 차 생산량 중 녹차가 차지하는 비율이 61.7%다. 소비 비율은 50%가 넘는다. “중국 가서 재스민차만 엄청 마셨지 녹차는 본 적이 없는데…” 할 수도 있겠다. 실제 외국인이 중국에 가서 가장 자주 접하는 차는 아마도 재스민차일 터다. 그러나 재스민차는 재스민으로 만든 차가 아니다. 주로 녹차를 베이스로 재스민 꽃 향을 입힌 차를 재스민차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녹차 하면 ‘오설록 현미녹차 티백’을 주로 떠올리고 녹차 좀 아신다는 분들은 ‘우전’ ‘세작’을 말하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중국에서 녹차는 엄청나게 다양한 이름의 차로 만들어진다. 옹정제가 되는 사황자가 좋아하는 ‘태평후괴’와 구황자가 좋아하는 ‘어전용정’도 모두 녹차다.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에서 훗날 청나라 옹정제가 되는 사황자는 가장 좋아하는 차로 '태평후괴'를 꼽는다.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에서 훗날 청나라 옹정제가 되는 사황자는 가장 좋아하는 차로 '태평후괴'를 꼽는다.
    다시 질문 하나. 중국에서 가장 비싼 차는? 눈치 빠르신 분은 “녹차?” 할 수도 있겠다. 딩동댕! 최근 고급차의 대명사쯤으로 인식되는 보이차는 원래 중국 남쪽 국경에 접한 운남성에서 생산해 현지인이 주로 마시던 차였다. 보이차가 중앙 무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청나라 대에 들어서면서다. 그 이전까지 중앙에서는 대부분 녹차를 마셨다. 당연히 가장 고급차면서 가장 비싼 차는 녹차였다.

    중국에서 최고급 녹차는 50g에 몇 백만원을 호가한다. 보관과 관리도 무척 까다롭다. 녹차는 품질이 변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미 기간이 짧아 보통 그해에 다 마셔야 한다. 상미 기간 중에도 마시고 남은 차는 꼭꼭 밀봉해 보관한다. 차냉장고나 와인냉장고에 보관하는 이들도 있다. 그냥 상온에 던져두면 차 맛이 변질되어 그 풍미를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50g에 수백만원 호가하는 최고급 녹차 많아 그뿐인가. 중국은 매년 10대 명차를 선정해 발표하는데 10대 명차 중 늘 7~8개가 녹차로 채워진다. 육안과편, 서호용정, 벽라춘, 황산모봉, 태평후괴, 안길백차, 은시옥로, 신양모첨 등이 10대 명차에 단골로 포함되는 녹차다. 이 중 일반적으로 서호용정이 가장 비싸고 그 다음이 태평후괴라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잠깐. 어떤 차가 녹차일까. 카멜리아 시넨시스라는 종으로 만드는 차는 제다 방법과 산화도에 따라 6대 다류로 분류한다. 백차, 홍차, 황차, 청차, 녹차, 흑차 등 6대 다류 중 산화도 5% 미만으로 산화가 거의 되지 않은 차가 바로 녹차다. (최근에는 6대 다류에 보이차를 포함해 7대 다류로 분류하기도 한다. 결명자차, 보리차, 구기자차, 유자차, 허브차, 연꽃차 등은 어디에 속하냐고? 이런 차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차’가 아니다. 차 대용이라는 의미에서 ‘대용차’라 부른다.)

    중국 녹차에 비해 다양하지 않은 한국 녹차는 우전과 세작 정도가 있다. 모두 녹차의 채엽 시기와 연관이 있다. 보통 청명과 곡우 사이에 잎을 따 만든 녹차를 ‘우전’이라 부른다. ‘곡우 전’이란 뜻이 담겨 있다. 그해 처음으로 잎을 따서 만든 차라는 의미로 ‘첫물차’라고도 한다. 곡우와 입하 사이에 따는 두물차가 ‘세작’이다. 세작은 참새의 혀를 닮았다 해서 ‘작설’이라고도 부른다. 입하 이후로 따는 차는 잎의 크기에 따라 중작, 대작 등으로 부르는데 품질이 썩 좋지 않아 잎차로 마시기보다는 다양한 가공차의 원료로 활용한다.

    중국에서는 녹차를 유리잔에 우리면서 찻잎이 물에 가라앉았다 떠오르다 하는 모습을 즐기곤 한다. <사진 윤관식 기자>
    중국에서는 녹차를 유리잔에 우리면서 찻잎이 물에 가라앉았다 떠오르다 하는 모습을 즐기곤 한다. <사진 윤관식 기자>
    ▶‘우전’ ‘세작’은 녹차의 채엽 시기에 따른 이름 또 한국에서 녹차는 종이컵에 티백 하나 넣어 마시는 차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중국에서는 보통 녹차를 긴 유리잔에 우려 마신다. 찻잎이 물에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면서 자리를 잡는 모양새 자체가 아름다워 이를 즐기기 위해서다. ‘차를 마시고 즐기는 것’은 예로부터 중국 문인들의 호화로운 풍류 생활로 여겨졌다. 녹차를 즐기는 법에서도 그런 풍류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계절과 녹차 종류에 따라 ‘상투법’ ‘중투법’ ‘하투법’이라 해서 다른 방식으로 우려 마셨다. 상투법은 물을 먼저 넣고 찻잎을 넣는 방식으로 가벼워서 빨리 가라앉는 차나 주로 여름에 이런 방식으로 마셨다. 중투법은 봄·가을에 마시는 법으로 물 넣고 찻잎 넣고 다시 물을 넣는 식이다. 용정같이 찻잎이 평평한 차는 주로 중투법으로 마셨다. 하투법은 묵직한 차를 우리거나 겨울에 즐긴 방식이다.

