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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거리를 배회하는 박정희 시대의 유령
기사입력 2020.01.30 11:21:08 | 최종수정 2020.01.31 14:3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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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로 하여금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게 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차지철의 막돼먹은 행동들? 박정희의 야비함? 아니면 김재규가 가졌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시대적 소명의식? 박정희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그러니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나서 박정희는 내가 언제 그렇게까지 하라고 했냐는 듯 가차없이 상대를 내치는 전법을 구사한다. 솔직히 말하면, 아무리 그렇다 한들 사람은 총으로 다른 사람의 머리를 날려 버리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에 망설이고 주저하게 돼 있다. 그래서 그보다 더 강렬하면서도 격렬한 이유들이 있어야 한다. 김재규는 왜 순간적으로 야수가 되어야만 했을까.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그 과정과 결과를 비교적 소상히, 설득력 있는 윤색으로, 차가울 만큼 드라이하게 설명하고 그려낸다. 10·26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자 새로운 해석을 던지는 셈인데 그 방식이 꽤나 신선하다.



우민호 감독은 의도적으로 모든 인물에 가상의 이름을 붙여 놓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규평(이병헌)으로, 차지철 경호실장은 곽상천(이희준)으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박용각(곽도원)으로, 그리고 박정희는 박통(이성민)으로 이름 지었다. 심지어 전두환은 전두혁(서현우)으로 나온다. 아마도 이는 실제 이름을 붙여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시시비비(특히 박정희 추종자들 혹은 전두환 일파로부터)를 피해 보겠다는 심산으로도 읽힐 수 있겠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명을 붙임으로써 허구의 영역을 넓히고, 그럼으로써 더해지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과거의 어마어마했던 사건의 실체를 관객들이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작동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의 이야기는 박용각(=김형욱)의 코리안 게이트로 시작한다. 박통(=박정희)은 그 인간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박용각이 자신의 독재 행위를 미국에서 까발리고 있기 때문… 이라기보다는, 스위스 비밀계좌에 숨겨 놓은 돈을 훔쳐 갔기 때문이다. 김규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박용각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하는 편이지만 박정희는 믿지 않는다. 셋 간의 불신, 아니 그보다는 오로지 돈을 생각하는 박통의 본 모습이 결국 김규평의 심장에 불을 지른다. 박통은 부동자세로 서 있는 김규평에게 말한다. “그럼 내 돈은? 내 돈은 누가 찾아오나? 내가 원하는 것을 갖고 오란 말야!” 그러면서 담배를 피고 싶다는 시늉으로 두 손 가락을 입에 갖다 대는데, 김규평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주머니를 뒤지다가 허둥지둥 집무실 구석에 있는 박통의 담배를 가져오려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과 박통에 대해 순간적으로 욱해져서는 담뱃갑을 주먹으로 구겨 버린다. 김규평은 박통을 위해 친구인 박용각을 막 제거한 참이다. 정작 담배는 곽상천(=차지철)이 손 빠르게 가져와 박통의 비위를 맞춘다. 아마도 이때 비로소 김규평은 박통을 죽여야 하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는 것으로 영화는 설정을 맞춘다. 이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상상일까. 영화가 만약 김재규, 박정희, 차지철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이런 장면, 개연성 있는 상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영화가 갖는 비현실성의 현실성, 곧 지나치게 허구적이어서 오히려 사실과 진실의 공간, 그 문을 열어 놓는 듯한 느낌이 극대화된다. 역사학자들은 이 장면에 대해 확답과 확언을 거부하겠으나 아마도 그 시절, 그 상황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럴 듯한 허구를 통해 영화는 1970년대 후반에 벌어졌던 거대한 사건의 한 축을 밝히려고도 한다. 