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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모의 미술동네 톺아보기] 베르메르의 ‘천문학자’가 루브르에 간 까닭은?
기사입력 2021.01.07 16: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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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1984~ )의 영화로도 잘 알려졌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조차도 마치 실제로 본 듯 머릿속에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1632)는 유명한 그림이다. ‘북유럽의 모나리자’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 때문에 작가도 덩달아 유명해졌는데 우리는 흔히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 외국어 표기법을 적용해 제대로 쓰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Jan Vermeer·1632~1675)이다.

43년이란 길지 않은 생애에 걸쳐 30여 점에 불과한 작품만 남기고 세상을 떠난 탓에 그는 그간 잊힌 작가였다. 이후 20세기에 들어 다시 그의 따스하고 섬세한 빛 처리와 인물에 대한 독특한 묘사와 일상이 담긴 풍속화, 즉 일상을 그린 장르화(Genre Painting)라고 하는 ‘생활화’로 인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지리학자> (유화·53x46.6㎝·1668·슈테델 미술관)



독일의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바겐(Gustav Friedrich Waagen·1794~1968)이 2차 세계 대전 후 세계각지로 흩어져나간 비엔나 체르닌미술관(Czernin Gallery)의 소장품 중 피터 훅(Pieter de Hooch·1629~1684)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회화의 기술-알레고리>(1666~1668)를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특정한 후,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테오필 토레(Etienne Joseph Theophile Thore·1807~1869)가 집중적으로 연구하며 새롭게 조명받았다. 토레는 1848년 ‘2월 혁명’에 가담했다 사형선고를 받고 11년을 복역하고 특사로 풀려난 후 죽기 전 약 10여 년 동안 미술비평을 하며 살았던 특이한 이력의 사람이다. 사회주의자였던 토레는 사실적인 그림에 관심을 가져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주목했고, 그를 ‘재발견’해 세상에 내놓았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그가 살았던 16~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델프트의 시대상과 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그 시절을 연구하고 재구성하는 데 큰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새롭게 그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회색조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지만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감돌며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정지된 느낌과 창밖에서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이 인물이나 실내의 사물과 만나면서 자아내는 신비로움이 잔잔한 평화와 질서 정연한 안정감으로 전이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안도하게 하는 그림으로 페르메이르의 명성이 높아지고 회화사적으로도 재조명되자, 세계각지의 미술관들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실제로 연구자들에 따라 다른데, 그의 전기와 ‘전작도록(Raisonner)’을 쓴 얀 블랑(Jan Blanc·1975~ )은 그의 작품을 37점이라 했고, 2017년 2월 루브르에서 열린 페르메이르의 회고전을 큐레이팅한 블레이즈 두코(Blaise Ducos·1975~ )는 전문가들 사이에 합의가 안 된 1점을 제외하면 36점이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워낙 작품 숫자가 적다 보니 세계 중요 미술관들이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구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근대미술의 종주국이라고 콧대를 세우는 프랑스의 루브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자국 미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인해 일부러 홀바인, 프란츠 할스, 렘브란트 같은 네덜란드 황금시기 플랑드르 화가들을 모른 체하고 작품수집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천문학자> (유화·51x45㎝·1668·루브르 미술관)



페르메이르 작품은 1870년 구입 소장한 <레이스 뜨는 여인>(De kantwerkster·1669~1670)이 유일했다. 그 후 100년도 더 지난 1983년 그 귀하다는 페르메이르의 작품 중 한 점인 <천문학자>(1869)를 소장하면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원래 이 작품은 암스테르담의 개인이 소장했던 작품이지만 1804년 영국으로 팔려갔다가 1881년 루엥의 한 개인으로부터 로스차일드 가문(Rothschild Family)이 인수했다. 그 이후 그 일가는 비엔나와 미국을 거쳐 파리의 에드와르 로스차일드(Edouard de Rothschild·1868~1949)의 집에서 2차 대전 중 파리를 점령한 히틀러 군대에 약탈당해 오스트리아 린츠로 옮겨졌다.

