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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인문학산책] 인간은 왜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가
기사입력 2021.01.07 15:4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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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만물의 이치를 터득한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

‘데르수 우잘라’라는 이름의 사냥꾼이 있었다. 러시아 극동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살았던 이 퉁그스족 남자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건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데르수 우잘라> 때문이었다. 이 영화는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과 모스크바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다.

영화는 데르수가 20세기 초 시호테알린 산맥을 탐사했던 러시아인 아르세니에프의 길 안내를 맡으면서 벌어진 일을 다룬다.

문명인이었던 아르세니에프는 데르수와 함께 오지를 답사하면서 큰 충격을 받는다.

데르수는 자연에서 세상의 이치를 터득한 현인이었다.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그는 만물의 섭리를 숲에서 터득한 사람이었다. 함께 길을 나선 탐사대원들도 처음에는 러시아말을 제대로 못하는 이 늙은 원주민 사냥꾼을 무시했지만 점점 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됐다.

데르수는 숲에 남아있는 발자국과 몇 가지 흔적만 보고도 거쳐 간 사람의 수와 나이,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심지어는 러시아인인지 중국인인지 원주민인지까지 알아맞혔다.

그의 직관과 통찰은 놀라운 것이었다. 탐사대원들이 발자국만 보고 나이를 어떻게 맞추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젊은 사람은 발끝으로 걷고, 노인들은 뒤꿈치로 걷지.”

상대적으로 체력이 좋고 성질이 급한 젊은 사람은 체중을 발끝에 싣고, 체력이 떨어지고 느린 노인들은 뒤꿈치에 힘을 준다는 이야기다.

명사냥꾼 데르수가 여섯 발의 총을 쏘고도 사슴을 죽이지 못한 적이 있었다.

동행들이 왜 이런 실수를 했느냐고 묻자 데르수는 이렇게 말한다.

“저 사슴은 내 사슴이 아니라 이 근처에 사는 호랑이의 것인 모양입니다.”

아주 오래 전 이 땅에 처음 뿌리 내린 우리의 선조들은 데르수처럼 생각하고 데르수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나무의 생로병사는 드라마틱하다

숲은 한 편의 드라마다. 숨죽인 듯 조용해 보여도 숲에서는 생로병사의 드라마가 매일 만들어진다. 물론 숲의 주연배우는 나무다.

나무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숲에서는 죽은 나무까지도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오랫동안 숲을 지키던 나무 한 그루가 생을 마감했다고 치자.

생명의 주기를 끝낸 나무에는 장수하늘소가 산란을 하고 애벌레를 먹기 위해 날아온 딱따구리가 구멍을 뚫고 집을 짓는다.

딱따구리가 파놓은 구멍에서 흘러나온 수액은 작은 곤충들의 달콤한 음료가 되고 점점 분해되어 가던 나무가 결국 쓰러지면 쓰러진 나무 틈으로 족제비가 몸을 숨기고 도마뱀이 집을 짓는다.

축축한 숲 바닥에서 이끼들이 올라와 쓰러진 나무를 뒤덮으면 그 속에 거미가 알을 낳고 버섯이 자라기 시작한다.

버섯을 먹기 위해 달팽이와 짐승들이 나무를 찾고 숲은 다시 새로운 순환을 시작한다.

불교 교리 중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게 있다. 국외 포교에 앞장서다 2004년 열반에 든 숭산 스님은 ‘불생불멸’을 외국인들에게 설명할 때 명료하게 ‘no appearing, no disappearing’이라는 말로 대신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새롭게 나타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말이다.

이 개념으로 보면 살고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살든 죽든 모든 것은 우주 안에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있을 뿐이다.

나무로 있든, 벌레의 뱃속에 있든 형태만 바꾸었을 뿐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과학도 불생불멸을 인정한다. 특히 환경이나 생태이론에는 이미 불생불멸이 자리 잡고 있다.

놀라운 건 숲 전체 생태계 중 30% 정도가 죽은 나무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나무는 죽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은 것이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본 사람만 인생의 본질을 알게 된다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일이 그저 당연하기만 했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가.”

오스트리아 산악인 헤르만 불은 1953년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바트 정상 단독 등정에 나선다. 그는 바람을 막을 장비와 추락을 예방해주는 자일도 없이 빙벽에 매달려 밤을 맞이하게 된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 앞에서 29세의 한 산악인은 의연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라며 산을 선택한 자신의 의지를 후회하지 않는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산악소설 <빙벽>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친구와 함께 등반을 갔던 주인공이 혼자 살아서 돌아온다. 자일이 끊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실연한 친구 고사카가 자살하기 위해 스스로 자일을 끊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주인공은 이것을 단호하게 부정한다.

“고사카는 산악인이다. 그가 암벽을 오르면서 자살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산의 신성을 모독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산악인은 산이 원하면 생명을 바치지만, 속세를 청산하려고 산에서 일부러 목숨을 끊는 그런 짓은 결코 하지 않는다.”

산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에는 신변잡기 소설이나 처세술로 가득 찬 책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인간정신의 가장 높은 성취가 담겨 있다. 그 책들을 만든 건 결국 산이기 때문이다.

산악인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낚시인도 자연에 고개를 숙일 줄 안다.

“자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고 잠시라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한곳에서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주의해서 지켜보고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뜻 보기에 도를 닦는 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좋은 낚시꾼이 되는 법을 이야기한 말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즐겨온 취미는 모두 인생과 닮아 있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폴 퀸네트는 이름난 낚시광이다.

그가 쓴 산문집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낚시를 해야 할 때가 온다>에는 낚싯대로 건져 올린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해야 하는 특별한 날에는 자신만 아는 호수로 낚시를 떠나라. 혼자서 낚싯대를 챙겨들고 지도도 없이 해와 별을 지표 삼아 떠나라.”

퀸네트는 낚시가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진리를 이렇게 설파한다.

“‘중년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멋진 물고기를 놓쳐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에서 고기를 잡고 못 잡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흐르는 물을 잠자코 지켜봤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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