김형욱 실종 미스터리인데, 일설에 의하면 그는 박정희의 지시로 국내로 체포돼 남산 지하실에서 총살을 당하고 시신은 불태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국 망명 생활 중 귀국 여부를 타진하고자 파리에 갔다가 납치됐는데 근교 농장에서 탈곡기에 넣어져 갈려 죽었다는 설이 파다했었다. 영화는 후자를 사실로 선택하고 있는데 그것이 보다 ‘영화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그것을 둘러싼 팩트 여부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박용각의 납치, 살해 과정에 대한 묘사가 꽤나 뛰어나기 때문이다. 납치 과정은 마치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 <팅커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당시 김형욱 납치는 한국의 두 조직이 동시에 벌인 일이다. 차지철 라인이 먼저 움직였고 김재규 라인이 조금 뒤늦게 움직였는데 일의 성공, 곧 김형욱 제거는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조직이 이뤄냈다. 그런데 이것도 정설은 아니다. 오랜 취재와 증언들을 취합해 조각의 퍼즐을 맞춘 결과가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영화는 이 두 조직의 추적 신을 교차시키며 그려내는데 그 서스펜스가 남다르다. 한쪽에서는 주불 파리 대사가 곽상천 라인으로 말을 갈아 탄 중앙정보부 요인과 함께 박용각을 유인해 죽이려 한다. 주불 대사는 카지노에서 도박에 빠져 있는 박용각을 그 호텔 407호로 올라가게 하려 한다. 주불 대사는 그에게 일본에 있는 전직 총리(신현확)가 비행기가 연착돼서 좀 늦어진다는 핑계를 댄다. 전직 총리는 박통의 밀명을 받고 오는 길이라는 것이다. 박용각은 그를 통해 박통이 자신을 용서한다는 얘기를 할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407호에는 소음기를 장착한 히트맨이 기다리는 중이다. 정작 김형욱은 주불 대사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등장한 국제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의 입 바른 소리에 넘어간다. 밖으로 나온 그는 중정이 고용한 알제리 출신 청부 살해 조직원 세 명에게 납치된다. 이 과정은 박통과 함께 무용공연을 보고 있는 곽상천과 김규평의 표정과 교차 편집되는데 그 둘 간의 정치적 대결은 파리의 첩보 추격전으로 대구(對句)를 이루며 영화의 절정을 향해 돌진해 나간다. 한 사람은 박통의 환심을 사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환심은 사되, 그 권력을 바꿔 보려고 노력한다. 김규평은 노력했지만 환심도 사지 못하고 권력의 성격도 바꾸지 못한다. 김규평은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다. 그런 상황에서 ‘각하’와 중앙정보부장 간의 핫 라인 전화로 곽상천이 전화를 건다. 대뜸 궁정동 만찬에 참석하라는 전갈이다. 통화 끝에 곽상천은 김규평에게 퍼붓는다. “좀 똑바로 하라고!” 곽상천은 김규평에 비하면 한참 부하다.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김규평은 부들부들 떤다. 권총의 방아쇠는 이미 한 번 당겨진 셈임을 보여 준다. 박정희의 시해는 그런 대화들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고 영화는 말한다. 사실인지 상상인지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극도로 몰상식한 행동들이 권력의 중심부에서 횡행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해 사건은 그가 자초한 18년 독재의 산물이자 결과였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시점에서 박정희와 같은 ‘급진적 민족주의=파시즘’은 종말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글라이스틴(1978~1981년 주한 미국대사로 재임. 10·26 사건과 전두환의 군사 쿠데타를 묵인하고 용인하는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 비판을 받았다.)으로 보이는 영화 속 주한 미국 대사는 김규평에게 계속해서 비슷한 말을 던진다.

“박정희는 끝났어! 다음을 준비하라고!”

박정희의 시대가 한참 지난 지금 박정희의 죽음과 얽힌 40일간의 얘기를 들춰 보는 것은 기시감을 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어쩌면 여전히 박정희 시대의 유령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바로 그 유령에 대한 얘기이다.
역사는 이 시대에 대해 아직 말끔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영화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얘기하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3호 (2020년 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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