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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에서 만난 독일 대문호 볼프강 괴테의 삶의 흔적
기사입력 2021.01.07 15:36:06 | 최종수정 2021.01.07 15: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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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앙을 흐르는 마인강에 의해 남과 북으로 나뉜 프랑크푸르트는 12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도시 대부분이 파괴됐지만, 독일의 여느 도시와 달리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지 않고, 오히려 도시를 현대화시킨 프랑크푸르트. 그 결과 독일의 금융 중심지이자 박물관, 극장 그리고 미술관을 갖춘 역동적인 문화 중심지로 주목받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는 저명한 인쇄업자인 요한 구텐베르크와 작가이자 정치가인 볼프강 폰 괴테 등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대가 동시에 공존하는 이 도시의 매력은 독일의 수준 높은 문명 기술과 유구한 역사가 서로 상생하며 발전하는 모습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기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옛 시가지는 새롭게 지은 많은 현대식 빌딩과 세월의 먼지를 뒤집어쓴 대성당, 시청사 등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활력을 빚어낸다. 우선 중앙역을 등지고 10분 정도 걸어가면 눈앞에 높다란 대성당 첨탑이 눈에 들어온다. 붉은 사암으로 건축된 대성당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경건한 정신이 스민 곳이기도 하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인 13~14세기에 건립된 이 대성당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선거와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또한 괴테는 어릴 적부터 이곳에서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맞춰 성가(聖歌)를 부르며 신앙심을 키웠다. 성당 앞에는 소년 괴테가 뛰어놀던 뢰머 광장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옛 시청사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는 광장은 시민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자 청년 괴테가 방황하던 곳이다.



광장 중심에는 1405년부터 정부청사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시청사가 오늘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청사 내부에는 샤를마뉴에서 프란시스 2세에 이르기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 52명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독일 황제들의 대관식 장소로 프랑크푸르트가 선택된 이유가 설명된 역사 기록도 보존되어 있다.

광장 주변의 작은 골목길에는 아담한 카페와 선술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괴테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니면서 방학 때마다 고향으로 돌아와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정치·경제·문화·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현재 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를 좋아하는 팬들은 광장 주변 카페에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괴테와의 교감을 시도한다. 이처럼 프랑크푸르트는 괴테의 젊은 시절 추억이 서린 곳이다.

광장 주변에는 괴테가 1749년에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대표작 <파우스트>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집필하였다. 지금은 괴테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그의 유품과 그가 그린 그림, 친필 편지 등 다양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생가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 괴테가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괴테는 독일을 대표하는 대문호이자 철학자, 과학자, 화가, 정치가 등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 르네상스적인 인물이다. 1749년 8월,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괴테는 어릴 때부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히브리어 등을 배웠고, 미술과 종교 수업뿐만 아니라 피아노, 첼로, 승마, 사교춤 등도 배웠다. 무엇보다 괴테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2000권에 달하는 법률 서적을 비롯한 각종 문화예술 서적을 거의 다 읽었다. 어느새 청년이 된 괴테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을 공부한 뒤 20대 초반에 변호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과 궁정 극장장 등을 역임하였다. 독일 최고의 지성인이자 존경받는 괴테의 흔적을 찾아 생가에 전시된 유품들을 천천히 둘러보면 왜 그의 이름 앞에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지 알 수 있다.



괴테의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그가 사랑한 뮤즈이다. 괴테는 83세까지 살며 20여 명의 여자와 사랑을 나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카소, 베토벤, 클림트, 마티스, 모네 등 수많은 예술가가 여성을 통해 영감을 받았듯이, 괴테도 마찬가지로 여성들로부터 그의 창작욕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뮤즈를 통해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완성하였다.

괴테의 첫 번째 뮤즈는 14세 때 만난 이웃집 소녀 그래트헨이다. 이 이름은 괴테가 죽기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하지만 그녀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귀족 가문의 딸이라 사랑이 이뤄지지 않았다. 두 번째는 괴테가 28세 때 만나 약혼까지 한 프리테리케 브리온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괴테는 그녀와 파혼을 했고, 그녀를 통해 <만남과 이별> <들장미> 등을 썼다. 세 번째 뮤즈는 그 유명한 샤를로테 부프이다. 그의 절친한 친구 케스트너의 약혼자였던 샤를로테는 홀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돌보는 가장이었지만, 늘 밝고 쾌활하고 순수해서 괴테가 사랑하게 된 여인이다. 그러나 샤를로테가 친구 케스트너와 결혼하자 자살까지 시도한 괴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극복하고 그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불과 14주 만에 완성하였다.

이 외에도 많은 여성이 괴테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1815년 66세 때 만난 35세의 마리아네 폰 빌레머는 괴테에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었다. 그녀는 발레단에서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궁정 고문관인 빌레머와 결혼한 유부녀였다. 괴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서동 시집>의 도입부를 쓰고 있을 때 아름다운 빌레머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 몰래 괴테와 사랑의 편지를 나눴고, 프랑크푸르트의 인근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여행하며 정원 담벼락에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랑받은 나는 이곳에서 행복했노라”라는 글귀도 남겼다.



물론 괴테와 마리아네의 사랑은 또 이뤄지지 않았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생각하는 마리아네. 노년에 찾아온 마리아네와의 사랑은 괴테에게 무한한 예술적 영감을 주었고, 1819년에 간행된 <서동 시집> 속 ‘줄리아카’ 시편은 괴테와 마리아네의 사랑 결실로 이뤄진 연시들이다. 이때 괴테가 마리아네와 헤어지면서 보낸 편지에는 “당신의 눈길에/ 당신의 입술에/ 당신의 가슴에 나를 맡기고/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내겐 청음이자 마지막 즐거움이었습니다. / 아아, 그러나 그 즐거움도 어제로 끝나고/ 이제 내겐 빛도 불도 꺼져버렸습니다./즐거웠던 그 모든 추억/ 이젠 한없이 무겁고 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를 다시 맺어줄 생각이 신에게 없는 한/ 해도 달도 세계도 내게는/ 그저 목 놓아 울 수 있는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괴테의 문학은 사랑하고 이별하고 또 사랑하고 이별하면서 성장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24세 때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파우스트>를 1832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탈고했다.

독일 대문호 괴테의 흔적을 느끼고 나면 프랑크푸르트는 중세가 아닌 현대의 찬란함으로 다시 눈앞에 펼쳐진다.
사실 프랑크푸르트는 중세의 기품보다는 현대적인 요소들이 도시를 가득 채운다. 높고 다양한 빌딩 숲 사이로 유럽 고유한 전통이 스며있는 것이다. 특히 프랑크푸르트는 높게 솟아오른 빌딩들이 도시에 새로운 활력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4호 (2021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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