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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명화극장] 영화 비정상적인 미국사회에 대한 토끼와 거북이식 우화
기사입력 2020.06.05 14: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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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거북이의 얘기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가. ‘거북이가 잘난 체하는 토끼를 이겼다고? 그걸 자축하고 좋아했다고? 토끼는 풀이 죽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고? 천만에 그럴 일이 없다’ 고 영화 <헌트(The Hunt)>는 얘기해 준다. 그런 대화가 오가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영문도 모른 채, 그것도 처음에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알칸소(라고 처음엔 알았지만 나중에 보니 보스니아로 알려진 곳)에 끌려 온 크리스탈(베티 길핀)은 자신을 쫓는 인간사냥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중이다. 방금 전에도 자신과 또 다른 ‘사냥감 남자’를 구하러 왔다는 보스니아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을 차로 압사시켜 죽인 참이다. 이 여자 크리스탈은 쫓기는 여자치고 가장 침착한 데다 생존 훈련의 매뉴얼을 철저히 외우고 있는 듯해서 군인이나 살인병기로 키워진 용병 냄새가 난다. 크리스탈의 정체는 나중에 밝혀지는데 그것도 사실인지 아닌지 좀 불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중에는 그 ‘팩트’가 중요하지도 않게 된다.

어쨌든 크리스탈은 사람 하나를 간단하게 처치한 후 자기 옆 생존자에게 토끼 얘기를 한다. ‘토끼와 거북이 얘기의 끝이 어떻게 됐느냐 하면 말이야’ 하는 식으로 쩜쩜쩜 뜸을 들이면서 한껏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데, 그 결말이라는 것이 어쩌면 예견 가능하긴 하다. 토끼는 축하 파티 중인 거북이 집에 찾아가 거북이와 그의 아내, 아이들까지 깡그리 죽여 버린다는 것이다. 토끼가 결코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다. 익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됐지만 이상하게도 크리스탈의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신선한 맛이 있다. 무엇보다 거북이표 해피엔딩이 아니라 토끼식 해피엔딩이라 지금껏 우리가 알았던 이솝우화의 교훈과는 완전히 딴판인 느낌을 준다. 해피엔딩을 어느 쪽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 끝판 왕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얘기와도 같은 맥락이다.



영화 <헌트>는 처음엔 할리우드가 만들어 내는 그렇고 그런 인간사냥꾼들 얘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작하는 오프닝 크레디트에 ‘블룸 하우스’의 명찰이 뜬다. 이 제작사는 B급 정서의 공포영화를 잇따라 만들어 요즘 할리우드에서 대박을 치고 있는 영화사다. <겟 아웃> <인비저블> 등의 영화를 아느냐 모르느냐는 50대의 기준선이다. 봤느냐 안봤느냐는 40대 기준선이고. 젊은 세대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블룸 하우스’의 영화들에 대해 좀 아는 척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영화사의 대표인 제이슨 블룸식의 反(기성)문화적 표현어법을 알아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있어야 한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물론 아니면 말고다.

‘블룸 하우스’의 영화답게 <헌트>는 초장부터 사람들을 간단하게 죽여 버린다. 놀라운 것은 이 사람 주인공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처음에 주의를 끌게 해놓고 연달아 사람들을 죽여 버린다는 것이다. 인간사냥꾼의 저격 라이플총에 맞아 여자의 머리통이 간단하게 날아가거나(그런 장면들이 가감 없이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영화적 쾌감이 높아만 간다. 다음번에는 어떻게 죽일까 하는 궁금증을 일게 하기 때문이다.) 구덩이에 떨어져 온몸이 죽창에 찔려 죽어 가는데, 그런 여자를 ‘뽑아내서’ 사내답게 구출하려는 남자 역시 지뢰를 밟아 온몸이 산산조각난다. 간신히 찾아낸 주유소에서 순해 빠진 두 노인 주인 남녀를 만나 약간 느슨해지는 순간, 이들이 쏜 샷 건으로 한 남자는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고 다른 두 명은 살인 가스에 질식해 구역질을 하며 죽어 나간다. 비틀비틀 한 여자가 구르듯 주유소 편의점에 들어오는데, 이 여자 역시 두 노인의 사냥감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순간, 동양식 무술을 구사하는 여자의 맨손 액션은 가차 없이 노인 둘을 작살낸다. 그게 바로 크리스탈이다. 영화는 이때부터 크리스탈의 사정 봐주지 않는 생존 게임이 시작된다.



