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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⑨ 근대 절대왕정 | 영화 와 위대한 여왕의 明暗
기사입력 2020.09.03 10:46:10 | 최종수정 2020.09.05 07:3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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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엽 스페인은 절대왕정의 선두 주자로 유럽 최고의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귀금속을 거둬들였다. 이러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새로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다. 그녀는 국교회를 확립하고 동인도 회사를 세우는 등 수많은 치적을 남겨 약소국이었던 잉글랜드를 세계 최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황금시대’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치적이 위대함만으로 평가받기에는 개운하지 않은 측면도 있다. 국교회 확립 과정에서 메리 스튜어트를 비롯해 많은 가톨릭교도들이 피를 흘렸고, 스페인 식민지를 약탈했던 해적인 드레이크에게 경(卿, Sir)의 작위를 주어 해적활동을 치하하기도 했다.

세자르 카푸르 감독은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는 말로도 유명한 엘리자베스 1세를 주인공으로 두 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험난한 즉위 과정에 초점을 맞춘 <엘리자베스(1998)>와 위엄 있는 군주의 모습을 그려낸 <골든 에이지(2007)>가 그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과 관련해서는 이 밖에도 부모인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다룬 <천일의 앤(1969)>과 <천일의 스캔들(2008)>, 엘리자베스의 사촌이자 스코틀랜드 여왕이었지만 반역죄로 처형된 메리 스튜어트의 운명적 삶을 다룬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2018)> 등 다양한 영화가 있다.

골든 에이지(2007)

▶무적함대를 격파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다룬 <골든 에이지>

영화 <골든 에이지(Elizabeth: The Golden Age)>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의 삶을 그린 서사극이다. 이 영화는 절대왕정 시대의 화려한 왕궁과 의상 등을 통해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뿐 아니라 당대에 일어났던 신구교 간의 종교 대립, 아메리카 탐험과 중상주의 정책, 여왕을 둘러싼 거대한 암살 음모사건(배빙턴 음모사건), 해상권을 둘러싼 영국과 스페인과의 전쟁(특히 칼레전투)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감독은 엘리자베스 1세를 위엄 있는 군주의 모습뿐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음모와 전쟁의 공포 속에서 두려워하는 인간의 모습,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한 여자의 모습으로도 조명함으로써 여왕의 삶을 풍부한 이야기로 구성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자막으로 시작한다. “1585년 스페인은 세계 최대 강국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펠리페 왕은 유럽을 종교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영국만이 끝까지 그와 맞섰다. 영국 여왕은 개신교도였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스페인 왕은 신교도 국가인 잉글랜드를 정복하고자 준비를 시작하고 엘리자베스의 고문인 월싱엄 경은 왕권 강화를 위해 결혼하라고 조언한다. 국가 간의 동맹을 목적으로 여왕의 구혼자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엘리자베스는 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온 해적 월터 랄리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친척인 메리 스튜어트를 여왕으로 추대하고 엘리자베스를 암살하려는 음모가 발각되면서 메리는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페인은 잉글랜드를 침략할 명분을 얻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한다. 월터 랄리 경은 스페인과의 해상 전투에 참가해 화공전을 펼쳐 무적함대를 섬멸한다. 전쟁이 끝나가면서 엘리자베스 여왕이 거대한 대양을 배경으로 무적함대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새로운 패권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천일의 앤(1969)



▶엘리자베스 1세의 사략선 사업

영화 제목인 ‘골든 에이지’는 영국이 해상왕국으로 도약해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시대를 상징하며 그 전환점은 무엇보다 잉글랜드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사건이다. 16세기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신대륙과 아프리카, 인도를 잇는 독점적인 대양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유럽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작은 섬나라 잉글랜드는 재정이 거의 파산에 이를 정도로 국고가 빈약했고 종교 갈등으로 국내 문제 또한 복잡했다. 영화 속에서 결혼을 조언하는 월싱엄 경에게 엘리자베스 여왕이 “도버 방파제에 금이 갔는데 수리할 돈이 없다”며 그 문제나 신경 쓰라고 핀잔주는 장면은 이러한 재정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러면 엘리자베스 여왕은 어떻게 국고를 늘릴 수 있었을까? 다양한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 중에서도 해적을 활용한 사업은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었다. 공식적인 무역활동을 할 수 없었던 엘리자베스는 해적 행위를 승인해주고 해적들이 보물을 약탈해오면 투자한 금액에 따라 이익금을 나누어갖는 사략선(privateer, 私掠船, 적선을 공격하고 나포할 권리를 인정받은 민간 소유의 배) 사업에 투자했다.