    다시 어전용정과 태평후괴로 돌아가자.

    어전용정은 흔히 용정차라 불리는 서호용정의 한 종류가 아닐까 짐작된다. 용정차는 중국 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면세점에서 가장 많이 사오는 차 중 하나다. 중국 면세점에 많이 깔려있는 차가 주로 용정차, 보이차, 재스민차, 공예꽃차(동그랗게 말려있다 물을 부으면 화려한 꽃이 피어나는 차) 등이기 때문이다.

    서호용정의 서호가 지명인 것처럼, 태평후괴의 태평도 지명이다. 안휘성 황산시 태평호 인근에서 만들어진다. 사진은 우리기 전 태평후괴. <사진 윤관식 기자>
    서호용정의 서호가 지명인 것처럼, 태평후괴의 태평도 지명이다. 안휘성 황산시 태평호 인근에서 만들어진다. 사진은 우리기 전 태평후괴. <사진 윤관식 기자>
    서호용정은 ‘서호를 둘러싼 용정 인근에서 만들어진 차’라는 의미다. 절강성 항주시 서쪽에 있는 호수인 서호 인근은 차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갖춘 지역으로 꼽힌다. 용정차는 2~3㎝ 길이에 찻잎이 납작하게 눌려있는 모양이다. 차를 덖을 때 눌러서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지역은 사봉(獅峰), 매가오(梅家塢), 호포천(虎跑泉) 등. 이 중 사봉 지역 차를 ‘사봉용정’이라고 부르는데, 사봉용정은 서호용정 중 최고 몸값을 자랑한다. 와인을 생각하면 쉽다. ‘본 로마네’라고 표기된 와인보다 ‘본 로마네 클로드레아’ 이런 식으로 좀 더 자세하게 지명이 표기된 와인이 더 비싼 것과 마찬가지다. 사봉용정은 와인식 표기법에 따르면 ‘서호용정 사봉’쯤 되겠다.

    용정차가 명실상부 명차 반열에 오른 건 청나라 건륭제(1711~1799) 때다. 건륭제는 단 하루도 차를 마시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로 차 애호가였다. 60년간 황제 자리를 지킨 건륭제의 장수 비결로 호사가들은 차를 꼽기도 한다. 건륭제가 특별히 좋아한 차가 용정차다. 용정차밭에 가서 차 따는 장면을 구경하고, 용정차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사봉산 아래 차나무 18그루를 ‘어차수(御茶水·황제의 차나무)’로 지정했다. 이 18그루 차나무에서 채옆한 찻잎으로 만든 용정차를 ‘서호용정어전십팔과’라고 불렀다.

    옹정제가 되는 사황자가 가장 좋아한다는 태평후괴는 어떤 차일까. “이것은 해초인가 녹차인가.” 태평후괴를 보고 사람들이 농담 삼아 하는 말이다. 길이 5~6㎝에 작은 미역 같은 비주얼을 지녔고 실제 우리면 해초 맛도 좀 난다.

    태평후괴는 길이 5~6㎝에 작은 미역 같은 비주얼을 지녔다. 길이가 길어 보통 태평후괴는 긴 유리잔에 넣어 우린다. <사진 윤관식 기자>
    태평후괴는 길이 5~6㎝에 작은 미역 같은 비주얼을 지녔다. 길이가 길어 보통 태평후괴는 긴 유리잔에 넣어 우린다. <사진 윤관식 기자>
    서호용정의 서호가 지명인 것처럼, 태평후괴의 태평도 지명이다. 안휘성 황산시 태평호 인근에서 만들어진다. 후괴의 후(猴)는 ‘원숭이 후’인데 나무가 높아 원숭이를 훈련시켜 찻잎을 따게 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는 설도 있고, 아기원숭이가 죽었는데 어느 노인이 그 원숭이를 묻어준 자리에서 이 차나무가 자랐기에 ‘후’자를 붙였다는 설도 있다. 이 외에도 이름은 백차인데 실제로는 녹차인 안길백차, 소라처럼 꼬불꼬불 말려있어 외양부터 눈길을 끄는 벽라춘, 솥에서 덖어내는 게 아니라 찜통에서 쪄서 만들어내는 은시옥로 등 다양한 녹차가 존재한다.

    취향이 무한대로 세분화되는 시대다. 1990년대에는 “어떤 커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수많은 이들이 “헤이즐넛”이라고 천편일률적으로 답하곤 했다. 지금은 ‘콜롬비아 수프리모’ ‘에디오피아 예가체프’ ‘브라질 옐로버번’ ‘파나마 게이샤’ 등 다양한 답변이 나온다.

    차 애호가로서 “어떤 차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사봉용정을 제일 좋아하지만 비싼 데다 최상급 품질의 차를 구하기 어려워 잘 못 마시니 안타깝다. 매년 5월 하동에서 녹차명인이 정성스레 만든 우전을 공수받아 마시는 걸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바늘처럼 뾰족뾰족 길고 가는 은시옥로를 유리잔에 우려 마시면서 찻잎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몸을 펴는 장면을 바라보는 ‘차멍’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마치 삶은 밤을 먹는 듯 구수한 향과 맛이 일품인 육안과편이 최고” 등등, 자신만의 세세한 취향이 한껏 녹아있는 답변이 자연스러운 날이 어서 오기를.

    [김소연 매경이코노미 편집장 sky6592@mk.co.kr]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2호 (2022년 7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