자,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정체들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죽이려는 자들은 누구이며, 그보다 더 궁금한 건 그들이 어떤 과거를 지닌 인간들이냐는 것이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죽이려는 자들은 대개 정신 이상적 부르주아, 돈이 넘쳐나 살인 게임이라도 해야 일상의 지루함을 떨쳐 낼 수 있는 인간들로 설정되기 십상이다. 쫓기는 자들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자, 부랑아 수준의 젊은 여행자들, 무산자, 곧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할리우드 헌팅 영화는 보통 이런 이분법으로 구성돼 있다. 쫓는 자는 악한 자들, 쫓기는 자들은 착한 사람들이다. 쫓는 자는 토끼, 쫓기는 자는 거북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결국 거북이가 이기게끔 한다. 토끼는 중간에 낮잠을 자다 경기에서 지니까.

그런데 영화 <헌트>는 갈수록 좀 이상한 느낌을 준다. 사냥꾼이 그다지 나쁜 사람들로 보이지 않는다. 쫓기는 자들이라고 해서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토끼와 거북이가 뒤바뀐 듯한 느낌을 준다. <헌트>는 보기에 따라서 매우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도 현재의 트럼프 정권에 대해 낄낄대며 뒤통수를 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가에게 납치돼 수면제에 취해 비행기에 태워져 이역만리 보스니아 같은 나라에 버려진 사람들은 죄다 트럼프주의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크리스탈만 해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됐던 용병 출신이다. 히말라야 산만큼 풍만한 가슴과 힙 라인은 트럼프 취향의 백인 여성의 외모를 닮아 있다. 같이 납치됐다 죽는 사람들 대부분이 러스크 벨트 이남 출신의 보수 유튜버이거나 그에 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도망치는 와중에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부자 리버럴리스트들이 자신들이 영지에 사람들을 풀어 놓고 사냥하면서 즐긴다던데 그게 이거 아냐?” 그렇다면 이 얘기는 트럼프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민주당식 분풀이, 혹은 피의 보복을 우회적으로 그리려 한 것이 아니냐는 합리적 의심을 충분히 갖게 만든다. 현실에서는 속절없이 당하고만 사는 백인 중산층 지식인들이 마음속으로, 영화로나마 저렇게 응징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 <헌트>가 부자 리버럴리스트들을 다 살려두느냐 하면 또 그렇지 않다는 데서 그 양가성(兩價性), 이중의 가치 지향성이 느껴진다. 민주당도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고 가진 자이기는 매한가지인 데다 관념적으로만 자유와 정의를 신봉하는 척, 본질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 속 사냥꾼들도 다 죽여 버린다. 한마디로 미국을 구성하는 지배계급을 싹 일소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영화 내내 뿜어져 나온다. 거북이는 토끼를 이기지만 토끼는 거북이를 죽여 버리고(크리스탈은 사냥꾼들의 리더격인 아테나(=힐러리) 스웽크를 격투 끝에 해치운다.) 이긴 척 하지만 그게 꼭 이긴 것 같이 느껴지지는 않게 만든다. 트럼프가 결국 재선에 성공할 듯이 보이고 또 그렇게 된다 해도 미국사회가 좋아지지 않을 것처럼. 영화 <헌트>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지금의 미국사회에 대해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도치(倒置)시켜서 빗대는 내용의 작품인 셈이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늘 그렇지만 아니면 말고다.

두 여자의 후반부 격투 액션 신은 한마디로 ‘끝내준다’. 할리우드 액션은 아시아형 무예 액션(주짓수, 무에타이, 우슈, 합기도 등)을 새롭게 접목시키면서 완전히 다른 차원의 영화로 진화했다. <존 윅>의 액션이 여성 판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이 영화의 다이너미즘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드레날린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영화를 보면서 크리스탈 편이 되느냐, 아테나 편이 되느냐, 심정적으로 누구에게 더 마음이 끌리느냐를 두고 당신의 정치지향성을 판단할 수 있다. 무슨 해괴망측한 얘기냐고 할 수도 있겠다. 뭐, 영화가 워낙 해괴망측한 설정으로 돼있는 작품이기는 하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7호 (2020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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