영화 속에서 여왕의 총애를 얻는 월터 랄리는 이러한 해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각국의 왕과 이를 대신한 대사들이 여왕에게 구혼하는 자리에 아메리카 탐험가로 등장한다. 그는 여왕에게 신대륙에서 이제 막 도착했는데 그 곳 비옥한 해변을 버지니아로 명명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뒤 영국 식민지를 세우기 위해 왕실 인증서가 필요하다고 요청한다. 또한 미국 원주민을 인사시키고 엄청난 돈과 함께 아메리카에서 가져온 감자와 담배를 소개한다. 이를 지켜본 스페인 대사는 그가 스페인 배를 수없이 약탈한 해적이며 이 선물들도 해적질로 뺏은 것이라고 언성을 높이지만, 랄리는 스페인은 적이기 때문에 자기가 금을 많이 약탈할수록 폐하는 안전하다며 여왕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스페인과의 해상전 칼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다.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영화 속 월터 랄리에는 두 명의 역사 속 실존 인물이 합성되어 있다. 여왕으로부터 총애와 사랑을 받았던 탐험가인 월터 랄리라는 원래 인물과 사략 활동으로 여왕에게 많은 수익을 주고 스페인과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합쳐진 존재이다.

천일의 스캔들(2008)

▶작위와 훈장을 받은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영화 속에서 스페인 함선과 식민지를 약탈하고 무적함대를 섬멸한 월터 랄리 캐릭터의 실존 인물은 드레이크이다. 그는 플리머스에서 태어나 스페인령 도시들과 화물선을 표적으로 습격을 일삼던 해적으로, 당시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1570년부터 여왕의 투자를 받아 약탈한 재물의 일부를 왕실에 바치는 사략 활동을 펼쳤고, 1580년에는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남쪽 부분에 위치한 마젤란 해협을 통과한 후 칠레와 페루 연안을 북상하면서 스페인 식민지와 선박을 공격해 금은보화를 약탈하고 태평양과 인도양을 횡단해 귀환했다. 이 때 약탈한 보물 대부분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바쳤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드레이크에게 작위와 훈장을 수여하고 그를 잉글랜드 함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스페인은 드레이크의 처벌을 요구했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철저히 무시했고, 이런 외교적 갈등이 스페인과 잉글랜드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영화에서도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인 랄리를 총애하며 근위 대장으로 임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는 펠리페 왕을 향해 격분하는 여왕에게 스페인 대사가 “공격받는 건 스페인이다. 당신네 해적이 우리 배를 터는 게 과연 누구의 명령이겠는가”라며 다투는 모습도 나온다.

▶여왕 암살 음모 사건의 배후가 스페인?

스페인과 잉글랜드가 충돌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종교 갈등이다. 스페인은 철저한 구교도였던 반면 잉글랜드는 국교회가 주도하는 신교국가였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종교 갈등을 1586년 A.배빙턴이 중심이 되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암살과 메리 스튜어트의 구출을 계획했던 배빙턴 음모사건과 연결지어 그려내고 있다. 영화에서 스페인은 구교도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메리 스튜어트를 왕위에 앉히려는 계략을 꾸미고, 이 계획이 실패해 구교도인 메리가 사형 당하자 잉글랜드를 공격할 명분을 얻는다. 역사적으로 배빙턴 음모사건의 배후에 스페인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국가 간의 종교 갈등을 배빙턴 음모사건과 엮고, 이를 잉글랜드와 스페인간의 전쟁으로 연결시킨 것은 개연성 있는 각색이라는 판단이 든다.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2018)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엘리자베스 1세는 여성에다 사생아라는 논란으로 입지가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인 잉글랜드를 세계 최강의 해양대국으로 도약시켰다는 점에서 명군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해적질로 볼 수 있는 사략선 사업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고 해적 활동을 치하하는 훈장을 주며 해적을 지렛대로 무적함대를 격파해 해상왕국이 되었다는 사실에서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영국이 해상 패권국으로 도약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전쟁의 배경에 영국의 사략 사업이 있었다는 이면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도대체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는 말은 누가 만들어 냈을까?

[이미영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0호 (2020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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