당시 히틀러는 전 세계의 유명작품을 모아 린츠에 세계 최대의 미술관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1940년 11월 로스차일드가의 소장미술품을 약탈한 나치의 이론가이자 문화재 약탈을 담당했던 ERR(Einsatzstab Reichsleiter Rosenberg)의 총책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1893~1846)는 귀한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약탈하곤 흥분해 히틀러의 비서 마틴 보어만(Martin Ludwig Bormann·1900~1945)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동봉한 보고서는 총통 각하께 큰 기쁨을 드릴 것이라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도 기쁜 마음으로 총통 각하께, 각하께서 전에 언급했던 델프트의 얀 페르메이르의 그림이 로스차일드가에서 몰수한 작품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면에서 가장 가치 있는 유럽작품’으로 분류되어 관리번호 1479을 달고 린츠로 갔다. 그 후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름 대신 번호를 붙였던 것처럼 ‘2609/1’이란 번호로 독일 뮌헨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5년 나치가 패망하면서 반환되어 가문의 상속자인 기 드 로스차일드(Guy Rothschild·1909~2007)의 소장품이 되었다.

결국 이렇게 돌고 도는 운명을 지녔던 <천문학자>는 1983년 루브르의 품에 안기면서 방황을 끝냈다. 루브르가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것은 프랑스의 문화재 미술품으로 세금 대신 낼 수 있도록 하는 물납제도, 즉 대물변제제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1968년 프랑스는 자국의 문화재 또는 문화유산이 해외로 반출되는 것을 막고, 개인 소장 문화재, 미술품을 공공의 영역으로 끌어내 국민들에게 문화를 통한 공동체 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1896년 영국에서 처음 시행된 대물변제제도(AiL·Acceptance in Lieu)를 들여왔다. 영국이 상속세에 한정해 문화재 미술품의 물납이 가능하지만, 프랑스는 상속세는 물론 공유세뿐만 아니라 재산세 물납까지 가능하다. 이 제도에 의해 로스차일드가는 1983년 이 작품을 국가에 세금 대신 납부했고, 정부는 루브르가 소장 관리하도록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5년 파리의 마레지구에 문을 연 피카소미술관도 1973년 피카소 사후 그의 가족들이 물납제도를 이용해 상속세(현금)대신 작품으로 납부해 개관한 미술관이다. 이후 프랑스는 2003년부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제 혜택을 부여하는 일명 아야공법(Loi Aillago)을 도입해 문화시설에 현금 또는 작품을 기부할 경우 소득세, 법인세 등을 감면해주는 제도를 운용해 문화국가의 위상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제도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캐나다 등 국가들이 도입 시행하며 보편적인 문화복지국가 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천문학자가 왼손으로 짚고 있는 책상 위에는 메티위스(Adriaan Metius·1571~1635)가 구약에서 영감을 얻어 쓴 <천문지리법제(Institutiones Astronomicae Geographicae)>가 펼쳐져 있다.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로 달과 별을 보며 인도한 족장 모세가 최초의 천문학자임을 암시한다. 왼손 위쪽 옷장에는 자신의 서명과 제작연도가 보인다.

원래 짝을 이루어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작품의 한쪽은 현재 프랑크푸르트 슈테델미술관(Staedel Museum)이 소장한 <지리학자>(1668년 작)다. 이 작품에도 우측 상단에 <천문학자>와 같은 방식으로 서명과 제작연도를 적어 넣었는데 왼쪽 창을 향한 두 사람의 구성과 책상 위의 천 등이 인물의 직업만 다르지 모든 것이 같은 구도이다. 18세기경 헤어진 이 두 작품은 1997년 루브르에서 열린 회고전에 나란히 전시되어 상봉의 기쁨을 맛보았다.


▷정준모

중앙대학교와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동숭아트센터, 토탈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창설을 담당했다. 1996년부터 2006년 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과 학예연구실장, 덕수궁미술관장을 지냈다. 현재 큐레이터이자 미술 행정가로 시각 문화 정책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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